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06

2015.09.21

춘추전국, 비로소 자유로운 음악의 시대

장르와 정체성에 대하여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15-09-21 10:2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춘추전국, 비로소 자유로운 음악의 시대

    1997년 서울 신촌 거리에서 공연하는 인디밴드 크라잉넛.

    밴드 혁오의 인기가 시들 줄 모른다. ‘무한도전 : 2015 무한도전 가요제’ 이후에도 ‘위잉위잉’ 같은 노래는 음원 차트 상위에 머물고 있다. 이 노래가 실린 이들의 데뷔 앨범 ‘20’이 얼마 전 재발매됐고, 15초 만에 품절됐다. 혁오의 성공이 특별한 건 예능을 등에 업었으되 다른 요소 없이 오직 음악으로 빛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장기하와 얼굴들이 ‘루저 감성’으로 486세대의 지지를 얻었고, 십센치는 ‘아메리카노’의 개그 코드로 초기 원심력을 확보했다면, 혁오는 그렇지 않다. 오직 음악의 힘이다. 여기엔 장르도 없다.

    음악을 소개하는 사람에게, 장르란 굉장히 유용한 도구다. 특히 아직 이름을 알리지 못한 신인 뮤지션의 경우에는 매우 편리하다. A라는 밴드를 모던록 뮤지션이라 규정하는 순간 A의 계보가 나오고 추구하는 사운드가 드러난다. 기존의 것이 아닌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려는 욕망 또한 그렇다. 하지만 대부분은 실패한다. 기존 스타일을 답습하거나 이를 응용해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정도다. 이것만 제대로 해도 성공적인 록 스타가 될 수 있다.

    장르란 따라서, 뮤지션에게도 유용한 매뉴얼이다. 한국 인디음악의 역사 또한 기존 장르를 답습하고 재현해온 과정이었다. 이전 언더그라운드 음악이 해외 명곡을 얼마나 잘 카피하느냐를 지상명제로 삼았다면, 인디의 가장 큰 공헌은 장르의 문법을 빌려오되 이를 통해 자작곡을 선보였다는 점에 있다.

    그들이 빌리는 문법은 대체로 단순했다. 펑크와 그런지가 장악했던 전체적 분위기에서 델리스파이스와 언니네 이발관, 마이 앤트 메리가 삼분했던 모던록이 있다. 닥터코어911 등 뉴메탈 사운드가 인기를 끌던 시절이 있고 삼청교육대, 바셀린 등이 이끌어온 하드코어 흐름이 있다. 해외에서의 급격한 퇴조와 더불어 그런지와 뉴메탈은 사라졌지만 다른 네 장르는 여전히 홍대 앞 인디신을 떠받치는 다리다. 그러나 장기하와 얼굴들, 국카스텐 등 인디 세대교체를 이룬 음악은 모두 특정 장르에 기대지 않는다. 어찌 보면 변종 음악이다.

    이런 변종 음악이 탄생할 수 있는 이유는 음악계에서 헤게모니가 사라진 전 세계적 현상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너바나, 스매싱 펌프킨스, 오아시스 등 세계를 석권했던 밴드가 동시대에 존재했던 게 1990년대였다면 지금의 음악계, 특히 록계에는 뚜렷한 패자(覇者)가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누구나 동경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뚜렷한 트렌드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뉴욕과 런던, 도쿄에서도 각양각색의 밴드가 각양각색의 음악으로 고만고만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현실은 곧 자신의 욕망에 자유로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그렇게 한국의 인디 음악은 이제야 영국과 미국, 일본의 트렌드와 무관하게 자신들의 음악을 일궈내고 있다.

    들을 음악이 없다며 한탄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좋은 음악이 신생아가 태어나는 비율로 쏟아져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찾아 들으려고 하지 않을 뿐이다. 그들이 원하는 건 빤한 음악이 아닌, 새로운 음악일 것이다. 예술가의 자아에 충실한 음악일 수도 있다.

    그런 이들에게 인디 음악은 하나의 가능성이 될 것이다. 뮤지션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그것이 실천으로 이어지고 총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게 바로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음악 그 자체에 집중하는 인디 뮤지션들의 세계다. 이렇다 할 흥행력과 지원 없이도 이들이 20년 넘는 세월을 버텨온 힘이기도 하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