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2

2009.02.10

쉿! 작품 소장자는 며느리도 몰라

고가 미술품 은밀한 뇌물로 둔갑 … ‘큰손’ 구매자 배려, 거래 내역 삭제도

  •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입력2009-02-02 18: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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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전임 전군표 청장에게 수천만원대 그림을 상납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작가와 원소유자에게서 재벌과 고위공직자 등의 수중으로 넘어가는 고가 미술품의 이동경로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좀처럼 감지되지 않는 수상한 거래의 단편들. 도대체 어떠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소위 미술계 ‘큰손’들의 고가 미술품 매입 경로를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없지만 화랑, 미술품 경매업체 등 관계자들의 전언에 따르면, 재벌이나 고위공직자들은 주로 개인 화랑이나 친분이 있는 미술관 관계자 등을 통해 작품을 사들인다고 한다.

    직접 한 화랑을 지정해 그곳에서 유통되는 미술품만 대거 매입하기도 하고, 화랑이나 관계자를 앞에 내세워 국내외 경매시장이나 다른 여러 화랑 등에서 작품을 사들이는 식이다.

    전자의 경우, 구매자가 좋아하는 특정 유명 작가의 미술품만을 컬렉션하려는 목적일 때가 많다. 서울의 한 개인 화랑 관계자 A씨는 “한국의 대표적 근대화가인 K씨의 작품만 취급하는 모 화랑이 있다. 이 화랑에 K씨의 작품이 들어올 때마다 국내 굴지의 그룹 회장이 그림을 매입한다”며 “대신 화랑 측은 자신들의 판매 목록이나 거래명세서에서 회장 측이 사들인 그림들은 삭제해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배려해준다”고 귀띔했다. A씨 말대로라면, 결국 그림의 최종 이동경로는 완전히 증발한 셈이 된다.



    후자의 방법은 다양한 미술품을 확보하면서도 구입 자금이나 신원 노출을 최소화할 수 있어 큰손들에게 선호된다. 이는 2007년 삼성 전 법무팀장인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가(家)의 해외 미술품 구입 의혹을 폭로하면서 세간에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있다.

    공직자 재산 공개 때 고지 거부

    이후 특검 수사에서 차명계좌 구입 등 추가 사실관계 규명에 어려움을 겪어 그림 매입 경로 전체를 밝히는 것이 흐지부지됐지만, 삼성 건으로 재벌가나 공직자 등이 제3자를 통해 활발하게 미술품 구매를 해오고 있다는 부분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술계 관계자들 역시 이 점에 대해선 공공연한 관행이라고 동의한다. 이와 관련해 모 미술관 관계자 B씨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국내 한 대기업 창업주의 전 비서였던 모 화랑 관계자 부인이 직접 그 그룹의 그림 심부름을 했다는 것도 미술계 내에선 꽤 알려진 사실”이라며 유사한 다른 사례를 털어놨다.

    ‘주간동아’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지난 2007년 학력을 위조하고 미술관 공금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돼 실형을 선고받은 신정아 씨도 금호, 성곡미술관에서 큐레이터 등으로 근무하면서 대기업 등으로부터 여러 번 소장 작품 구매를 의뢰받고, H씨 등 친분이 있는 유명 국내 작가들을 선정해 그들의 고가 작품을 추천했다. 이들 작품 중엔 억대가 넘는 작품도 상당수 포함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림을 소유한 공직자들은 그림을 부모나 자식 명의로 해두고, 재산신고 때 본인과 부인 재산 외 나머지 가족에 대해선 고지 거부 처리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금 부담 없이 증여와 상속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 구매도 많다.

    미술품 경매업체 관계자 C씨는 “가끔 이름만 들으면 우리가 움찔할 만한 위치의 공직자들이나 가족이 값비싼 미술품을 사갔다고 업계에서 소문이 들리긴 하지만, 이후 (작품이) 공개된 적이 거의 없어 확인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일부 기업인이나 공무원들 중에는 친분이 있는 작가의 작품이 전시회 등에서 팔릴 수 있게 도움을 주고 ‘감사의 표시’로 그림을 받는 사례도 적지 않다고 한다. 모 옥션 관계자는 “환금성이 높고 재산 가치가 커 사례 조로 그림을 주는 경우도 빈번하다”며 “작가가 선물로 그림을 준 경우라면, 소장자가 물건을 팔려고 하지 않으므로 유통경로 추적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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