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97

2011.07.25

고삐 풀린 기름값 오르고 또 오른다

자원민족주의 노골화로 장기 고유가 국면…‘에너지 안보’ 생존 필수 과제로

  • 임수호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sooho.lim@ssamsung.com

    입력2011-07-25 11: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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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삐 풀린 기름값 오르고 또 오른다
    유가가 심상치 않다. 7월 18일 현재 전국 주유소의 일반 휘발유 ℓ당 평균 판매가격은 1937.92원으로 4월 5일 기록했던 사상 최고치 1971.37원에 바짝 다가섰다. 이대로 가다간 심리적 마지노선이라는 2000원 선을 돌파할 공산이 크다. 국내 휘발유 공급업체들은 최근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감과 달러 약세로 국제유가가 반등하고 있다며,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호소한다. 마침 4월 7일부터 석 달간 한시적으로 실시했던 ℓ당 100원 할인도 종료된 상태다.

    정부의 유가 억제에도 비상이 걸렸다. 안 그래도 소비자 물가가 폭등하는 상황에서 유가마저 상승세를 지속한다면 그 여파가 경제뿐 아니라 정치, 사회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부 소비자단체는 공급가격을 떨어뜨리기 어렵다면 정부가 유류세나 할당관세를 인하해서라도 휘발유 가격을 잡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야당 역시 동조할 태세다.

    인위적 가격 낮추기 오히려 역효과

    그러나 유류세나 관세를 내리면 정부 재정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더욱이 이를 통한 인위적 유가 하락은 휘발유 소비에 대한 도덕적 해이를 불러올 수 있다. 결국 정부는 당분간 휘발유 공급업체들을 압박하는 길밖에는 대안이 없다고 여기는 듯하다. “중동사태의 여파가 가라앉으면서 국제유가가 한동안 떨어지고 환율도 하락했기 때문에 2000원대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라는 최근 정부 관계자의 전망 역시 소비자 불안 심리를 완화하는 한편 휘발유 공급업체들을 간접적으로 압박하려는 발언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물가 관리 차원의 접근이 일시적으로 효과가 있을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현재의 국제유가 상승이 일시적 현상이라면 정부가 인위적인 처방을 통해 유가를 붙잡아두는 게 효과적인 정책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유가 상승은 일시적, 단기적 요인보다 구조적, 장기적 요인 때문이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장기 고유가시대의 서막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정책 초점을 국내 유가 억제에 둔다면 이는 결국 착시효과만 만들어낼 뿐이다. 석유 소비 효율화나 에너지산업 재편 같은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대책에 소홀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설령 정부가 장기 대책을 수립한다고 해도 그것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국민적 동의와 협력을 이끌어내는 데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지금은 정부와 업체, 소비자가 유가 수준을 둘러싸고 힘겨루기를 할 때가 아니다. 장기적인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국가와 사회가 분담해야 할 책임 및 의무를 공론화할 때다.

    사실 국제유가는 2000년대 중반부터 폭등해 2008년 여름 정점을 찍은 후 그해 하반기에 닥친 글로벌 금융위기로 폭락했다. 그러나 불과 1년 후부터 다시 폭등해 올봄에는 2008년 하반기 수준을 회복했다. 중동 민주화사태로 석유 수급이 일시적으로 불안정해진 것도 원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중국과 인도 같은 신흥국 경제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세계 석유를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글로벌 석유시장은 2000년대 초반부터 장기 고유가 국면에 진입했다고 분석하는 이유다.

    다시 말해 장기 고유가 국면의 가장 큰 원인은 신흥국 경제의 빠른 성장으로, 공급 증가가 수요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른바 ‘수급 펀더멘털 차원의 변화’다. 투기나 일시적인 경기 변동, 지정학적 불안정에 따라 단기적으로 유가가 등락할 수는 있지만, 장기 고유가 추세 자체는 앞으로도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석유를 무기로, 기름값을 정치로

    고유가 국면이 단순히 오래 지속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유가가 더 상승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09년 12월 맺은 코펜하겐 기후변화협약에 따라 각국이 화석연료 사용을 대폭 줄이는 이상적인 상황에서 유가는 2035년까지 현재 수준에 해당하는 배럴당 90.0달러(명목기준 162.6달러) 선에서 유지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러나 각국 에너지 정책이 지금의 기조를 유지하거나 제한적으로만 개선할 경우에는 2030년까지 각각 135.0달러(명목기준 243.8달러)와 113.0달러(명목기준 204.1달러) 수준으로 치솟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더욱이 이러한 유가 전망은 공급이 신흥국을 중심으로 급증하는 석유 수요를 가까스로 따라가는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다. 만일 추가 요인 때문에 수요가 증가하거나 공급량 증가에 차질이 빚어지면 유가는 더 높은 수준으로 뛰어오를 공산이 크다. 가장 우려할 부분은 산유국들의 ‘자원민족주의(Resource Nationalism)’ 경향이 하루가 다르게 심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원민족주의란 국유화나 세금 인상을 통해 국가가 석유자원에 대한 개입을 확대하거나 대외관계에서 석유를 정치적 무기로 활용하는 정책을 말한다. 1970년대 두 번의 오일쇼크를 가져온 자원민족주의는 1990년대 들어 이른바 신자유주의시대가 도래하면서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신흥국의 석유 수요가 급증해 고유가가 유지되면서 산유국을 중심으로 부활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유가 문제의 상당 부분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했다.

    문제의 핵심은 이러한 자원민족주의가 석유의 생산, 투자, 소비 과정에서 가격 탄력성을 제약함으로써 고유가 자체를 고착화한다는 데 있다. 먼저 글로벌 석유시장을 놓고 볼 때 자원민족주의는 세계 석유 공급에서 국영 석유기업의 영향력이 커지게 만든다. 국제 석유기업은 유가가 오르면 고유가의 혜택을 향유하려고 증산을 실시하지만, 국영 석유기업은 정부의 장기적, 전략적 계산에 따라 증산 여부를 결정한다. 증산은 결국 유가 하락을 가져오므로 산유국 정부는 고유가 혜택을 장기간 향유하려고 증산을 억제하는 경향이 있다. 글로벌 석유 공급에서 국영 석유기업의 비중이 증가할수록 석유 공급의 가격 탄력성이 감소해 고유가가 장기화하고, 이는 다시 자원민족주의를 부추겨 자원민족주의와 고유가 간 악순환 고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유가가 하락하려면 공급 차원의 방법은 하나뿐이다. 더 많은 석유자원을 개발하고 탐사하는 일에 투자를 늘려 생산 잠재력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나 자원민족주의는 지분 제한, 규제, 세금 인상을 통해 국제 석유기업의 투자를 제약하는 경향이 있다. 자원민족주의가 발호한 국가는 주로 석유 매장량이 풍부하고 생산 단가가 낮기 때문에 국제 석유기업의 투자는 점점 더 생산 단가가 높은 지역으로 몰리게 된다. 그 결과 장기적으로 글로벌 생산 능력이 위축되고, 석유의 평균 생산 단가가 상승하면서 유가에 이중으로 압력을 가한다.

    특히 고유가 국면에 접어든 이후에는 산유국 정부의 재정 수입이 늘어나므로 외국인 투자 의존도가 줄어들고, 이는 다시 외국인 투자를 차별하는 자원민족주의 정책을 강화한다. 국제 석유기업이 투자를 줄이더라도 자국의 국영 석유기업이 투자를 감소분 이상으로 늘리면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산유국 국영 석유기업이 벌어들이는 돈은 석유 생산 능력을 유지, 확대하는 데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정부 시책에도 전용된다. 특히 자원민족주의는 자국 내에서 소득 재분배를 요구하는 평등주의 압력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들 국영 석유기업 이윤의 상당 부분이 사회보장성 프로그램에 쓰인다.

    당연한 말이지만, 공급이 늘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수요가 감소하면 유가는 하락한다. 그러나 자원민족주의가 위세를 떨치는 국가들은 이마저도 여의치 않게 만든다. 고유가로 많은 이윤을 남긴 국영 석유기업의 돈이 사회보장성 프로그램의 확대와 함께 석유보조금으로도 흘러들어가기 때문이다. 자국 내 기업이나 국민에게 값싼 석유, 심지어 원가 이하의 석유를 제공해 소득을 보전해주는 것이다. 산유국의 국내 석유 소비는 고유가에도 오히려 늘어나고, 그에 따라 수출 물량은 줄어들어 다시 유가가 상승하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이는 2020년까지 모든 나라에서 석유보조금제도를 완전히 폐지할 경우 현재 수준을 유지할 때에 비해 전 세계 석유 수요가 5%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만 봐도 알 수 있다.

    20세기 구(舊)자원민족주의는 1951년 이란의 석유자원 국유화에서 시작해 1979년 2차 오일쇼크로 절정에 이르기까지 2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맹위를 떨쳤다. 그 가운데 실제로 세계 경제에 대혼란을 초래한 것은 마지막 6년이었고, 나머지 23년은 폭발적인 분출을 준비하는 숙성 기간이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21세기에 다시 불어닥친 신(新)자원민족주의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이제 10년을 지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흐름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속될 수밖에 없으며, 유가 역시 장기적으로 고공행진을 이어나갈 것이라는 뜻이다. 앞에서 살펴봤듯, 고유가가 자원민족주의를 더욱 격화시키고 자원민족주의는 고유가 국면을 장기화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전 세계가 빠져들 가능성은 충분하다.

    원유 의존도 줄이기 ‘발등의 불’

    한국은 원유 전량을 해외에서 수입하는 국가다. 다른 어느 국가보다 전략적으로 자원민족주의의 발호 우려에 대비해 장기적 관점에서 석유 안보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먼저 석유 안보를 국가 핵심 목표로 정하고, 자원외교를 더욱 강화해 해외 석유 자주개발률을 비약적으로 높이는 한편, 원유 공급원을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 중국이 해외 석유자원 확보에 외교적, 경제적 역량을 아낌없이 투입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는 에너지 소비에서 원유 의존도를 줄이는 일이다. 발전 부문의 경우, 원유보다 저렴하고 석탄보다 이산화탄소 배출이 훨씬 적은 대안을 하루빨리 모색해야 한다. 먼저 원자력 발전의 비중을 높이는 방법이 있지만,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의 국제적 추세나 국내에서의 반대 여론을 감안한다면 쉽지 않은 선택이다. 신재생에너지 역시 경제성과 규모를 모두 갖추려면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결국 남은 대안은 천연가스를 이용하는 발전 설비의 확대뿐이므로, 한계가 분명한 기존의 LNG 수입을 넘어 러시아산 천연가스의 도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자동차 등 수송 부문에서도 하이브리드 내연기관의 비중을 높이는 한편, 전기 내연기관의 상용화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석유 안보와 에너지 안보는 21세기 한국의 지속적 성장이 가능할지를 좌우할 핵심 요인이다. 앞으로 상당 기간 우리를 괴롭힐 고유가와 자원민족주의의 파도 앞에서, 에너지소비 효율성을 높이려는 노력은 환경보호를 위한 선택사항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장기적 비전을 갖고 단호한 정책을 추진해나가는 정부의 구실도 중요하겠지만, 국제경제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거시적 마인드도 필수다. 진부한 표현일 수 있지만 ‘성숙한 시민의식’이야말로 이에 가장 적합한 단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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