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한 장면. [IMdB]
‘미녀와 함께하는 1시간은 1분처럼 흘러가고, 뜨거운 난로 위에 앉아 있는 1분은 1시간처럼 흘러간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이 설명은 왜곡된 것이었다. 여기서 나오는 시간의 상대성은 인지과학 개념으로 그의 물리학 이론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설명했을까. 최대한 쉽게 설명해달라는 요구에 대한 임시방편적 설명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아인슈타인만 기억하지만, 상대성이론엔 수많은 과학자의 연구가 아로새겨져 있다. ‘지구가 빠르게 돈다면, 왜 우리는 지구가 도는 걸 못 느낄까’라는 의문을 제기한 갈릴레오 갈릴레이도 있다. 놀랍게도 갈릴레이는 모든 운동이 상대적임을 알아냈다. 동전과 배, 배와 동전은 각각 서로를 관측하기에 배 안에서 동전을 떨어뜨리는 것만으로는 배가 정지했는지 움직이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비슷한 속도로 달리는 옆 차를 떠올려보자. 무척 어두운 밤이라 주위 풍경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차 두 대가 아무리 빨리 달리고 있어도 서로 정지한 듯 느껴질 것이다.
‘가장 성공적 실패’로 밝혀진 빛의 정체
갈릴레오 갈릴레이(왼쪽).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과 맥스웰 방정식. [영국 국립해양박물관, Science Meets Faith·SMF]
‘19세기 뉴턴’으로 불린 영국 과학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전기와 자기를 하나로 통합해 설명할 수 있는 방정식을 만들었다. 전자기파를 다루는 맥스웰 방정식이다. 이에 따르면 전자기파의 속력은 빛의 속력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빛이 곧 전자기파가 아닐까.
하지만 빛이 전자기파라는 파동이라면 중간에 전달을 매개하는 매질(媒質) 없이는 전달될 수 없는 것 아닐까. 마치 경기장에 관중이 한 명도 없으면 파도타기 응원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빛의 매질로서 에테르라는 상상의 물질이 등장했다. 에테르는 우주 전체에 균일하게 퍼져 있으며, 에테르가 정지한 공간에서 맥스웰 방정식이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미국 물리학자 앨버트 마이컬슨과 에드워드 몰리가 그 존재를 입증하기 위한 실험에 나섰다. 하지만 그 실험이 완벽하게 실패하면서 거꾸로 에테르가 존재하지 않음이 밝혀졌다. 역사상 가장 은밀하고 위대하게 실패한 실험이었다.
남은 문제는 맥스웰 방정식으로 계산한 빛이 갈릴레이의 상대적 운동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갈릴레이는 분명히 운동에는 기준이 있으며, 절대적 속력은 없다고 단정했다. 하지만 기준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빛의 속력은 항상 일정한 상수였다. 당시까지 믿어 의심치 않던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끝까지 에테르를 포기하지 못한 일부 과학자는 맥스웰 방정식을 상황에 따라 적당히 바꾸거나 에테르 고유의 기괴한 특성을 만들어냈다. 그때 돌파구를 찾아낸 이가 바로 아인슈타인이었다.
가장 절대적인 자연법칙의 등장
헤르만 민코프스키(왼쪽).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위키피디아, 미국 의회도서관]
제목만 들으면 특수상대성이론이 매우 상대적인 이론 같지만, 하나의 절대적 가정을 완벽하게 지켜내기 위해 다른 모든 걸 상대화해버린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절대적 가정이 빛의 속력이다. 누가 어디서 관측하든 상관없이 빛은 늘 일정한 속력을 갖는다. 이를 위해 시간과 공간마저 마음대로 바꿔버리는 것이 바로 상대성이론이다.
고전역학에서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었다. 뉴턴의 운동법칙은 절대적인 시간 속에서 공간을 누볐다. 이를 건드리는 것이 과학계에선 금기였다. 네덜란드 물리학자 헨드릭 로런츠나 프랑스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 모두 그 금기를 넘어서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이를 뛰어넘었다. 그는 변화 외에 불변하는 것은 없다던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시간과 공간은 사실 인간적 이해를 위한 편리한 개념이며 우주의 본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빛의 속력이야말로 우주에 존재하는 보편적 질서고, 우리는 신이 만든 이 불변의 언어를 이해하고자 시간과 공간이라는 번역을 거쳐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력을 최초로 번역한 역자로, 그 과정에서 복잡하게 얽힌 시간과 공간을 하나로 합쳐 4차원의 시공간으로 만들었다. 1908년 독일 수학자 헤르만 민코프스키는 과학자 모임에서 이런 연설을 남겼다. “앞으로 시간과 공간은 마치 그림자처럼 사라질 것이며, 오직 둘이 합쳐진 시공간만이 독립적인 실체로 남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분리돼 있지 않음을 안다.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질량과 에너지 관계식도 여기서 나왔다. 고전역학에서는 정지한 물체가 에너지를 가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지만,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정지해 있어도 질량만 있다면 에너지를 갖는다.
달리는 소녀와 멈춰 선 소년이 보는 세상
일본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한 장면. [IMdB]
달리는 소녀와 멈춰 있는 소년이 빛을 이용해 각자 시간을 잰다고 가정했을 때 소녀가 한쪽 손에서 다른 쪽 손으로 쏘는 빛은 정확하게 1m를 이동한다. 하지만 멈춰 있는 소년이 보는 빛은 소녀와 함께 달리고 있기 때문에 더 긴 거리를 이동한다. 빛이 이동한 거리를 시간으로 나누면 속력이 나오는데, 빛의 속력은 일정하니 소년이 잰 시간은 소녀가 잰 시간보다 길어진다. 시간 간격이 팽창한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공간도 수축한다.
거짓말 같은 이 이야기는 실험으로 증명됐다. 1971년 물리학자 조지프 하펠과 리처드 키팅은 매우 정밀한 시계 3개를 준비해 1개는 공항에, 나머지 2개는 비행기에 싣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지구를 돌았고, 그 결과 각 시계의 시간은 달라졌다.
프랑스 사회학자 오귀스트 콩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오직 이 사실만이 절대적이다.” 과연 그럴까. 아니다. 오직 빛의 속력만이 절대적이다.
궤도_연세대 천문우주학과 학부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천문연구원 우주감시센터와 연세대 우주비행제어연구실에서 근무했다. ‘궤도’라는 예명으로 팟캐스트 ‘과장창’, 유튜브 ‘안될과학’과 ‘투머치사이언스’를 진행 중이며, 저서로는 ‘궤도의 과학 허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