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88

2013.05.20

‘단구(丹丘)’라고 서명된 김홍도 작품은 모두 가짜

공자 이름 구(丘) 영조 때부터 금기…만년의 호는 ‘丹邱’

  • 이동천 중국 랴오닝성 박물관 특빙연구원

    입력2013-05-20 16: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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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구(丹丘)’라고 서명된 김홍도 작품은 모두 가짜

    1 김홍도의 가짜 ‘편주도해’. 2 ‘그림1’에 서명된 ‘단구(丹邱)’. 3 ‘그림1’ 속 ‘단구(丹邱)’의 위조 과정.

    우리말에 “좋은 게 좋다”는 말이 있다. 뭐든 사람과 어울려서 적당히 하자는 거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 미술품 가짜들은 오랜 시간 수없이 만들어졌지만 지금까지 어떠한 검증도 거치지 않은 채 전해오고 있다. 미술품 진위문제가 불거지면 의식 있다는 사람조차 피하려고만 할 뿐 가짜 근절에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미술품 진위 감정에 심취했던 강세황(1713~1791)은 졸렬한 가짜 서화작품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토당토않게 속는 일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체념하고 가짜를 받아들였다.

    “그림을 보는 데 어찌 반드시 가짜, 진짜를 따지겠나. 어지럽게 아무렇게나 그린 그림도 아무튼 보배라 하네. 손에 쥔 옛 그림 펼치기도 전에 중국의 대화가인 심주(沈周)의 그림이라 말하니 사람들 놀라서 자빠지네. (중략) 작은 종이에 시서화 삼절이니 영원히 남기에 충분하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 창에 ‘고미술품 위조’나 ‘고미술품 사기’ 등을 써보면, 최근 누군가가 고미술품을 위조하거나 가짜를 유통하다 발각됐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가짜가 만들어지고 팔린 것에 비하면, 법의 처벌을 받는 경우는 정말 극소수다. 가짜가 쓰레기산처럼 쌓여 진짜를 밀어내다 보니, 옛날에 만들어진 가짜를 밝히는 것도 힘들지만 이를 믿게 하기는 더 어렵다.

    글자 바꾸거나 필획 생략도



    미술품 감정은 단순히 결과로 작품 진위만 가리는 게 아니다. 부적절한 근거로 우연히 작품 진위를 맞췄다면, 이 또한 위험한 일이다. 미술품 감정학에서는 미술품을 신비하거나 우연한 것이 아닌, 일정한 원인에 의한 필연적 산물로 본다. 올바른 감정은 그 진짜, 가짜의 원인을 분명하게 밝힐 때 가능하다. 이를 위해 작품 제작과정은 물론, 제작 당시 인문환경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

    필자는 2005년 5월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기획한 ‘단원 대전’ 전시장에서 흥미로운 작품을 발견했다. 전시된 김홍도(1745~?)의 ‘편주도해’(그림1)는 가짜로, 동일 위조자가 시간이 지난 뒤 그림 속 서명에 다시 가필했다. ‘그림1’에서 ‘단구(丹邱)’(그림2)라고 쓰인 서명을 자세히 보면 ‘구(邱)’ 자의 ‘구(丘)’와 ‘부()’의 먹색깔이 다르다. 처음에는 ‘단구(丹丘)’라고 썼으나, 나중에 ‘구(丘)’ 자 옆에 ‘부()’ 자를 써넣은 것이다(그림3).

    현재 우리 미술사학계는 김홍도가 만년에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뜻의 ‘단구(丹丘)’와 ‘단구(丹邱)’를 호로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그림1’과 함께 전시한 김홍도의 ‘좌수도해’(그림4)에는 ‘단구(丹丘)’라고 적혔다. 그렇다면 ‘그림1’에서 ‘단구(丹丘)’라고 해도 문제될 게 없는데, 위조자는 왜 굳이 ‘그림3’처럼 했을까. 뒤늦게 위조자는 아차 싶었던 것이다. 자신이 몰랐던 뭔가를 알고 첨가한 것으로, 당연히 김홍도 작품의 진위에 관한 내용이었다.

    김홍도가 만년에 쓴 호는 ‘단구(丹丘)’가 아닌 ‘단구(丹邱)’다. ‘피휘(避諱)’가 바로 그 이유다. 휘(諱)는 황제, 선현, 조상의 이름을 일컫는 말이며, 피휘는 존경의 뜻으로 그들의 이름에 들어간 글자나 음을 쓰지 않고 피한다는 뜻이다. 황제나 왕 이름을 피하는 ‘국휘(國諱)’, 성현 이름을 피하는 ‘성인휘(聖人諱)’, 조상 이름을 피하는 ‘가휘(家諱)’가 있다. 피휘 방법에는 글자를 바꾸거나, 글자를 비우거나, 글자 필획을 생략하는 것 등이 있다. 국가 간 외교 문서나 집안 간 서신 등에서 피휘가 지켜졌다.

    ‘단구(丹丘)’라고 서명된 김홍도 작품은 모두 가짜

    4 김홍도의 가짜 ‘좌수도해’. 5 강세황의 ‘증별은수부성경’. 6 김홍도의 호가 ‘단구(丹邱)’라고 새겨진 인장.

    김홍도 인장에서도 丹邱

    ‘단구(丹丘)’라고 서명된 김홍도 작품은 모두 가짜

    7 김홍도의 가짜 ‘부상도’.

    김홍도의 호로 ‘단구(丹丘)’가 쓰일 수 없는 이유는 ‘丘’ 자가 바로 공자 이름이기 때문이다. 중국 송나라, 금나라, 청나라에서 공자 이름을 피휘했다. 특히 청나라 옹정제(재위 1723~1735)와 건륭제(재위 1735~1795) 때는 피휘를 매우 엄격하게 지켜 이를 어기면 가혹하게 처벌했으며 1724, 1725년에는 옹정제의 명령으로 공자 이름을 쓸 수 없었다. ‘사서오경’을 제외하고 ‘丘’ 자를 반드시 ‘邱’ 자로 써야 했으며, 지명에 쓰이던 ‘丘(qiu)’ 자 또한 ‘邱(qiu)’ 자로 바꾸고 발음도 ‘期(qi)’로 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 ‘丘’ 자가 ‘邱’ 자로 바뀌었을까. ‘영조실록’을 보면 1750년 음력 12월 2일 대구의 이양채가 공자의 이름 ‘丘’ 자를 피휘하자며 영조에게 다음과 같은 상서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들이 사는 고을은 바로 영남 대구부(大丘府)입니다. 부의 향교에서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온 것은 건국 초부터였습니다. 음력 2월과 8월 석전제 때 지방관이 당연히 초헌을 하기 때문에 축문에 대수롭지 않게 ‘대구(大丘) 판관’이라고 써놓고 있습니다. 이른바 ‘대구(大丘)’의 ‘丘’ 자는 바로 공자님의 이름자인데, 신전에서 축을 읽으면서 공자님의 이름자를 범해 사람들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대구 지명을 살펴보면 ‘영조실록’에서는 전부 대구(大丘)로 썼고, ‘정조실록’에서는 정조 2년(1778)부터 ‘대구(大邱)’로 바뀌었다.

    김홍도의 예술세계에 누구보다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강세황이다. 강세황은 중국 선진문화를 동경해 “중국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我有平生恨 恨不生中國)”(그림5). 그의 문집 ‘표암고(豹菴稿)’를 보면 1752년에 쓴 시는 ‘구(丘)’ 자를 써 공자의 이름을 피휘하지 않았고, 1769년 쓴 시는 ‘구(邱)’ 자를 써 공자의 이름을 피휘했다.

    오세창(1864~1953)은 ‘근역서화징’에서 김홍도의 호를 ‘단구(丹邱)’라고 했다. 오세창이 우리나라 서화가의 인장을 모아 엮은 ‘근역인수’에 실린 김홍도의 인장을 보면 김홍도의 호는 ‘단구(丹邱)’다(그림6).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단원유묵첩’에 실린, 1805년 음력 1월 22일 김홍도가 쓴 글씨를 보면 ‘단구(丹邱)’라고 서명했다. 참고로, 이 글씨는 필자가 직접 본 결과 김홍도의 원본이 아니라 필사본이다.

    이렇듯 김홍도가 만년에 쓴 호는 ‘단구(丹丘)’가 아니라 ‘단구(丹邱)’이기에 ‘그림3’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그림4’나 서울 한남동 리움이 소장한 ‘부상도’(그림7)처럼 김홍도의 작품에 ‘단구(丹丘)’라고 서명된 것은 모두 가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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