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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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근보다 유머 근육을 키우라니까

전계수 감독의 ‘러브픽션’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입력2012-03-05 11: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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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근보다 유머 근육을 키우라니까
    여자는 잘생기고 재미없는 남자와 못생기고 유머감각 뛰어난 남자 중 누구를 더 좋아할까. 슈퍼스타급 남자 연예인의 매니저였던 한 남자가 자랑삼아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가 함께 일했던 연예인은 조각 같은 얼굴과 훤칠한 키에 식스팩 몸매를 가졌다. 가끔 둘이서 클럽에 가 일반인과 즉석만남을 하곤 했는데, 룸에 들어올 때면 “와” 하고 반색하며 톱스타 옆에 달라붙던 여자가 열이면 열 룸을 나갈 때는 매니저인 자신의 팔짱을 끼더라는 거였다. 이 남자의 얼굴 생김새는 지극히 평범하고, 키는 ‘루저’급이다. 반면 입담과 유머는 상위 5%가 될 만하다.

    영화 ‘러브픽션’에서 남자주인공 구주월(하정우 분)의 상상 속 연애코치(이병준 분)는 이렇게 말한다.

    “(데이트 신청을 할 때) 너무 진지해선 안 돼. 여자가 부담을 느끼니까. 베르테르가 실패한 가장 큰 이유가 뭔지 알아. 바로 형편없는 유머감각이었어. 유머야말로 세대를 초월한 여자들의 영원한 친구지.”

    감독의 경험이 녹아든 이야기

    ‘러브픽션’은 로맨틱 코미디영화다. 해 아래 새로울 게 없고 이제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사람 수 이상으로 지겹게 반복되고 변주되지만 그래도 또 빠져드는 게 연애담이다. 사랑의 속성 자체가 그렇다. 니체는 미쳐서 죽기 전에 “오! 끔찍한 생이여, 다시 한 번!”이라고 말했다. 악독하고 잔혹한 연애의 끝에서 “내 평생 다시는 여자(남자)를 만나나 봐라”라고 독설을 퍼붓거나 소주잔을 앞에 놓고 훌쩍이며 청승을 떨던 젊은이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눈에 하트를 깜빡인다.



    ‘러브픽션’ 역시 생면부지의 남녀가 만나 호감을 갖고 잔뜩 달아올랐다가 시나브로 애정이 권태로 바뀌고, 싫증이 분노와 저주의 얼굴로 일변했다가 마침내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을 수습하기까지의 결정적 연애 순간을 담아낸 흔한 러브스토리 가운데 하나다. 끝을 알면서도 뛰어드는 게 사랑이고, 알면서도 속는 게 로맨스영화의 공식이다. 그러나 ‘러브픽션’은 연애에서 유머가 차지하는 ‘화학적 비중’을 남녀관계의 빛나고 아프고 치사하고 더러웠다가 시들해지는 순간 속에 매우 탁월하게 용해시켰다는 점에서 찾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다. ‘러브픽션’의 유머는 근래 어떤 한국 로맨스영화보다 우월하다.

    남자주인공 구주월의 서른한 살 봄은 잔인하고 쓸쓸했다. “새로 집필을 시작한 소설은 제목만 남겨둔 채 영원히 시작될 줄 몰랐고 채식주의자였던 나를 2년간 공공연히 비난하던 여자친구는 이 말만을 남기고 이별을 선언했다. ‘네가 감자탕만 먹을 줄 알았어도….’” (이 영화에는 직접 시나리오를 쓴 전계수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담이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배우 하정우의 전언에 따르면 전 감독은 붉은 고기는 안 먹고 닭고기는 먹는 ‘세미 베지테리언’이다.)

    복근보다 유머 근육을 키우라니까
    그런 그에게 운명의 상대가 나타난다. 잘 아는 출판사 사장을 따라 휴가 겸 출장으로 영화제가 열리던 독일 베를린에 갔는데, 그곳의 한 리셉션에서 스치듯 만난 영화수입사 직원 이희진(공효진 분)에게 첫눈에 반한 것이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희진을 잊지 못하던 주월은 상상 속 연애코치의 조언을 받아들여 희진에게 유머 세례를 퍼붓기 시작한다.

    일단 데이트를 청하는 편지. “지난달 백림(베를린)의 한 연회에서 우연치 않게 잠시 호상간에 인사를 나눴던, 왔다 갔다 하는 구주월이라 하오”로 시작한 편지는 “뜻하지 않게 낭자를 뵙고 잠시나마 님의 자태에 혼절이라도 한 듯 정신이 아득하고 혼백이 산란하여 오뉴월 누렁이마냥 혀를 쭉 빼물고 애꿎은 타액만 드립다 들이켰소만”으로 이어져 “이번 주말 저녁 한수에 배나 띄워놓고 칵테일이라도 한 사발씩 홀짝이고 싶은데 부디 망측하다 꾸짖지 마시고 가슴 벅찬 리플라이 기다리겠소”로 마무리된다.

    이런 편지를 받고 무심할 여인네가 있을까. 남녀는 만남을 시작하고, 짐짓 무표정하면서도 심각한 바리톤으로 시치미 뚝 뗀 채 펼치는 남자의 ‘유머 서커스’가 이어진다. 뭇사람이 모인 술자리에서 불쑥 일어나 “고결한 인격과 활달한 미모를 갖춘 것도 모자라 절제된 지성과 안정된 유머감각으로 내 마음을 초토화시킨 저 여인을 고발하려고 이렇게 결례를 무릅쓰고 분연히 일어섰다”면서 “우아, 숭고, 희망, 기쁨, 평화, 매혹, 섹시를 제것으로 하고 비천, 타락, 절망, 슬픔, 혼돈, 평범, 따분만을 내게 허락한 당신! 당신은 누구신가”라며 좌중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 주월. 자지러지는 웃음은 두 남녀의 거리를 좁히고 좁혀 마침내 한 침대에서 만나게 한다.

    극중 극 ‘액모부인’도 볼거리

    복근보다 유머 근육을 키우라니까
    하지만 웃음은 점점 창백해지고, 농담의 밑천은 바닥을 드러내며, 서서히 찾아오는 관계의 균열 속으로는 의심과 회의가 찾아든다. 주월은 대학시절부터 이어진 희진의 남성편력에 관한 ‘제보’를 받고 제 분에 겨워 끙끙 앓다가 결국 파국을 재촉한다.

    아마도 ‘러브픽션’은 ‘색, 계’ 이후 여자 주인공의 ‘겨드랑이털’을 가장 창의적으로 활용한 영화일 것이다. 영화 ‘하녀’에 출연한 전도연을 인터뷰했을 당시 전도연은 “진짜 에로틱하다는 것은, 말하자면 ‘색, 계’의 베드신에서 보여준 탕웨이의 겨드랑이털”이라고 했다. ‘러브픽션’에선 주월이 처음으로 희진과 한 침대에 누웠을 때, 상대의 수북한 겨드랑이털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바람에 한차례 소동이 벌어진다.

    이에 영감을 받아 한동안 상상력 고갈에 시달렸던 주월은 ‘액모부인’이라는 스릴러소설을 쓰고, 소설 내용은 액자 형식의 영화 속 영화로 삽입된다. 1960년대 고전 한국 영화 스타일의 신파극인 ‘액모부인’ 또한 이 영화의 주요 볼거리자 웃음거리다. 전 감독은 장편 데뷔작인 뮤지컬영화 ‘삼거리 극장’에서 이미 극중 극을 매력적으로 활용하는 재능을 보여준 바 있다. 이번 작품에선 한층 업그레이드된 실력을 과시한다.

    ‘러브픽션’은 연애의 ‘기승전결’ 중 어느 순간이라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무릎을 치고 뒤로 넘어갈 만한 장면과 대사로 가득하다. 어느 감독이 “옛날 배우의 오라가 느껴진다”고 평한 하정우와 ‘공블리(공효진+러블리)’라고 불리며 트렌디 스타로 꼽히는 공효진, 두 배우의 연기도 빼어나다.

    마지막으로 로맨스영화로는 드물게 남자의 심리를 비중 있게 묘사한 이 작품이 남성 관객에게 던지는 교훈은 무엇일까. 남자들이여! 복근보다 먼저 상상력을 키워라. 헬스클럽 회원증을 끊기 전에 유머감각을 먼저 단련하라. 그리고 연인에게 더는 유머가 통하지 않거나, 연인의 웃음을 보는 일이 시들해졌다면 당신의 사랑을 의심해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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