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성공한 사람만이 추앙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한 결과물만 인정하는 사회 풍토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공한 결과’를 가진 사람들을 모방하려 하고, 그들을 삶의 지표로 삼기까지 한다.
‘성공한 사람=인정받는 사람’의 공식이 상식으로 통한다. 이는 논술에서 중요시되는 창의적인 생각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실패한 결과를 낸 사람도 떳떳하게 인정받을 수는 없는가?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흔히 성공한 인물들만 새겨지는 지폐 그림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나라 지폐의 인물들도 역사적으로 커다란 업적을 세운 ‘성공한 분’들이다. 우리는 지폐의 그림을 통해 그들의 업적을 기리게 된다. 이황 선생은 천원짜리 지폐에, 이율곡 선생은 오천원짜리, 세종대왕은 만 원짜리에 얼굴이 새겨져 있다. 이번에 신권으로 바뀔 때도 이들의 얼굴이 그대로 들어갔다. 그만큼 우리 국민에게 존경받는 인물들이다. 누가 봐도 신권에 새겨진 인물들은 추앙받아 마땅하다. 그들의 정치적, 학문적 업적은 후세에 귀감이 되기 때문이다.
패자에 대한 가치 부여해야 학문 윤리성 획득
그런데 이 문제를 창의적으로 접근해보자. ‘성공한 인물’만 모든 분야에 적용되어 귀감이 될 경우 문제점을 드러낼 수 있다. 성공한 사람들만 내세우는 분위기에서는 ‘성공한 사람’ 중심이라는 경직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사람들이 성공만이 갖는 가치에 모두 매달릴 경우 극소수의 엘리트만 인정받는 시대가 될 것이다.
나아가 성공만이 최고의 사회적 가치가 될 경우 과정에서 부정이 개입될 수도 있다. 제대로 된 사회는 결과보다 과정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성공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리기 위해서는 성공만을 바라는 사회적 요구가 줄어들어야 한다. 또 ‘실패한 결과물’에 대해서도 사회적으로 충분히 인정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는 승자와 패자를 정확히 갈라놓는다. 그 결과 승자는 항상 패자 위에 서고, 패자는 승자의 아래에 선다. 승자는 늘 전면에 나서고 패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할 존재로 인식한다. 패자에 대해서는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는다.
한 예로 역사적으로 공을 세운 인물은 동상을 세워 그 뜻을 기린다. 위압감이 들 정도로 규모가 큰 동상들이 많다. 승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앙의식이 그처럼 동상을 키운 것이다. 더욱이 우리들 대부분도 존경받는 인물의 거대한 동상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그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어느 곳을 찾아봐도 패자를 기리는 동상은 보기 힘들다. 그들에 대한 역사적인 재평가도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젠 학문적 성과를 내지 못한 패자에게도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패자에게서도 삶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진실이 자양분으로 녹아들 때 학문의 윤리성은 획득된다. 논술 수험생들에게 ‘황우석 사태’의 본질을 질문할 때가 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황우석 교수의 윤리 문제’를 짚는다. 물론 틀린 대답은 아니다. 그러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황우석 사태를 낳은 본질이라고 대답하면 어떨까? 창의적인 답변이 될 것이다. 반대로 정당한 ‘실패’도 ‘성공’과 같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았다면 어떠했을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연구 분위기가 형성돼 황우석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는 “연구를 하다 보면 기간이 지연될 수도, 예상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실패도 엄연한 연구의 일부다. 더욱이 학문적 의미가 큰 주제일수록 실패 확률이 높지만, 대한민국 학계는 정직한 실패자에게 너무나 가혹하다”라고 말했다. 성공 지상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한 학자의 솔직한 토로다.
지폐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우리나라 지폐에도 ‘실패한 지식인’의 얼굴 그림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해보자. 또 실패한 연구도 학문적인 업적으로 인정하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해보자. 정당한 과정을 통해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한 결과물이 나온 학자도 추앙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져보자. 이런 생각이 논술답안으로 구체화될 때 창의성은 더욱 빛날 것이다.
‘성공한 사람=인정받는 사람’의 공식이 상식으로 통한다. 이는 논술에서 중요시되는 창의적인 생각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실패한 결과를 낸 사람도 떳떳하게 인정받을 수는 없는가?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흔히 성공한 인물들만 새겨지는 지폐 그림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나라 지폐의 인물들도 역사적으로 커다란 업적을 세운 ‘성공한 분’들이다. 우리는 지폐의 그림을 통해 그들의 업적을 기리게 된다. 이황 선생은 천원짜리 지폐에, 이율곡 선생은 오천원짜리, 세종대왕은 만 원짜리에 얼굴이 새겨져 있다. 이번에 신권으로 바뀔 때도 이들의 얼굴이 그대로 들어갔다. 그만큼 우리 국민에게 존경받는 인물들이다. 누가 봐도 신권에 새겨진 인물들은 추앙받아 마땅하다. 그들의 정치적, 학문적 업적은 후세에 귀감이 되기 때문이다.
패자에 대한 가치 부여해야 학문 윤리성 획득
그런데 이 문제를 창의적으로 접근해보자. ‘성공한 인물’만 모든 분야에 적용되어 귀감이 될 경우 문제점을 드러낼 수 있다. 성공한 사람들만 내세우는 분위기에서는 ‘성공한 사람’ 중심이라는 경직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사람들이 성공만이 갖는 가치에 모두 매달릴 경우 극소수의 엘리트만 인정받는 시대가 될 것이다.
나아가 성공만이 최고의 사회적 가치가 될 경우 과정에서 부정이 개입될 수도 있다. 제대로 된 사회는 결과보다 과정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다. 성공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리기 위해서는 성공만을 바라는 사회적 요구가 줄어들어야 한다. 또 ‘실패한 결과물’에 대해서도 사회적으로 충분히 인정하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는 승자와 패자를 정확히 갈라놓는다. 그 결과 승자는 항상 패자 위에 서고, 패자는 승자의 아래에 선다. 승자는 늘 전면에 나서고 패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할 존재로 인식한다. 패자에 대해서는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는다.
한 예로 역사적으로 공을 세운 인물은 동상을 세워 그 뜻을 기린다. 위압감이 들 정도로 규모가 큰 동상들이 많다. 승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앙의식이 그처럼 동상을 키운 것이다. 더욱이 우리들 대부분도 존경받는 인물의 거대한 동상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그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어느 곳을 찾아봐도 패자를 기리는 동상은 보기 힘들다. 그들에 대한 역사적인 재평가도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젠 학문적 성과를 내지 못한 패자에게도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패자에게서도 삶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진실이 자양분으로 녹아들 때 학문의 윤리성은 획득된다. 논술 수험생들에게 ‘황우석 사태’의 본질을 질문할 때가 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황우석 교수의 윤리 문제’를 짚는다. 물론 틀린 대답은 아니다. 그러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황우석 사태를 낳은 본질이라고 대답하면 어떨까? 창의적인 답변이 될 것이다. 반대로 정당한 ‘실패’도 ‘성공’과 같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았다면 어떠했을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연구 분위기가 형성돼 황우석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는 “연구를 하다 보면 기간이 지연될 수도, 예상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실패도 엄연한 연구의 일부다. 더욱이 학문적 의미가 큰 주제일수록 실패 확률이 높지만, 대한민국 학계는 정직한 실패자에게 너무나 가혹하다”라고 말했다. 성공 지상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한 학자의 솔직한 토로다.
지폐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우리나라 지폐에도 ‘실패한 지식인’의 얼굴 그림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해보자. 또 실패한 연구도 학문적인 업적으로 인정하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해보자. 정당한 과정을 통해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한 결과물이 나온 학자도 추앙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져보자. 이런 생각이 논술답안으로 구체화될 때 창의성은 더욱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