주간동아 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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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린 속 시원하게 풀어주는 4종 세트

  •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 foodi2@naver.com

    입력2007-04-02 10: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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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린 속 시원하게 풀어주는 4종 세트

    ‘묵밥’

    해장국으로 유명한 서울 종로구 청진동 골목에서 10여 년 밥벌이를 했다. 술꾼 친구들은 내 밥벌이 장소를 마냥 부러워했다. “야, 거기 해장국 끝내주잖아. 매일 술 마셔도 근처에 해장 음식 있으니 좋겠다.” 하지만 모르고 하는 말이다. 10여 년 동안 청진동 해장국을 먹은 것은 열 손가락에 꼽는다. 물론 매일 술을 마시다시피 했는데 그렇다.

    소의 선지와 각종 내장에 우거지 넣고 끓여내는 청진동 해장국은 내 입에 너무 무겁고 거칠다. 이 음식이 객관적으로 해장에 좋고 맛있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해장 음식에 대한 기호 차이는 생각 밖으로 크다. 피자에 콜라를 마셔야 해장이 된다는 사람도 있고 크림 범벅의 스파게티로 속 푸는 사람도 있다. 순전히 내 입맛, 아니 술에 찌든 위장에 맞는 해장 음식을 몇 가지 추천한다.

    개인별 기호 천차만별 … 위장 달래는 느낌으로 조리

    해장 음식으로 난 냉면을 최고로 친다. 메밀국수에 신 김치, 편육을 올려 한입 가득 넣고 씹다가 시원한 육수를 벌컥벌컥 들이켜면 아무리 술독 오른 위장이라도 녹아내리게 마련이다. 북녘 출신 어르신네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할 것이다. “암, 해장엔 냉면이 최고지. 냉면 먹기 전에 메밀국수 삶은 물을 쭉 들이켜는 것만으로도 속이 풀리지.”



    그렇다고 모든 냉면이 해장용으로 좋은 것은 아니다. 육수는 최대한 가벼워야 하고 약간 찝찌름한 맛이 나야 한다. 이때 곁들이는 김치는 물이 질척질척한 북녘식이 어울린다. 이런 조건을 갖춘 집으로는 충무로의 ‘필동면옥’을 들 수 있다. 전날 밤 울화 치미는 술자리로 속이 뒤틀려도 편육 반 접시에 냉면 한 그릇이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는 표정으로 이 집 문을 나서게 된다.

    해장 음식, 그 두 번째는 다슬깃국이다. 다슬기는 민물고둥을 말하는데 올갱이, 고디 등의 사투리로도 불린다. 다슬기는 전국 어느 개천에서나 잡히며, 따라서 지방마다 다양하게 국을 끓여 먹었다. 경상도식, 전라도식, 충청도식 등으로 다슬깃국 끓여내는 방식이 다 다르다는 말이다.

    다슬깃국이 해장국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되는데, 된장 푼 물에 다슬기를 푹 삶아낸 뒤 우거지나 부추 등 채소를 넣고 끓여내는 충청도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가볍고 시원해서 속 푸는 데 그만이다. 충청도가 석권하고 있는 이 다슬깃국 시장에 ‘무뚝뚝한’ 경상도 다슬깃국으로 술꾼들의 위장을 달래고 있는, 서울에서는 드문 식당이 있다. 인사동 좁은 골목 끝에 자리한 ‘풍류사랑’이란 곳이다. 술맛, 음식맛에 주인장의 입심까지 좋아 이 집은 문화계 인사들로 늘 북적거린다.

    해장 음식 세 번째는 묵밥이다. 멸치나 사골로 우려낸 육수에 메밀묵이나 도토리묵을 채쳐 넣고는 쫑쫑 썬 신 김치와 김을 올려내는 음식이다. 여기에 밥을 말아 먹기도 한다. 이 음식의 가장 큰 장점은 아무리 숙취가 심해도 눈 딱 감고 후루룩 입 안에 밀어넣기 시작하면 어느 틈엔가 한 그릇 다 비워지고 속이 확 풀린다는 것이다. 미끌미끌한 묵이 부담 없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거칠고 둔탁한 묵밥을 즐기려면 정릉 아리랑고개 인근에 있는 ‘봉화묵칼국수’가 낫고, 가볍고 때깔 있는 음식을 찾으면 광화문 교보빌딩 뒤편의 ‘미진’이 좋다. 두 집 다 메밀묵밥인데 아쉽게도 서울에서는 도토리묵밥을 제대로 하는 집이 없다.

    네 번째 해장 음식으로 대구볼때기탕을 소개하고 싶은데, 내 오랜 단골인 청진동 ‘부산뽈테기’가 재개발 바람에 폐업해 아쉬움이 크다. 그래서 난 집에서 가끔 대구지리를 끓인다. 커다란 대구머리를 구하면 금상첨화일 텐데 서울에서는 구할 방법이 없다. 중간 크기의 대구를 구해 멸치 육수에 대파, 무, 마늘, 소금만으로 맛을 낸다. 대구는 양념을 최소화하는 것이 맛내는 비법이다. 이는 차게 해서 먹어도 속이 확 풀린다.

    사실 전날 술자리가 즐거우면 아침에 따로 해장 생각이 들지 않는다. 세상 시름 토하는 술자리일수록 다음 날 해장 음식이 당긴다. 그래서 해장 음식들은 대부분 속이 시원하게 내려가는 기분이 느껴지도록 조리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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