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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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일오일로 사우디·러시아 ‘고유가 동맹’ 꺾은 美

바이든, 대선 승리 위해 대규모 원유 시추 허가, 셰일오일 업체 시추 기술도 발전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입력2023-12-27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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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최대 에너지 기업 엑손모빌이 텍사스 퍼미언 분지에서 셰일오일을 퍼 올리고 있다. [엑손모빌 제공]

    미국 최대 에너지 기업 엑손모빌이 텍사스 퍼미언 분지에서 셰일오일을 퍼 올리고 있다. [엑손모빌 제공]

    OPEC+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13개 회원국과 러시아 등 비OPEC의 10개 산유국이 결성한 모임이다. 이들 23개국은 2016년 12월 오스트리아 빈에 모여 석유시장 안정을 위한 협력 및 대화 플랫폼으로 OPEC+를 만들었다. 당시 사우디는 미국이 셰일오일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스윙 프로듀서(swing producer)’ 지위와 역할을 위협받자 석유시장 주도권을 유지하고자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스윙 프로듀서란 원유 생산량 조절을 통해 국제 석유시장 전체 수급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산유국을 의미한다.

    고유가 원하는 사우디·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오른쪽)가 12월 6일 사우디 리야드 왕궁에서 회담하고 있다. [PA]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오른쪽)가 12월 6일 사우디 리야드 왕궁에서 회담하고 있다. [PA]

    ‘빈 그룹’으로도 불리는 OPEC+는 1960년 결성된 OPEC가 확대된 카르텔로 지금까지 전 세계 석유 공급량을 좌지우지해왔다. 실제로 OPEC+는 지난해 11월부터 원유 생산량을 하루 평균 200만 배럴씩 감산하기로 결정해 미국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당시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는 유가 상승에 따른 물가 폭등을 막기 위해 증산해달라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요청을 거부하고 오히려 감산을 부탁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손을 들어줬다. 푸틴 대통령은 OPEC+가 감산하지 않으면 유가가 하락해 우크라이나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어려워지기에 사우디가 감산에 적극 나서주기를 바랐다. 사우디와 러시아는 OPEC+를 통해 ‘에너지 동맹’ 관계를 맺은 셈이다.

    OPEC+는 5월부터 연말까지 하루 평균 116만 배럴을 추가 감산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사우디와 러시아는 각각 50만 배럴씩 감산하기로 했다. 이후 사우디가 7월부터 연말까지 하루 100만 배럴을 추가 감산한다고 밝혔다. OPEC+의 잇따른 감산 결정은 고유가를 유지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기대와 달리 국제유가가 하락세를 보이자 OPEC+는 11월 30일 기존에 시행 중이던 감산 조치를 내년 1분기까지 추가 연장하고 90만 배럴을 추가 감산한다고 결정했다. 이 합의는 일부 회원국의 불만에도 사우디가 주도하고 러시아가 동조해 나온 것이다.

    사우디와 러시아는 저마다의 이유로 고유가 유지에 사활을 걸고 있다. 사우디는 ‘비전 2030 프로젝트’를 추진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감산을 통해 고유가가 유지되기를 바란다. 빈 살만 왕세자가 이끄는 비전 2030 프로젝트는 앞으로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제조업과 서비스업 등 탈석유산업을 육성하겠다는 경제 개혁 프로그램이다. 5000억 달러(약 65조2500억 원)를 투입해 건설 중인 ‘네옴시티’ 역시 이 프로젝트의 일부다. 러시아도 우크라이나 전쟁에 들어갈 전비를 마련하려면 고유가 기조가 절실하다. 고유가를 유지하면 자금을 더 많이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양국의 대규모 감산 조치에도 국제유가가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OPEC+의 일부 회원국이 추가 감산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회의론이 시장에 제기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이 12월 6일 사우디를 방문해 빈 살만 왕세자와 회담을 갖고 추가 감산 조치를 반드시 이행하겠다고 합의한 배경이다. 당시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양국은 국제 에너지 시장을 적절한 수준에서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상태로 유지하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美 원유 생산량 사상 최고

    유조선들이 미국의 한 석유 수출 터미널에서 원유를 선적하고 있다. [EPP]

    유조선들이 미국의 한 석유 수출 터미널에서 원유를 선적하고 있다. [EPP]

    국제유가 하락세의 또 다른 원인은 중국, 유럽연합(EU)의 경기둔화와 이에 따른 수요 감소 우려다.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의 내년 원유 소비량은 하루 50만 배럴이 늘어나는 데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원유 소비 증가분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내수 및 부동산시장 침체, 글로벌 경기 둔화에 따른 수출 감소 등이 중국의 원유 수요 부진 원인으로 꼽힌다.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12월 5일 부동산 장기 침체와 정부 부채 증가를 경고하며 중국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하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미국 원유 생산량이 사우디와 러시아의 감산 물량을 상쇄하고 남을 정도로 크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미국의 하루 원유 생산량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미국 에너지관리청(EIA)에 따르면 12월 초 미국의 하루 원유 생산량은 1320만 배럴로 2019년 11월 기록한 1300만 배럴을 넘어섰다. 8월 기준 미국의 하루 원유 생산량은 1310만 배럴로 사우디(890만 배럴)의 1.5배에 달했다. 원유 생산시설을 최대한 가동 중인 러시아(990만 배럴)를 훨씬 웃도는 수준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4분기 미국 원유 생산량이 EIA 예측을 뛰어넘었다”며 “(증가분은) 전 세계 원유시장 공급에 남미 산유국 베네수엘라가 추가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국제 에너지 전문가들은 내년에는 하루 50만 배럴을 추가 생산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때 친환경 정책을 강조하던 바이든 대통령과 미국 정부가 내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물가도 낮추고자 대규모 원유 시추를 허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알래스카 윌로 유전을 비롯해 17개의 대형 석유 시추 프로젝트를 승인했다. 바이든 대통령 입장에선 대선에서 승리하려면 물가를 낮추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유가를 낮추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셰일오일 생산기술 매년 향상”

    국제유가가 큰 폭으로 떨어지면서 휘발유와 경유 가격이 9주 연속 하락하고 있다. 12월 10일 서울 양천구 한 주유소에 기름값이 표시돼 있다. [뉴스1]

    국제유가가 큰 폭으로 떨어지면서 휘발유와 경유 가격이 9주 연속 하락하고 있다. 12월 10일 서울 양천구 한 주유소에 기름값이 표시돼 있다. [뉴스1]

    미국 에너지 기업들도 정부 지원에 힘입어 원유 생산 투자를 확대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인수합병(M&A)도 늘어났다. 미국 에너지 기업 옥시덴털 페트롤리엄은 최근 미국 셰일오일 회사 크라운록을 120억 달러(약 15조6000억 원)에 인수하기로 합의했다. 옥시덴털은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버크셔헤서웨이 회장이 투자한 회사다. 미국 최대 에너지 기업 엑손모빌은 내년 원유 탐사와 생산시설 등에 대한 투자를 230억~250억 달러(약 29조9000억~ 32조5000억 원)로 늘리고, 2025~2027년에는 220억~270억 달러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엑손모빌은 셰일오일 기업 파이어니어 내추럴 리소시스를 600억 달러(약 78조 원)에 인수하기로 했다. 엑손모빌 경쟁사인 셰브론도 530억 달러(약 68조9000억 원)에 남아메리카 가이아나 유전 개발권을 가진 헤스를 인수하기로 했다.

    미국 셰일오일 업체들의 시추 기술 발전도 유가 하락을 이끌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텍사스와 뉴멕시코 유정에서 시추 장비당 평균 석유 생산량이 하루 1319배럴로 증가했는데, 이는 10년 전(183배럴)의 7배가 넘는 수치다. 시추 장비 수는 정점을 찍은 2014년(1600개)의 3분의 1 수준인 502개에 불과하지만 산유량은 증가했다. 일례로 다이아몬드백에너지는 유정 시추에 걸리는 시간을 19.5일(2019)에서 11.5일로 40% 단축했다. 마이크 워스 셰브론 최고경영자(CEO)는 “셰일오일 업체들의 생산기술이 매년 향상되고 있다”고 밝혔다.

    게다가 비상장 셰일오일 업체들도 생산량을 크게 늘리고 있다. 글로벌 금융서비스 기업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글로벌에 따르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생산량을 가장 많이 늘린 미국 셰일오일 생산 업체 10개사 중 7개사가 비상장사다. 비상장사인 뮤본오일, 엔데버 에너지 리소시스의 증산량은 미국 최대 에너지 기업 엑손모빌의 증산량을 능가했다.

    현 상황으로 판단할 때 유가 전쟁 승자는 고유가를 고집해온 사우디와 러시아보다 저유가를 주장해온 미국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국제유가 하락세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EIA가 발표한 12월 단기 에너지 전망에 따르면 2024년 브렌트유 기준 국제유가는 배럴당 83달러(약 10만7980원)로 기존 전망치보다 10달러 하향 조정됐다. 국제에너지기구(IEA)도 최근 발표한 월간 보고서를 통해 OPEC+가 감산을 유지하더라도 중국의 석유 수요 둔화세가 계속돼 내년 글로벌 석유시장은 공급 과잉으로 국제유가가 하락세를 보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스윙 프로듀서 입지 다지는 美

    신규 유전을 개발한 브라질과 가이아나 등 OPEC+ 비회원국도 증산 레이스를 벌이고 있다. 이에 따라 글로벌 석유시장에서 OPEC+ 비중은 2016년 이후 가장 낮은 51% 수준까지 떨어졌다. 사우디 입장에선 감산을 통한 고유가를 기대했지만 미국에 좋은 일만 해준 셈이 됐다.

    사우디가 감산을 종료하고 증산에 나서 미국과 시장점유율 경쟁을 한다면 국제유가 하락세는 더욱 가팔라질 수 있다. 국제 에너지 전문가들은 사우디가 원유 생산량을 대폭 늘려 미국과 치킨게임에 나서진 않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사우디가 급격히 증산해 국제유가가 급락할 경우 전쟁 비용을 조달해야 하는 러시아가 강력하게 반발하며 OPEC+가 크게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유가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미국이 진정한 스윙 프로듀서로서 입지를 다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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