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4

2009.02.24

性문화를 바꾼 놀라운 ‘그것’들

이들이 있어 인류의 밤은 황홀했다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9-02-19 10: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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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性문화를 바꾼 놀라운 ‘그것’들
    고무 콘돔 1860

    콘돔의 역사는 성의 역사만큼이나 유장하다. 1만5000년 전에 그려진 이집트의 동굴 벽화에는 콘돔을 끼고 있는 남성이 등장한다. 이 남성이 사용한 콘돔의 원료는 동물 창자로 추측된다. 인류는 고무 가공 기술이 혁신적으로 발전할 때까지 ‘창자 콘돔’을 썼다. 당시 콘돔은 12시간 걸려야 한 개를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들기 힘들고 가격도 비쌌기 때문에 하나를 구입하면 수없이 반복 사용해야 하는 ‘귀한’ 섹스 기구였다. 19세기 후반 고무 콘돔이 대량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마침내 임신이나 성병에 대한 공포 없이 마음껏 성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1860년 무렵 영국에서 콘돔 한 개의 가격은 10펜스에서 1페니대로 떨어졌다. 콘돔이 대중적인 피임기구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콘돔 산업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 1위다. 현재 콘돔의 국제 입찰시장 점유율 1위는 국내 업체 ‘유니더스’가 차지하고 있다.

    바이브레이터 1899

    “자연은 생명과 함께 떨리고 진동하는 것입니다. 가장 완벽한 여성은 그 피가 자연적 존재의 법칙에 맞춰 떨리는 여성입니다.”

    1899년 미국에서 출시된 최초의 가정용 바이브레이터의 광고 문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민한 즐거움과 젊음의 기쁨이 당신 안에서 고동칠 것입니다”라는 좀더 구체적인 광고도 나왔다. 바이브레이터의 발명과 대중화는 여성의 성생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여성도 성의 주체가 돼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기 시작했으며, 성의학의 발전과 더불어 바이브레이터도 혁신을 거듭했다. 최근에는 클리토리스와 질을 동시에 자극하도록 진동 모터가 두 개 달린 ‘토끼’ 형태의 제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



    살바르산(‘606호’) 1909

    1909년 독일의 세균학자 파울 에를리히가 개발한 매독치료제. 606번의 실험 끝에 만들어졌다고 해서 ‘606호’라는 별칭이 붙었다. 성관계를 통해 감염되는 매독은 1493년 콜럼버스 일행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옮아옴으로써 유럽 역사에 등장했다. 이후 500여 년간 유럽인들은 온몸에 진물이 흐르고 반점이 생기다 결국 사망하는 이 병에 걸려 100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보들레르가 “우리의 뼛속에 매독이 살고 있는 것처럼 혈관 속에는 공화주의 정신이 숨쉬고 있다”고 하고, 플로베르 역시 “행복이란 마치 매독과도 같다. 순식간에 감염돼 온몸을 부숴버린다”고 한 것은 매독이 19세기 유럽 사회에 끼친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 당시 의사들은 수은으로 매독을 치료했는데, 이는 매독균뿐 아니라 환자까지 죽일 수 있는 위험한 치료법이었다. 살바르산은 인체의 다른 세포에는 해를 입히지 않고 매독균만 선별적으로 파괴해 인류에게 ‘복음’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이제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 없이-최소한 에이즈(AIDS)가 나타나기 전까지는-마음껏 성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됐다!

    性문화를 바꾼 놀라운 ‘그것’들

    2007년 ‘세계 에이즈의 날’을 하루 앞두고 고려대 앞에서 열린 에이즈 확산 저지 캠페인.

    산아제한 평론 1914

    미국 간호사 마거릿 생어는 11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나 16세 때 어머니를 잃었다. 어머니가 40대에 세상을 떠난 것이 과도한 출산과 가난 때문임을 깨달은 그는 “여성이 주도적으로 임신과 출산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선언한 최초의 여성이 됐다. 그러나 생어가 1914년 여성이 실천할 수 있는 피임법을 담아 펴낸 ‘산아제한 평론’은 풍기 문란하다는 이유로 독자들에게 우송하는 것조차 금지당했다. 1916년에는 미국 브루클린에 ‘산아제한 진료소’를 열고 피임교육을 하다 아흐레 만에 공안질서방해죄로 체포되기도 했다. 번번이 좌절에 부딪혔지만, 그의 활동은 제한적이나마 여성에게 피임할 권리를 주는 시발점이 된 동시에 피임약 개발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킨제이 보고서 1948

    “남성 세 명 가운데 하나는 동성애 경험을 고백했다. 유부남의 30∼45%는 아내 몰래 바람을 피웠고, 남성의 90%는 자위행위를 했다.”

    1948년 미국의 성의학자 앨프리드 킨제이는 10년간 9000명의 남성을 상대로 성행위에 대해 인터뷰한 결과를 분석해 ‘인간 남성의 성적 행동’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에는 “농촌 지역의 대학생 나이대 남성 가운데 26~28%가 동물을 상대로 오르가슴까지 다다른 경험이 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일체의 금기 없이 인간의 성생활을 ‘까발린’ 그의 연구 논문은 세상을 뒤집어놓았다. 킨제이는 1953년 9000명의 여성을 조사한 결과를 모아 ‘인간 여성의 성적 행동’ 보고서도 내놓았다. 그의 파격적인 연구 이후 사람들은 자신의 성생활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됐고, 성의학은 점잖은 이들도 입에 올릴 수 있는 ‘과학’의 반열에 올라섰다.

    경구피임약 1951

    화학자 칼 제라시는 1951년 세계 최초로 먹는 피임약을 개발했다. 이때부터 여성의 성은 임신, 출산이라는 ‘성스러운’ 오라를 벗고 쾌락의 세계로 내려올 수 있었다. 1960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먹는 피임약 ‘에노비드’를 공식 승인했고, 이듬해 독일 쉐링사는 ‘아나보라’라는 유럽 최초의 경구피임약을 발매했다. 이 약들은 1960년대 후반 세계적으로 분출된 성해방 및 여성해방 물결의 기폭제가 됐다.

    플레이보이 1953

    1953년 12월, 27세의 청년 휴 헤프너는 미국 시카고에서 당대 섹스 심벌 마릴린 먼로의 누드 사진을 표지에 실은 잡지를 창간했다. 600달러를 들여 펴낸 44쪽 분량의 잡지는 5만4175부가 팔려나가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세계 성인잡지 시장을 석권하고, 방송과 비디오 사업까지 장악해 20세기 성문화의 아이콘이 된 거대 미디어 그룹 ‘플레이보이’의 탄생 스토리다. ‘플레이보이’는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죄악시하던 시기에 탄생해 성적 재미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추구해야 할 권리임을 선언했다. 휴 헤프너는 여든 살이 넘은 지금도 미국 베벌리힐스 최고급 주택가에서 여러 명의 20대 미녀들과 함께 살며 변치 않는 정열을 과시하고 있다.

    마스터스·존슨 보고서 1960

    인간은 어떻게 오르가슴에 이르는가. 성적으로 만족했을 때 여성의 몸은 어떻게 변하는가. 이에 대한 최초의 공개적, 과학적 연구는 미국에서 이뤄졌다. 산부인과 의사 윌리엄 마스터스와 심리학자 버지니아 존슨 부부는 1960년대 실험실에서 276쌍의 성관계 장면을 관찰, 연구했고 66년 이에 대한 보고서 ‘인간의 성반응’을 펴냈다. 피험자는 몸에 심박수와 혈압을 측정하는 기계를 연결한 채 성관계를 가졌으며, 오르가슴에 도달한 여성의 성기 모습은 꼼꼼히 촬영됐다. 마스터스와 존슨은 성관계 동안 여성의 몸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피스톤 운동을 하는 ‘페니스 카메라’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 카메라가 실제 여성과 수백 차례 인공 성교를 하면서 촬영한 자료는 여성 몸의 비밀을 푸는 데 큰 구실을 했다. 카메라는 피스톤 운동을 하면서 질 내의 모세관 벽에서 스며나오는 혈장을 촬영했는데, 이에 따라 인류는 비로소 성관계 때 여성의 질이 축축하게 젖는 이유를 알게 됐다. 20세기 후반이 돼서야!

    性문화를 바꾼 놀라운 ‘그것’들

    포르노 영화의 역사를 새로 쓴 영화 ‘목구멍 깊숙이’의 포스터와 스틸.

    목구멍 깊숙이(Deep Throat) 1972

    1972년 미국에서 개봉된 뒤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포르노. 삽입 성교로는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하던 한 여성이 자신의 성감대가 ‘목구멍 깊숙한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닥치는 대로 오럴섹스를 한다는 내용이다. 포르노그래피 대중화의 신호탄이 된 이 작품은 극장 입장료가 5달러에 불과하던 시절 6억 달러의 흥행 수입을 올렸다. 동시에 성해방과 윤리, 표현의 자유와 한계 등에 대한 거센 논란도 일으켰다. 화려한 흥행 성적을 뒤로한 채 관련자들이 줄줄이 법정에 섰는데, 제작진과 배급업자 등 117명이 기소된 끝에 남자 주연배우 해리 림스가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性문화를 바꾼 놀라운 ‘그것’들

    여성의 성 고민을 유쾌하게 풀어낸 영화 ‘섹스 앤 더 시티’의 한 장면(왼쪽).SK케미칼이 개발한 ‘토종’ 발기부전치료제 엠빅스.

    에이즈 1981

    198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때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질병이 발견됐다. 감염자는 폐렴 증세를 보였고, 면역 기능이 크게 떨어지다 결국 사망했다. 당시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는 모두 남성 동성애자였다. 그래서 이 병은 초기에 ‘게이병’이라고 불렸다. 후천성면역결핍증 에이즈(AIDS)다. 성관계나 수혈, 주사기 공동 사용 등을 통해 감염되는 AIDS는 오래지 않아 이성애자, 여성, 어린이에게까지 광범위하게 퍼져나갔지만 ‘도덕적으로 타락한 이들에게 신이 내린 징벌’이라는 편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성문화 전반에 급격한 반혁명과 보수화 바람이 일었고, 광범위한 ‘순결 운동’이 벌어졌다. 대중의 ‘안전한 섹스’에 대한 열망과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이 맞물리면서 에이즈는 사이버 섹스 확산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RU486 1988

    1988년 프랑스에서 판매되기 시작한 먹는 임신 중절약. 1980년 개발됐지만 낙태반대론자들의 반발에 밀려 8년간 판매가 보류됐고, 미국에서는 200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판매가 허용됐다. 수정란이 자궁 내벽에 착상하는 것을 방해하는 방법으로 낙태를 유도한다. 의사의 수술 없이도 임신 초기의 낙태가 가능하지만, 생명 경시 풍조를 유발한다는 비판 여론도 계속되고 있다.

    사이먼 리베이 보고서 1991

    영국의 신경과학자 사이먼 리베이는 1991년 남성 동성애자와 남성 이성애자의 뇌 구조에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성욕을 관장하는 시상하부의 간핵 4개 가운데 세 번째 것의 크기가 현저히 다르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 리베이의 연구는 동물의 뇌에서도 입증됐다. 2002년 학계에 보고된 자료에 따르면, 암컷과 교미하지 않고 수컷과 짝짓기하려는 숫양의 시상하부에서 리베이의 연구 결과와 유사한 구조가 보인다. 미국 정신의학협회는 1973년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제외했지만, 그 후로도 ‘동성애=변태’라는 시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과학 연구를 통해 동성애를 덮고 있던 편견이 벗겨지면서 항문성교나 오럴섹스 등 비전형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성행위도 도착증, 변태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양한 성관계의 양태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 1998

    잘나가는 뉴요커 언니 네 명이 브런치 테이블에 둘러앉아 수다를 떠는 내용의 시트콤. 원나잇스탠드, 바이브레이터, 갖가지 체위, 낙태, 불륜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룸으로써 ‘여성도 남성처럼 (감정 없는) 섹스를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주인공 캐리와 친구들이 카페 창밖으로 지나가는 남성을 보며 점수 매기기 게임을 하고, 성관계 파트너를 이름 대신 ‘미스터 빅(Mr. Big)’따위의 별명으로 대상화할 때 성을 둘러싼 남녀의 권력관계는 역전된다. 1998년 첫 방송 이후 6년간 이어지며 큰 인기를 모았고, 지난해에는 영화도 개봉했다.

    비아그라 1998

    1998년 3월27일 다이아몬드 모양의 푸른색 알약이 미국에서 시판됐다. ‘신의 선물’이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최초의 경구용 발기부전치료제 비아그라다. 비아그라가 탄생하기 전까지 ‘발기부전’은 입에 담기 민망한 금기어였다. 그러나 지금은 얼굴 붉히지 않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발기부전과 비아그라에 대해 말한다. 건강 증진이나 수명 연장이 아니라 오직 ‘멋지고 강한 섹스’만을 위해 약을 먹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일이 됐다. 비아그라의 성공 이후 관련 분야 연구가 줄을 이었고 현재 국내에서는 비아그라 외에도 엠빅스(SK케미칼), 자이데나(동아제약), 시알리스(릴리), 야일라(종근당), 레비트라(바이엘) 등의 발기부전치료제가 판매되고 있다.

    ○ 참고 도서 : ‘BONK’(메리 로취/ 파라북스) ‘매독’(데버러 헤이든/ 길산) ‘버자이너 문화사’(옐토 드렌스/ 동아시아) ‘20세기 성의 역사’(앵거스 맥래런/ 현실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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