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4

2009.02.24

性은 진화한다

진화심리학으로 본 인간의 성과 사랑

  • 박만준 동의대 교수·철학윤리문화학 mjpark@deu.ac.kr

    입력2009-02-19 10: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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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性은 진화한다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 ‘검은 붓꽃’. 작가는 꽃을 촬영했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성적 욕망을 가진 보통의 인간들은 에로틱하다고 느낀다.

    사람들은 흔히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다. 평생 변함없이 사랑하겠노라는 맹세다. 그리고 그것을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약속으로 칭송한다. 사랑의 갈등을 경험하기 전에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진실한 상대를 찾기만 한다면 축복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 삶에서 사랑과 직결되는 문화적 의식(儀式)이 가장 폭넓게 포진해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시, 소설, 음악, 텔레비전 드라마 등의 주제를 보면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이렇게 사랑을 약속한 사람들 가운데 과연 몇 명이나 정말로 행복하게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결혼한 부부의 절반 이상이 갈등을 겪거나 끝내 그 갈등을 이겨내지 못하고 헤어진다.

    어디 그뿐인가. 결혼한 부부 가운데 외도를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진화심리학자인 미국 텍사스대 데이비드 버스 교수의 통계에 따르면 적게는 30%, 많게는 결혼한 부부의 절반 이상이 외도를 경험한다고 한다. 왜 사랑의 약속은 아름답게 지켜지지 못하는 것일까. 진화심리학을 통해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보자.

    섹시함 과시 못하는 동물은 멸종

    동물의 성기와 식물의 꽃은 그들 삶의 여정에서 나타나는 불가피한 결실이다. 그런데 비글호를 타고 여행을 떠났던 찰스 다윈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동물이나 식물이 지닌 필요 이상의 화려한 장식들을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물의 일차적 목적은 생존이다. 그렇다면 눈부신 공작의 깃털은 이 생물의 생존에 무슨 이득이 될까. 깃털이 화려하고 클수록 적에게 쉽게 자신을 드러내 표적이 될 것이 분명하고, 또 먹이사냥에도 유리할 것이 없다. 이득은커녕 오히려 위험 요소가 아닌가. 그렇다면 거기에는 생존의 문제와는 다른 차원의 이유가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랑과 성이다. 그래서 다윈은 생존을 위한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과 구분해 이를 ‘성선택(sexual selection)’이라 불렀다.

    性은 진화한다

    상아 재질 장식물에 그려진 에로틱한 커플의 모습. 인도 라자스탄주에서 만들어진 예술 작품이다.

    물론 새들의 외모만 진화하는 것은 아니다. 새의 행동이나 그 행동의 결과까지도 유전한다. 그래서 리처드 도킨스는 이를 ‘확장된 표현형’이라 부른다. 예를 들면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에 사는 황금정자새는 신부를 맞을 아름다운 집을 짓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한다. 자신의 키가 9인치(22.85cm) 정도밖에 안 되는데도 9피트(약 274cm) 높이의 집을 짓는 것이다. 그 이유가 뭘까. 정자새의 집 모양은 각기 다르지만 목적은 같다. 바로 ‘사랑’이다. 수컷들은 혼자 힘으로 집을 짓고 그 아름다운 둥지로 암컷을 유혹해 사랑을 나눈다. 멋진 집을 지은 수컷은 하루에 10마리의 암컷과 짝짓기를 하기도 한다. 암컷들은 한결같이 튼튼하고 아름다운 집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생존하기 위해 진화할 뿐 아니라 성적 선택을 위해 진화한다. 밋밋하고 멋없는 깃털을 가진 공작 수컷이 진화의 먼지 속으로 사라졌듯 몸매나 그 크기, 그리고 상대를 유혹하고 섹시함을 과시하는 다양한 행동을 발전시키지 못한 종들은 사라진다. 이는 결국 살아남은 우리는 진화의 역사를 통해 서로가 선호하는 인간적인 매력과 아름다움을 갖췄다는 말이 된다. 우리가 상대의 성을 인식하고 사랑을 나누며 성행위를 하는 것은 모두 진화적으로 확립된 결과다.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를 통해 우리 몸은 영양 공급을 위한 나름의 메커니즘을 만들었다. 이러한 생존 전략과 더불어 성 전략도 함께 발달했다. 성과 사랑은 하나의 전략이며, 우리 몸은 이러한 전략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다시 말해 이상적인 배우자를 찾아내거나 유혹하는 등의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도록 발달해온 것이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우리는 성과 사랑의 전략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해결한 멋진 조상들의 후손이다. 그렇다면 부부 또는 커플의 성만족도 역시 ‘진화’하는 것일까.

    신혼부부들에 대한 한 연구를 보면, 신혼 때는 남성의 14%가량이 아내가 성관계를 거부한다고 불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 4년을 넘기면서는 남성의 약 50%가 볼멘소리를 낸다. 이유가 무엇일까. 상대에 대한 성적 유인의 감소, 용모나 육체적 매력의 상실, 출산, 애정 감정의 감소가 그 원인일 수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성적 부조화다. 한마디로 성적 조화, 즉 욕망의 조화가 성만족도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인 것이다.

    나와 다른 욕망 인정해야 만족도 높아져

    남자와 여자는 욕망하는 바가 다르다. 성적 욕망이 다르면 성적 전략도 달라져야 한다. 이를 정확히 인식하고 이해하는 것이 성적 조화를 위한 관건이 된다. 입으로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을 약속한다 해도 상대가 나와 다른 욕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해하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성의 결실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상대의 몸과 마음 곳곳에 나와 다른 욕망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능동적으로 수용하느냐에 따라 성만족도가 결정된다. 남자는 여자(특히 여자의 몸)를 알고 여자는 남자(특히 남자의 몸)를 알아야 성만족도가 올라간다는 뜻이다. 서로의 몸은 성과 사랑을 배우기 위한 최상의 교과서다. 여자의 욕망을 모르는 남자와 남자의 욕망을 모르는 여자가 어찌 성적 만족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한국 사회에서 경제 및 문명의 발달과 성만족도가 반비례 곡선을 그리고 있다면 바로 이런 삶의 조화, 자연스러운 성적 진화를 외면하기 때문일 것이다. 형식적으로나 표면적으로는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지만, 서로의 차이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그 차이를 나의 욕망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몸은 ‘선천적’으로 서로에게 매력을 주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구성원들의 성만족도가 낮다면, 상대방의 욕망을 이해하고 그것을 나의 욕망으로 승화시키는 ‘후천적’ 학습이 부족한 사회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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