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99

2009.08.18

말 잘하는 집안이 흥한다

아이 열한 살 무렵, 가족간 대화가 명령과 권위의 수단 되는 경우 많아

  • 김미경 아트스피치 연구원 원장 www.artspeech.co.kr

    입력2009-08-13 14: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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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잘하는 집안이 흥한다
    1년 전, 평소 친하게 지내던 모 기업 김 이사에게 전화가 왔다. 부사장 승진에서 밀려나 25년간 몸담았던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그 심정이 어떨지 짐작돼 군말 없이 약속을 잡았다. 예상대로 그는 몰라보게 수척해 있었다. 그러나 그가 괴로워했던 것은 은퇴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술잔을 내려놓은 그가 허탈하게 말했다.

    “아들 녀석이 나한테 뭐라는 줄 알아요? 아버지인 내가 ‘애로사항’이래요.”

    그에게는 대학생 아들이 하나 있다. 한창 일할 때는 아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살펴볼 겨를조차 없었다. 그러나 은퇴하고 하루 종일 집에만 있다 보니 상황이 달라졌다.

    아들이 늦잠 자는 것부터 밤늦게 들어오는 것, 방에서 컴퓨터 게임만 하는 것 등이 그렇게 답답해 보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다 큰 아들에게 잔소리를 할 수도 없어 친근하게 말을 붙여봤지만 시큰둥한 대답만 돌아왔다. 결국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나 애로사항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솔직히 얘기를 좀 해보려무나.”

    그러자 아들은 주저 없이 아버지를 ‘애로사항’으로 꼽았다는 것이다. 침울한 표정의 그가 안쓰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아들의 처지도 이해가 갔다.

    수많은 아버지, 아들과 ‘어색한 동거’

    그는 한국의 수많은 아버지가 그러하듯 20여 년간을 유령으로 살았다. 언제 들어오고 나가는지 알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런 아버지가 집에서 하는 말은 정해져 있다. “애들은?” “별일 없고?” “새벽에 깨워”가 전부다. 특히 자식들에게 하는 말 중 가장 안 좋은 말이 “별일 없고?”다. 집에서 가족끼리 얼마나 소통이 안 되면 그동안 별일 없는지를 묻겠나. 그런데 그렇게 ‘별일’ 없는 줄 알고 살아온 아버지가 갑자기 아들에게서 생소한 얘기를 들으니 당황할 수밖에.

    이는 비단 김 이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아버지와 아들이 이렇게 ‘어색한 동거’를 한다. 결혼하고 분가하면 더 심해진다. 아들이 전화했을 때 아버지가 받으면 서로 화들짝 놀라는 집도 많다. “(아버지도) 별일 없으시죠?”라고 물으면 그나마 낫다. 다짜고짜 “엄마 없어요?”라고 묻는 아들도 많다. 아버지는 괜히 전화받은 사람이 되는 셈이다.

    반면 분위기 좋고 잘되는 집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가족 간에 말이 잘 통한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가 이심전심으로 통하고 아이들도 부모 마음을 잘 안다. 또한 아이들은 말을 통해 할아버지, 부모 세대의 경험과 교훈을 자신의 정신적 유산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많은 가정에서 가훈은 액자에 걸린 장식품일 뿐이다. 가족 간 기본적인 대화조차 원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가장 큰 원인은 말의 ‘권력화’에 있다. 말을 소통이 아닌 명령과 권위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숙제 했어, 안 했어?”

    “셋 셀 때까지 말해!”

    마치 범죄자 취급하듯 다루는 아버지 앞에서 아이들은 말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채 부모가 원하는 답만 말하게 된다. 입이 막히면 머리와 가슴이 답답해진다. 나중에는 차라리 벽을 보고 얘기할지언정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 자체를 꺼리게 된다.

    말 잘하는 집안이 흥한다

    밥상머리 대화가 유지되기만 해도 가족 간 ‘말하기’는 상당 부분 성공한 셈이다. 혹시 아이에게 “별일 없냐?”고 묻는 것이 유일한 대화가 아닌지 반성해볼 일이다. 사진은 KBS ‘개그콘서트’의 ‘대화가 필요해’.

    이는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강연하러 많은 기업을 다녀보면 다들 특유의 조직문화가 있다. 어떤 회사에선 ‘어두운 뒷골목’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런 곳은 대부분 팀 토론이 원활하지 않고 상사가 권위적이다. 브레인스토밍 하라고 해서 곧이곧대로 말했다가는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폭풍우를 만날 수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입 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상사 앞에서 얼어붙은 입은 밤에 술로 녹인다. 서로 뒷담화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유일한 소통의 통로는 휴대전화와 인터넷이다. 말의 권력구조 안에서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는 순간, 각자 방에서 휴대전화 문자로 부모 뒷담화를 하거나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들어가 댓글을 단다. 우리나라에서 인터넷이 이처럼 발달한 까닭은 이것이 유일한 탈권위적 소통의 통로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들은 직장인이 돼도 상사를 설득하지 못한다. 집에서 아버지 세대를 설득해본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아이들이 창의적으로 자랄 리도 없다. 그러나 자식을 벙어리로 만든 부모들은 “다 큰 녀석이 자기 의사표현도 제대로 못하느냐”며 외려 화를 낸다.

    말의 권력화가 오래 지속되다 보면 어느 순간, 소통이 아예 단절되기도 한다. 특히 새벽에 나왔다 새벽에 들어가는 유령 같은 삶을 사는 우리나라의 아버지들은 자식들과 대화할 기회조차 갖기 힘들다. 그러나 문제는 아이들과 대화하지 않으면 자식들이 아버지가 회사에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가족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이기적으로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더니 결국 승진도 못한 무능력한 아버지’로 찍히는 경우도 많다. 아버지가 추구했던 가치와 삶을 대화로써 정신적 유산으로 남겨야 자식들도 아버지처럼 살겠다는 자존감을 형성할 수 있다. 대화가 없는 집은 아버지가 알려준 바 없으니 ‘제로 세팅’돼서 인생을 시작한다. 아버지가 열심히 살았다고 해서 그것이 자연스레 DNA로 전수되리라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대화를 통해 자연스레 가족문화로 만들어야 한다.

    대화 통해 가족문화 만들어야 ‘정신 유산’

    이제라도 가족과 대화의 물꼬를 트고 싶으면 말의 권력구조를 과감히 깨버려야 한다. 여기서 N분의 1 법칙을 기억하자. 전체 대화시간을 사람 수대로 나누는 것이다. 4인 가족이 1시간 동안 대화한다면 각자 15분씩 말하는 것이다. 만약 부모가 50분 말하고 자녀가 10분 얘기한다면 말이 권력화했다는 증거다. 각자 똑같이 15분씩 얘기해야 한다.

    산술적으로 똑같이 나눌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일단 산술적인 균형을 맞출 수 있는지 실험해보자. 이미 자녀들과 대화가 끊겼다면 그 시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열한 살부터 대화가 끊겼다면-많은 가정이 아이들이 열한 살쯤 되면 대화가 끊어진다- 초급단계로 내려가야 한다. 초급단계에서 멈춘 대화는 결코 한 번에 고급 대화로 업그레이드되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김 이사는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일 때 대화가 끊겼다. 그 시절 무슨 얘기를 주로 했나 돌이켜봤더니 같이 수영장에 가고 운동을 하면서 나눴던 대화들이 떠오르더란다. 결국 그는 아들과 함께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야, 이 녀석아 그것도 공이라고 던지냐?”

    “아버지, 가만히 서 있지 말고 공 좀 따라가세요.”

    그는 초등학생 아들과 나눌 법한 ‘기초적인’ 대화를 1년 가까이 한 뒤에야 아들의 여자친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제라도 자식들과 대화하고 싶다면, 자식들을 말 잘하는 인간으로 키우고 싶다면, 말의 권력구조부터 깨고 아이들과 눈높이 대화를 시작하자. 그때 나눈 말들은 자연스레 아이들의 정신적 유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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