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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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암살자 ‘항생제 내성’

[이윤현의 보건과 건강]

  • 이윤현 남서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 (대한검역학회 회장)

    입력2025-12-18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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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생제 남용이 최근 세계 각국에서 심각한 공중보건 위기를 야기하고 있다. GETTYIMAGES

    항생제 남용이 최근 세계 각국에서 심각한 공중보건 위기를 야기하고 있다. GETTYIMAGES

    90세를 바라보는 장모님이 최근 항생제 내성균 감염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 평소 “그 의원은 약이 잘 듣는다”며 동네 한 의원을 즐겨 찾으시던 터다. 문득 의심이 들었다. 그곳에서 항생제 처방이 반복됐던 것은 아닐까. 그 결과 세균이 사라지지 않고 더 강해져 돌아온 것은 아닐까.

    항생제 내성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사람 생명을 위협한다. 오늘날 몽골에서는 그 양상이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방대한 국토에 비해 의료기관 수가 적고, 전문 인력 또한 턱없이 모자라는 탓이다. 수도 울란바토르를 벗어나면 의사 한 명 없는 지역이 많다. 감기나 복통, 작은 상처에도 항생제를 먹는 것이 일상이다. 

    몽골 상당수 약국에서는 진단 없이, 검사 없이 항생제 판매가 이뤄진다. 내성이 생기면 더 강한 약, 또 다른 약을 먹는다. 필자가 최근 공적개발원조(ODA)의 일환으로 몽골 항생제 내성 대응사업 평가를 하면서 만난 한 아이는 며칠째 고열에 시달렸다. 집 근처엔 아이를 데려갈 병원이 없었다. 부모는 결국 약국에서 세 종류의 항생제를 사다가 섞어 먹였다. 약사가 그렇게 하라고 권했다고 한다. 그 결과 아이 병세는 더 나빠졌다. 의료 여건이 열악한 나라에서는 이렇게 항생제가 마지막 희망이지만, 그것에 의지하다 보면 곧 내성이라는 재앙을 맞닥뜨리게 된다. 2021년 몽골에서는 항생제 내성 관련 사망자가 약 1460명 발생한 것으로 보고됐다. 심지어 젖소에서 다제내성균이 검출돼 음식 사슬을 통한 인체 전파까지 우려된다.

    의료 과잉이 초래한 비극

    한국은 정반대 상황이다. 의료의 풍요가 항생제 내성을 키우는 토양이 되고 있다. 한국 환자들은 병원 약을 먹었는데도 감기가 바로 낫지 않으면 의사에게 “항생제라도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요구한다. 의사는 불필요한 처방임을 알면서도 환자가 다른 병원으로 떠날 것을 우려해 처방전을 낸다. 항생제를 자주 처방하는 의원이 “잘 치료한다”는 평판을 얻는다. 하지만 그 잘 듣는 약이 내일의 치료를 망치는 독이 될 수 있다.

    이런 환경을 바꾸려면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의료기관으로 하여금 항생제 처방 시 환자에게 내성 위험성과 부작용을 명시적으로 고지하게 해야 한다. 또 환자 스스로 자신의 항생제 복용 이력과 내성 위험을 확인할 수 있는 ‘개인 내성지표(Personal AMR Index)’ 시스템을 개발해야 한다. 혈압을 재듯이 쉽게 내성 수준을 모니터링할 수 있는 기술이 마련된다면 항생제 남용을 막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몽골에서는 의료 공백이, 한국에서는 의료 과잉이 항생제 내성을 키우고 있다. 조용하지만 치명적인 재앙이다. 항생제를 많이 쓰는 나라가 잘사는 나라가 아니다. 아껴 쓰는 나라가 미래를 지키는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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