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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EDITION

아버지 세대의 초상화, 위대한 ‘빡서’의 추억

김기수에서 최요삼까지 주먹 하나로 시대 풍미한 프로권투 세계챔피언史

  •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prague@naver.com

아버지 세대의 초상화, 위대한 ‘빡서’의 추억

아버지 세대의 초상화,  위대한 ‘빡서’의 추억

2001년 1월30일 태국의 소르자투롱과의 경기에서 강력한 오른손 휘어치기를 적중시키는 생전의 최요삼 선수(오른쪽).

Inthe clearing stands a boxer/ and a fighter by his trade/ And he carries the reminders of/ every glove that laid him down or/ cut him till he cried out/ in his anger and his shame/ “I am leaving, I am leaving”/ But the fighter still remains.

링 한복판에 한 권투선수가 서 있어요/ 싸움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에요/ 그에게는 그를 쓰러뜨렸던/ 글러브가 남긴 상처가 있어요/ 분노와 수치심에 휩싸여/ 그만두겠다고 외칠 때까지/ 그에게 상처를 입혔어요/ 하지만 그 선수는 아직도 떠나지 못해요.

사이먼 · 가펑클 ‘The Boxer’ 중에서

우선 한국 권투의 시원(始原)격인 김기수에게서 시작하자. 그는 1966년 한국 최초로 세계챔피언에 등극했다. 그런데 날짜가 예사롭지 않다. 6월25일. 그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판정승으로 눌렀다. ‘6·25사변일’이라는 말이 익숙했던 그날에 챔피언이 된 것은 우연이지만, 1·4후퇴 때 함경도 북청에서 피난 내려와 여수에서 권투를 익힌 김기수의 챔피언 등극은 일종의 역사적 필연성을 갖는다.

[화보]김기수에서 최요삼까지 프로권투 세계챔피언史




아버지 세대의 초상화,  위대한 ‘빡서’의 추억

WBA 세계주니어미들급 챔피언을 획득한 유제두의 귀국 환영 카퍼레이드 장면과 챔피언 벨트를 들고 있는 모습.

박정희 전 대통령의 ‘김기수 프로젝트’

가난했지만 ‘하면 된다’는 정신이 지배하던 시절의 파이터였고, 실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관심이 밑거름이 됐다. 박 전 대통령은 대한중석을 회생시킨 박태준을 불러 김기수가 세계챔피언이 될 수 있게 후원하라고 지시했고, 이에 박태준은 김기수에게 ‘주먹으로 세계 일등이 되라’는 뜻의 ‘권일(拳一)체육관’을 신설동에 마련해줬다. 김기수는 박 전 대통령이 직접 관전하는 가운데 15회 판정승으로 챔피언이 됐다.

이로써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 험난한 세계에 맞선 ‘헝그리 복서’의 역사가 시작됐다. 골프나 수영처럼 과학적 시스템과 문화 인프라에 의해 발전하는 스포츠와 달리, 그 무렵 권투는 강한 주먹과 샌드백만으로도 충분했다. 김기수는 지독하게 뛰었다. 북한산 중턱 약 15리를 매일 뛰었다. 일제강점기 두만강을 시냇가처럼 뛰고 달렸던 마라톤 영웅 손기정처럼 이 북방의 사나이에게 북한산 중턱은 언덕에 지나지 않았다. 김기수는 자신의 마지막 기록이 패배로 끝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은퇴 직전 일본 선수에게 동양타이틀마저 빼앗긴 그는 지옥훈련으로 4개월 만에 타이틀을 되찾은 뒤 글러브를 벗었다. “자식들에게 패배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는 김기수의 결연한 모습이었다. 전쟁 이후, 당대 아버지들은 그렇게 자신의 시대를 견뎌냈다.

그가 열어젖힌 한국형 권투의 지평 위에서 홍수환 유제두 염동균 김성준 김상현 박찬희 김태식 김철호 김환진 장정구의 역사가 시작됐다.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바로 그 가난이 약이 됐다.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었기에 오늘날과 같은 상대적인 박탈감이나 사회적 소외가 덜했다. 신경림의 시 ‘파장’에 묘사된 것처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이 되는 시절이었으므로 터미널이나 동네 다방에 모여든 저개발시대의 한국인에게 이 챔피언들은 고통스런 눈물과 승리의 쾌감이 빚어내는 놀라운 화학반응을 안겨주었다.

아버지 세대의 초상화,  위대한 ‘빡서’의 추억

1_ 1978년 한국 프로복싱 사상 네 번째 챔피언(수퍼밴텀급) 염동균의 파이팅 모습. 상대는 일본의 고바야시다.
2_ WBC 수퍼라이트급 챔피언을 지낸 김상현.
3_ 1981년 WBC 수퍼플라이급 챔피언을 거머쥔 김철호.
4_ 1983년 WBC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장정구는 권투선수로 활약하는 동안 42전38승4패를 기록했다.

권력자들 눈 밖에 난 유제두 中情 공작설 폭로

동시에 권투는 국가적 대사(大事)였다. 전쟁과 가난을 딛고 일어선 저개발 국가의 늠름한 상징이었다. 오늘날의 박지성 김연아 박태환이 누리는 인기를 합해도 이 챔피언들에게 바친 당시 한국인들의 열망에는 못 미친다. 초대 챔피언인 김기수는 1965년 영화 ‘내 주먹을 사라’의 주연을 맡았으며, 세 번째 챔피언 유제두도 당대 인기배우 김희라 여수진과 함께 ‘눈물 젖은 샌드백’에 출연했다. 그는 복싱을 ‘빡싱’으로, ‘복서’를 ‘빡서’라고 불렀다. 이 억센 발음은 권투가 어떤 성질의 고난과 시련을 자양분으로 삼는지 잘 말해준다.

뜻하지 않은 봉변도 겪었다. 전남 고흥 출신의 유제두는 챔피언이 된 뒤, 그 지역을 기반으로 한 야당 정치인 김대중을 자주 찾았다는 이유로 높은 사람들의 눈 밖에 났다. 1975년 6월7일 일본 규슈에서 열린 WBA 주니어미들급 타이틀매치에서 일본의 권투영웅 와지마 고이치를 7회 KO승으로 제압한 유제두는 이듬해 2월17일 열린 도쿄대학 특설 링의 리턴매치에서 무기력하게 끌려가다 결국 15회 KO패를 당하는데, 훗날 유제두는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긴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자신이 먹던 딸기와 곰탕에 약을 탔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그것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넝마주이, 재건대, 구두닦이, 엿장수를 전전하며 결국은 챔피언 자리에 오르고 김포공항에서 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한 ‘더 빡서’ 유제두는 글러브를 벗었다.

It’s the eye of the tiger/ It’s the thrill of the fight/ Risin’ up to the challenge of our rival/ And the last known survivor/ Stalks his prey in the night/ And his fortune must always be/ Eye of the tiger.

그것은 호랑이의 눈/ 싸움의 전율과도 같은 것/ 일어나 상대방의 도전에 맞서/ 마지막 승자는/ 상대방의 틈을 노리는 법이라고/ 그리고 그의 운명은/ 언제나 호랑이의 눈과 같은 것이어야 해.

영화 ‘록키’의 주제가 ‘Eye of the Tiger’ 중에서

아버지 세대의 초상화,  위대한 ‘빡서’의 추억

일본 선수 오쿠마와 대전하는 WBC 플라이급 챔피언 박찬희. 홍수환은 WBA 밴텀급 챔피언 아널드 테일러와의 타이틀전에서 네 번이나 다운을 빼앗은 끝에 심판 전원일치로 15회 판정승을 거둬 세계 정상에 올랐다(오른쪽).

그러나 가장 괴로웠던 것은 ‘권투선수’에 대한 편견이었다. 대체로 학업을 포기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주먹을 쓰는 게 직업이었다. 그렇다고 거리의 싸움꾼은 아니었다. 링 위의 챔피언들이 링 밖으로 나오면,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편견에 사로잡혀 그들을 외면했다. 주먹다짐이나 하는 싸움패로 오해했다.

과연 그러한가. 여기 박찬희가 있다. 그는 ‘헝그리 정신’만이 아니라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완벽한 테크닉은 덤이었다. ‘링의 대학교수’라는 별명을 지닌 멕시코의 영웅 미구엘 칸토를 두 차례에 걸쳐 높은 기술로 눌렀다. 치밀한 분석과 훈련으로 연마된 그의 주먹은 또 다른 멕시코의 파이터 에스파다스를 2회 KO로 눌렀다. 선린중학교 3학년 때 처음 글러브를 낀 박찬희는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과 76년 킹스컵 대회에서 금메달을 차지하는 등 아마추어 통산 전적 127전 125승을 기록했다. ‘헝그리 정신’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홍수환의 4전5기 한반도를 흥분 속으로

그리고 홍수환이 있다. 그는 최초로 두 체급 세계챔피언에 오른 사나이다. 그것도 최고 기량의 선수들이 우글거리는 밴텀급의 강자였다. AP가 역대 최고 밴텀급 챔피언으로 꼽은 카를로스 사라테와 최고의 인파이터 베스트 10에 포함된 루벤 올리바렌스, 알폰소 사모라 등이 군웅할거하던 시절 홍수환은 두 차례나 권좌에 올랐다.

그것도 최악의 조건이었다. 세계지도를 보라. 왼쪽 끝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있고 오른쪽 끝에 파나마가 있다. 1974년 홍수환은 2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남아공으로 가서 WBA 밴텀급 타이틀을 거머쥔 뒤, 77년엔 파나마로 날아가 WBA 주니어페더급 타이틀을 따냈다. 그 유명한 ‘4전5기’ 카레스키야와의 대결이다. KO펀치가 약했던 그는 유연한 상체를 활용한 위빙(상체를 좌우로 흔드는 것)과 경쾌한 풋워크로 링 바닥에서 네 번이나 일어섰다.

그가 다만 ‘의지의 한국인’이었을까. 그는 오전에는 달리기와 섀도복싱으로 기초체력을 다지고 저녁엔 스파링으로 실전에 대비했다. 유연한 스텝을 위해 기차 침목 뛰어넘기를 했으며, 동양인으로서는 취약한 어퍼컷의 파워 강화를 위해 옆구리에 수건을 끼고 샌드백을 쳤다. 약한 펀치력을 보강하기 위해선 8파운드짜리 아령을 들고 200회 이상 펀치를 날렸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버팅 무기로만 쓰지 않았던 것이다. 유연한 몸놀림과 호랑이 눈매로 카운터블로를 날린 그의 조련을 받아 후배 김철호와 장정구가 챔피언에 올랐다.

Watching an old fight film last night/ Ray Mancini and Duk Koo Kim/ The boy from Seoul was hanging on good/ But the pounding it took to him/ There in the square he laid alone/ Without face without crying.

어젯밤 그 경기를 봤어요/ 레이 맨시니와 김득구/ 서울에서 온 소년은 잘 버티고 있었죠/ 하지만 계속된 폭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링 위에 그는 추락하고 말았죠/ 얼굴 없이, 울부짖음도 없이.

마크 코젤렉의 ‘Duk Koo Kim’ 중에서

그리고 김득구가 있다. 1982년 레이 ‘붐붐’ 맨시니와의 사투(오, 말 그대로 사투!) 중 14회에 쓰러져 영원히 일어나지 못했다. 그가 사망한 뒤, 이 죽음의 경기를 주재한 심판과 선수의 어머니는 자살했으며 뜻하지 않은 비극의 당사자인 맨시니도 권투를 그만뒀다. 수많은 안전장치와 제도, 보험과 선수들 간 존중이 뒷받침되는 종목이지만 권투가 비극의 현장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 이 사건은 이후 한국 권투의 운명을 예감케 하는 전주곡이었다.

아버지 세대의 초상화,  위대한 ‘빡서’의 추억

1_ 박정희 전 대통령이 연 체육인 만찬에 초청된 홍수환과 그의 어머니.
2_ 카드로나와의 대전에서 카운터블로를 맞고 다운된 홍수환.
3,4_ 비운의 복서 김득구.



비극 예고했던 김득구의 출국 인터뷰

강원도 거진에서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성장한 왼손잡이 파이터 김득구. 가난한 거리에서 더러 주먹다짐도 회피하지 않았던 그는 빵공장 종업원, 구두닦이, 버스 행상을 전전하면서도 검정고시로 천호상고에 입학한 강한 혈관의 사나이였다. 그는 이 학교 복싱부를 거쳐 한국 권투의 산실이던 김현치의 동아체육관에서 조련돼 세계챔피언을 향해 달렸다. 동아체육관은 전호연의 극동프로모션과 한국 권투를 양분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그는 김환진 유명우 등과 함께 샌드백을 쳤다. WBA 라이트급 챔피언 맨시니와의 타이틀전을 위해 김포공항을 떠나던 날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패하면 링에서 살아서 내려오지 않겠다”는 비장한 말을 남겼는데 아차, 그것이 비극의 예언이 되고 말았다.

미국의 유명한 인디밴드 ‘레드 하우스 페인터스’의 리더인 마크 코젤렉은 2003년 몇몇 동료와 함께 ‘Sun Kil Moon’이라는 프로젝트 밴드를 결성해 ‘Ghosts of the Great Highway’라는 앨범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유명 음악사이트인 ‘올뮤직 가이드’에서 별점 5개 중 4개 반이라는 높은 평가를 얻었다. 이 음반에 김득구 선수를 기리는 ‘Duk Koo Kim’이라는 노래가 실려 있다. 14분에 이르는 이 쓸쓸하고 비참한 노래는 김득구가 치러야 했던 운명의 14회를 기억하게 한다. 이 대곡은 다음과 같은 가사로 끝난다. “다시 한 번 내게로 와줘요. 내가 알지 못했던 사랑을 알려줘요. 다시 내게 불러줘요. 당신의 어린 시절의 그 노래를.”

이 노랫말은 김득구는 물론 최근 가슴 아픈 최후를 맞은 최요삼을 떠올리게 한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빡서’가 주인공인 비운의 전설을 회상하라고 촉구한다. 어릴 때의 사고 때문에 거의 왼손 하나로 챔프에 오른 김태식, ‘돌주먹’이라는 닉네임과 달리 자기관리와 명민한 두뇌로 공군사관학교 지도자까지 했던 문성길, 휴대전화 뒷자리 ‘0909’, 즉 ‘짱구짱구’라는 별명을 아직까지 유지하는 15차 방어전의 소유자 장정구, 그 기록을 깨는 것은 물론(17차 방어) 프로권투 최다연승(36연승), 최장 타이틀 보유(만 6년9일), 사상 최단시간 KO승(1회 2분46초) 등 기록의 사나이 유명우. 그리고 마지막 자리에 최요삼이 있다.

‘사각의 링’에서 한 시대를 겪어낸 이 사나이들의 면면은 굴러내리는 바위를 끝없이 밀어올려야 했던 시시포스를 닮았다. 우연히 자신의 삶으로 들어온 글러브를 끝내 버리지 못하고 ‘헝그리 정신’의 역사를 써야 했던 이 철권(鐵拳)들의 역사는, 전쟁 이후 가난 속에서 오직 미래를 위해 그들만의 청춘을 헌납해야 했던 ‘위대한 아버지’ 세대의 진정한 초상화나 다름없다.

[화보]김기수에서 최요삼까지 프로권투 세계챔피언史




주간동아 2008.01.22 620호 (p56~60)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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