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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김용길 기자의 놀라운 편집의 힘

옆집 간판이 살아야 내 가게도 산다

간판 이기주의

  • 김용길 harrison@donga.com

옆집 간판이 살아야 내 가게도 산다

바쁜 현대인. 스스로 좋아서 바쁜 것이 아니라 변화의 쳇바퀴에 갇혀 황망하게 분주하다. 스마트폰은 쉴 새 없이 새로운 뉴스를 알려준다. 디지털 멀티미디어 기기들은 끝없이 신제품으로 변신해 밀려온다. 새 브랜드, 새 디자인, 새 차, 새 아파트, 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친구들이 밀려온다.

정보 업데이트 중독증에 빠진 현대인은 경중완급을 가리는 분별력이 고갈한다. 진지함에 둔감해지고 속도에 치인다. 일상의 사리 분별력도 희미해진다. 이때가 편집력을 발휘해야 할 시점이다. 편집력은 복잡한 것을 단순화하고 무작위로 널려진 것을 재배치해 질서를 부여하는 힘이다. 난삽한 것을 제거하고 우후죽순 난립한 네트워크를 가지런하게 가닥 잡는 과정이 관계 편집이다. 일상은 편집 과정이다. 비즈니스 성패도 편집력이 좌우한다.

옆집 간판이 살아야 내 가게도 산다

2011년 5월 30일 성남시 분당구 미금역 주변 모습.

우리의 간판들은 사람을 쫓아내는 이기주의의 난립인가, 고객을 불러들이는 상생의 미소인가. 출퇴근길 지하철 역 주변 상가 건물을 쳐다보면 머리가 아파온다. 온통 간판으로 도배했다. 벽면을 다 채운 원색 바탕에 고딕 글씨 간판은 주변과 전혀 어울리지 않고 우악스럽다. 한국 자영업의 영세성이 상업적 간판의 난립을 부채질한다. 대한민국 도시 표정은 판에 박은 듯한 네모 건물의 간판 이미지가 결정짓는다. 문화적 콘텐츠를 제거한 한국 간판들은 도시를 몰개성 살풍경으로 몰고 간다. 지겹게 봐온 획일적 간판들은 ‘너보다 나부터 살고 보자’는 네거티브 경쟁의 산물이다. 행인의 눈길을 끌려고 무조건 간판 크기를 키운다. 형형색색 제각각인 글씨는 주변과의 조화는 안중에도 없다. 나 홀로 튀면 그만이다.

간판은 시민이 주목하는 공공 미디어다. 단순한 광고 수단이 아니다. 소비자가 쳐다보는 상업적 소통의 핵심 수단이다. 대중이 오가는 거리는 도시의 혈관이다. 그 거리를 채우는 간판은 도시의 상징이며 얼굴이다. 얼굴이 한 사람의 품격을 대변하듯, 간판은 도시의 품격을 결정한다. 간판들의 미적 배려와 조화가 도시 공동체의 수준을 드러낸다. 난립하는 간판 문화가 한국 도시의 공공 디자인 현주소다.

가짓수가 넘쳐나는 식당 메뉴판에 오히려 손님이 질린다. 조그만 골목식당 메뉴판에 전국 팔도 음식 이름이 다 적혀 있다면 그 주방의 음식 맛을 신뢰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훌륭한 간판 조건은 자신의 정체성만 앙증맞게 드러낸 절제미다. 좋은 간판은 3가지 편집력을 발휘해야 한다. 첫째, 단순화(simplicity)가 생명이다. 추상적이고 복잡하면 간판 자격이 없다. 제공할 구체적 서비스를 명확히 하라. 둘째, 주제 강화(message)가 핵심이다. 당신만이 해낼 수 있는 경쟁력 딱 한 가지만 강조하라. 나머진 부차적인 것으로 돌려라. 셋째, 내용과 형식의 조화(balance)가 관건이다. 내용이 명확해지면 거기에 맞는 그릇을 갖춰야 한다. 세련된 그릇은 음식을 빛나게 한다. 스마트한 디자인은 주변과 궁합이 맞는다.



모차르트의 고향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시는 인구 15만 명의 소도시이지만 연간 900만 명의 관광객이 몰린다. 고풍스러운 1300년 역사의 중세 도시문화를 잘 보전한 덕이다. 1997년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잘츠부르크 시는 전통 도심 풍경을 보존하려고 건축 및 간판 규제를 엄격히 하고 있다. 구도심의 간판은 모두 1층에만 설치할 수 있다. 예술적 가치가 있는 문양 간판만 2층까지 허용한다. 간판 재질과 스타일 역시 전문 수공업자나 장인이 만들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유럽 여행 도중 길가에 즐비한 예술 작품 수준의 간판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이유다.

이제 한국도 간판의 무질서를 정비할 도시문화 매뉴얼을 갖출 시점이다. 서울의 기초 지방자치단체 몇 곳에서 간판 정비의 조례 제정을 서두른다고 한다. 내 집 간판을 절제하고 옆집 간판과 조화롭게 할 때 함께 잘된다. 이웃과 함께 손님으로 북적여야 전체 상가가 번성한다. 매뉴얼이 관통하는 간판 디자인으로 차려입은 거리가 도시 명물이 되고 관광상품이 된다. 도시는 편집의 산물이다.



주간동아 790호 (p63~63)

김용길 harri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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