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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봉이 만난 영화 영화인|‘행복’의 허진호 감독

순수한 사랑 노래로 ‘행복’의 집 짓다

  • 하재봉 영화평론가

순수한 사랑 노래로 ‘행복’의 집 짓다

순수한 사랑 노래로 ‘행복’의 집 짓다
허진호(44) 감독의 네 번째 영화 ‘행복’. 데뷔 이후 줄곧 멜로 영화만 만든 그가 지난 5월 결혼 후 처음 발표한 영화다. 멜로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이기도 한 결혼을 경험한 뒤, 그의 세계관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만들다 보니 네 번째도 사랑 이야기를 하게 됐다. 가진 것 없고 아픈 사람들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 대단히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그 끈을 놓았을 때의 변화와, 한 사람이 떠나가면서 남은 사람의 고통, 행복했을 때의 기억은 어떤 것일까라는 질문들을 가지고 ‘행복’을 만들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 이후 ‘봄날은 간다’ 등을 통해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진경산수를 그려온 허진호 감독은 배용준 주연의 ‘외출’에서는 평상심을 잃고 흔들렸다. 미세한 흔들림이었지만, 허진호 영화에서는 그런 작은 차이가 큰 결과를 빚는다. 무엇인가를 보여주겠다는 목적의식과 욕망이 앞서면 그의 영화는 후퇴했다.

‘행복’은 허진호 영화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하긴 어렵지만, 매우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는 전보다 훨씬 편안하게 대중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에서와 같이 손동작 하나가 우주를 들었다 놓을 정도의 무게감을 갖는 섬세한 연출은 그립지만,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게 들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행복’은 허진호 감독의 전작들보다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구조다. 배우들은 예전의 허진호 영화에서처럼 감정을 억제하지 않고 뜨겁게 분출한다. 그래서 관객의 감정선을 건드리는 정서적 효과가 뛰어나다.

통속적인 멜로 … 여백으로 작품에 상상력 부여



‘행복’에서 황정민은 허진호 영화의 정적 인물을 뛰어넘어 감정 변화가 크고 행동반경이 뚜렷한 역동적인 캐릭터를 보여준다. 황정민이 연기한 ‘영수’는 한석규가 연기한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과 함께 가장 울림이 큰 배역이다. 한석규가 죽음을 눈앞에 둔 채 불가능한 사랑에 가슴 아파하는 인간적인 고뇌를 섬세하고 깊이 있게 드러냈다면, 황정민은 자신의 삶을 치유해준 여자를 버리고 도시의 불빛과 술의 유혹 속으로 떠나는, 투박하고 거칠지만 훨씬 땀냄새 나는 인물의 육화로 배역에 생동감과 현실감을 부여한다.

“황정민 씨와 작업하면서 참 재미있었다. 지금까지 내 영화 주인공들은 정적이고 생각을 많이 하는 인물이었는데, 영수는 동적인 인물이다. 황정민 씨가 이전 캐릭터들에 대해 ‘재미없다, 다르게 해보고 싶다’고 요청했고, 나도 주인공이 어떻게 하면 적극적이고 동적으로 표현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영화를 만드는 동안, 영수를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들면 어떨까 혹은 너무 막가는 것 아닌가 같은 상반된 고민을 했다. 그런데 황정민 씨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선함이 있다. 나쁜 남자인데도 영수가 친근하게 다가온다면, 그건 황정민 씨의 선함 때문일 것이다.”

‘행복’은 오염된 도시와 청정한 자연을 대비시키며 한 남자와 두 여자의 삼각관계를 축으로 전개되는 통속적 구조의 멜로 영화지만, 허진호의 감각은 통속성을 뛰어넘어 깊은 울림을 준다.

허진호 감독은 항상 점프컷(장면 사이에 단절을 의도하는 장면 전환기법)에 의해 만들어지는 여백을 뛰어나게 활용한다. 영수가 시골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도시로 돌아간 이후를 그린 마지막 시퀀스는 빈번한 점프컷으로 시간과 공간을 압축해 보여주고 있지만, 통속적 서사전개에 여백의 상상력을 부여해서 작품이 평면적이지 않도록 해준다.

순수한 사랑 노래로 ‘행복’의 집 짓다

‘행복’은 허진호 감독의 네 번째 영화다.

‘행복’의 외형적 구조는 도시-시골-도시-시골의 장소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도시에서 클럽을 운영하던 영수가 시골로 떠난 것은 클럽 운영에 실패한 이유도 있지만 불규칙하고 방탕한 생활 중 얻은 간경변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같이 살던 애인 수연(공효진 분)에게서도 결별을 통보받았다.

‘문명 vs 자연’의 단순한 이분법이 ‘행복’에서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인물의 감정을 앞세우는 허진호 감독의 연출 때문이다. 그는 푸른 들판과 낙엽 쌓인 가을, 눈 내리는 겨울을 모두 화면에 담고 있지만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강조할 수 있는 롱샷 대신, 인물에 대한 클로즈업을 택한다. 그의 관심은 인간에게 있지만, 문명화된 도시 속에서 인간은 병이 들고 대자연과 순수한 사랑을 통해 병든 인간은 치유된다.

“행복의 조건은 건강, 사랑, 경제적인 것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잃은 상태에서 사랑을 하면 정말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해 인물들을 아픈 사람으로 설정했다.”

영수가 처음에 시골로 떠나기까지 도시에서의 삶은 짧게 그려져 있다. 그의 일상은 술과 여자로 채워져 있다. 그러던 그가 클럽과 여자를 정리하고 도시를 떠난다. 남은 것은 잠깐 버틸 수 있는 돈뿐이다. ‘행복의 집’으로 들어가는 시골 비포장도로 구멍가게 앞에서 처음 은희(임수정 분)를 만났을 때도 그는 도시생활의 연장선상에서 소주를 마신다.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에서 은희가 슬금슬금 피하면서 거울을 보는데, 그건 영수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영화 ‘장화, 홍련’ 촬영장에서 임수정을 처음 봤는데 그때 같이 간 이현승 감독이 반말 비슷하게 말을 붙였을 때 임수정의 서늘한 표정과 느낌이 인상적이었다. ‘제가 보기보다 나이 많아요’라는 은희의 대사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영수의 방으로 과일 접시를 들이미는 것도 은희이고, 그의 방문 앞에서 망설이다 섹스를 하게 된 것도 은희의 선택이다. “우리 같이 살래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땐 헤어지죠 뭐”라며 동거를 제안하는 것도 은희다. 폐가 40%밖에 안 남은 몸으로 8년째 요양원 생활을 하는 은희는 환자이면서 요양원의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는 스태프다. 영수와 첫 섹스를 할 때, 영수의 손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자 “숨이 차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말한다.

억제된 감정 분출, 남녀 캐릭터 더욱 현실화

“베드신은 여러 번 찍었지만 노출 수위는 화면에 나타난 정도다. 다만 은희가 더 적극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은희 대사대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물이 한 남자를 사랑했을 때 더 적극적이지 않았을까? 난 현장에서 지시를 잘 안 하는데 임수정에게 영수의 입술을 만지라고 했다. 영수는 성 경험이 많은 인물이지만 그게 에로틱한 느낌보다는 귀엽게 보이기를 바랐다.”

영수와 은희는 요양원을 나와 작은 집을 얻어 동거한다. 영수는 건강을 회복하지만 시골생활에 서서히 권태를 느낀다. 회복 불가능한 은희도 마음의 짐이 된다. 결정적으로 옛 여자친구인 수연과 영수의 친구가 그들 삶에 나타나면서 변화가 생긴다. 버스 정류장에서 은희가 서울 다녀온 영수에게 “못생겨졌어”라고 하는 대사에는 많은 것이 함축돼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이별뿐이다. 무릎 꿇고 “그 여자보다 더 잘할게”라며 싹싹 비는 은희 곁을 매몰차게 떠나는 영수의 모습에서 많은 남자들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다음 영화를 고민 중이다. 주변에서 이야기를 찾다 보니 남녀 간의 이야기에서 소재를 얻고 멜로 영화만 만들었다. 이야기를 반복한다는 느낌도 들고, 어떻게 새롭게 만들어야 할까 고민이 크다.”

허진호 감독의 ‘행복’은 욕망에 찌든 도시에서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행복은 순수한 사랑에서 찾아온다는 것을 탕아의 귀환으로 말하려고 한다. 도식적인 결말이고 상투적인 플롯이지만, 서사의 외형적 안정성을 선택한 대신 내면적 격렬함이라는 모험을 시도했다. 억제된 감정이 분출되며 캐릭터는 더욱 현실화됐다. 그리고 이것은 ‘행복’이 많은 사람들과 행복하게 만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간동아 605호 (p72~74)

하재봉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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