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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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암 선생 명예회복을 소망합니다”

민족의 선각자 50주기 재평가 활발 … 사법부의 진실 규명이 사회통합에 도움

  • 남시욱 광화문 문화포럼 회장·전 문화일보 사장

    입력2009-08-13 09: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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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봉암 선생 명예회복을 소망합니다”

    7월31일 서울 중랑구 망우동 공원묘원에서 열린 죽산 조봉암 선생의 50주기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고인의 영정 앞에 제를 올리고 있다.

    1959년 7월31일 오전 11시 진보당 당수 죽산 조봉암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기사가 이튿날 조간신문에 일제히 사회면 톱으로 보도됐다. 조봉암의 형 집행은 그해 2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되자 재심을 청구했으나 이것이 기각된 바로 그 다음 날 전격적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제4대 민의원 선거를 앞두고 진보당을 말살하기 위해 권력이 꾸민 정치적 음모에 그가 희생양이 됐다는 소문이 일반 국민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참이었다. 이 때문에 예상보다 빨리 집행된 그의 사형 소식은 충격적인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평화통일 주창 … 전격적인 사형 집행

    당시 그의 구명을 위해 노력한 유력인사가 많았다. 그중 한 사람인 장택상 전 국무총리는 법무장관을 찾아가 형 집행을 이듬해 3월의 대통령선거 이후로 해달라고 부탁해서 동의를 받은 터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만약 형 집행이 9개월만 연기됐더라면 4· 19혁명 덕으로 그에 대한 재심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다.

    일부 신문에서는 조봉암이 형장에서 집행관으로부터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고 “할 말은 없다. 내 죄는 정치 활동밖에는 없는데…”라고 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일부 신문은 “별로 할 말은 없고, 다만 이 세상에서 고루 잘 살려고 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죄짓고 가니 미안할 뿐이며, 남은 가족은 자신들이 잘 알아서 살 터이니…”라고 했다고 전했다. 내용이 전혀 다른 것이어서 혼란스럽다. 그의 사형 집행에 기자의 현장취재가 허락되지 않았고 유언 내용은 당국자가 언론에 전해준 것이어서 어느 쪽이 맞는지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다.



    “조봉암 선생 명예회복을 소망합니다”

    1958년 1월31일 간첩 혐의로 체포된 조봉암 선생(오른쪽에서 두 번째)은 2, 3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조봉암이 사형을 당한 것은 간첩 혐의 때문이다. 1심에서 그의 간첩 혐의가 무죄로 판결나자 ‘용공판사 물러나라’는 우익단체의 시위가 일어났다. 그 뒤 2심과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이 나왔다. 일반 국민은 의혹의 눈으로 이 재판을 바라보았다.

    당시 젊은 기자였던 내가 먼저 충격을 받은 것은 조봉암이 사형당한 그날 형무소 앞마당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기자가 다가가자 “당신네들은 언론에 있으면서 무엇을 했단 말이요? 감투가 아무리 좋아도 죄 없는 생사람의 생명마저 빼앗을 수 있소?”라고 언론을 원망했다는 보도였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자유당 정권 치하의 법원을 출입하면서 직접 들은 이야기들, 관련자들의 회고 및 자유당 정권 말기의 정치적 분위기를 종합해보면서 그의 간첩혐의가 조작됐다는 의심을 점점 깊이 하게 됐다. 검찰이나 사법부의 권위를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시 권력의 횡포가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이듬해인 1960년 마산에서 4·19혁명의 불이 붙자 자유당 정권의 검찰, 경찰 및 특무대가 합동해서 부정선거 규탄시위 배후에 북한의 공작이 있는 것으로 조작하려다가 중단한 일도 있을 정도였다.

    1956년 조봉암의 진보당이 정식 출범하면서 정치적으로 문제가 됐던 것은 당 강령으로 채택한 평화통일 정책이다. 이는 당시 정부의 방침인 북진통일 노선과 정면으로 배치됐다. 6·25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동족에게 총을 겨눈 적과 한자리에 앉아 통일 문제를 협의하자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으로서는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진보당 창당 1년 반 만에 조봉암은 북한 공작원 양명산으로부터 돈을 받아 진보당의 당세를 확장하는 데 쓰고 그 대가로 간첩 행위를 했다는 기소 사실이 인정돼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 당시인 2007년 9월 과거사위원회는 48년 만에 그가 정치 탄압 때문에 억울하게 사형을 당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국가의 사과와 아울러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하도록 권고했다.

    과거사위원회는 민간인인 양명산을 특무대가 불법감금하고 북한의 공작금을 전달했다는 허위진술을 받아냈다고 밝혔다. 지난 7월30일에는 그의 50주기를 맞아 여야 의원들을 포함한 정계와 학계의 많은 인사가 그에 대한 명예회복 청원서에 서명했다. 또한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주최로 열린 추도식에도 여야 구분 없이 많은 정치인이 참여해 ‘재평가’ 작업을 촉구했다.

    한국사회 통합의 역할 큰 기대

    해방 직후 박헌영의 조선공산당과 결별한 조봉암은 좌우 대립이 극심했을 때 민주주의독립전선이라는 온건좌파 통일전선조직을 만들어 좌우합작 운동을 벌였다. 그는 대한민국 건국 때 적극 참여해 농림장관으로서 농지개혁을 주도하고 후에 국회부의장에도 당선됐다.

    그는 그 후 복지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진보당을 만들어 온건한 노선을 걸었다. 현재의 한국 좌파세력들은 그로부터 배워야 할 점이 많다. 조봉암의 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나 역시 회의적 시각으로 보는 사람 중 하나지만, 결국 대법원이 재심을 통해 흑백을 가리는 수밖에 없다. 과거사위원회가 그에 대해 무죄 결정을 내렸을 때도 그랬지만 이번 그의 50주기를 맞아 벌어지는 명예회복 청원운동에 대해서도 일부 보수인사는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다.

    그만큼 사법당국의 책임은 커진 셈인데, 엄정한 재심을 통해 사실을 밝혀주기를 바란다. 북한당국은 조봉암 사후 그가 마치 그들에게 충성한 듯 애국지사 묘역에 그의 허묘를 조성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남한 내부의 분열을 노린 것이라 보는 견해가 많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진실이다. 사법부는 진실을 가려내 국민의 궁금증을 푸는 것으로 현재 한국사회 통합에 큰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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