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00

2007.08.28

은밀한 욕구 해결 뒷골목 여인의 일기장

  • 심영섭 영화평론가 대구사이버대 교수

    입력2007-08-22 1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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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밀한 욕구 해결 뒷골목 여인의 일기장

    이리나 팜은 ‘As tears go by’의 영국 팝가수 마리안 페이스풀이 주인공을 맡았다.

    1989년이던가, 대학을 막 졸업했을 때 일이다. 영타운 문예극장이라고, 평소 자주 가서 시간을 때우던 신촌의 극장에서 ‘걸 온 더 모터사이클’이라는 영화를 봤다. 알랭 들롱이 나오는 옛날 영화라기에 별 기대 없이 보고 있는데, 영화는 그저 그랬지만 영화 속 까만 가죽옷을 빼입은 무명의 여배우는 정말이지 잊히지 않는다. 어딘가 ‘졸업’의 캐서린 로스를 닮은 듯한 그녀가 남편을 두고 애인을 만나기 위해 새벽길을 오토바이로 질주하는 모습은 티 없이 아름다웠다. 까만 눈동자가 그토록 고운, 마치 속세의 눈길을 타지 않은 듯 보이는 이는 올리비아 허시 이후 처음이었던 것 같다. 부랴부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전단을 든 순간, 나는 한 번 더 놀라고 말았다. 글쎄 이 여배우가 바로 ‘As tears go by’를 부른 가수 마리안 페이스풀이지 뭔가.

    ‘이리나 팜‘은 국화가 천 번 피고 진 후,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우리 언니’ 마리안 페이스풀의 영화다. 이 영화는 어언 예순을 넘긴 마리안 페이스풀이 영국 팝 역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떻게 굴곡진 인생을 견뎌냈으며, 런던의 소호가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모른 채로는 도무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난치병에 걸린 손자의 입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영국 교외의 중산층 마을에서 런던 환락가 소호로 가게 된 매기. 그녀는 카드놀이를 하며 입에 발린 소리나 하는 이웃을 벗어나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한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오색 전구가 형형한 거리에서 유독 그녀의 눈길을 잡은 것은 호스티스를 구하는 벽보. 남자들의 욕구를 충족해주는 ‘섹시 월드’에서 매기는 손으로 남자들의 자위를 돕는 이색 직업을 갖게 된다. 처음엔 젤을 손에 바르는 것도, 덩그러니 뚫려 있는 벽의 구멍을 들여다보는 것도 어색해 죽을 지경이었지만 얼마 안 있어 그는 성실한 서비스와 끝내주는 ‘터치’로 이리나 팜이라는 예명까지 얻는다.

    환락가 여주인공, 마리안 페이스풀 열연

    소호는 바로 마리안 페이스풀이 소싯적 노숙자로 빌어먹던 그 거리다. 믹 재거의 애인으로, 롤링 스톤스의 모든 멤버와 관계를 가졌다고 소문난 그가 헤로인에 찌들어 세상을 등졌던 그 길이 소호다. 영국의 유수 가문 출신으로 17세에 가수로 데뷔한 마리안에게도 한때 ‘걸어다니는 패션 아이콘’으로 만인의 사랑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앤디 워홀의 애인으로 채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에디 세즈윅이나 로댕의 애인으로 평생 정신병원에 감금된 카뮤 클로델처럼, 자의식 강한 아름다운 여성이 누군가의 액세서리로 살아가는 것은 저주에 가까운 종말을 부르는 게 세상 이치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마리안은 달랐다. 그녀는 살아남았고, 세 번의 결혼을 모두 이혼으로 끝낸 뒤 다시 한 번 가수로 데뷔한 후 배우로 재기했다. 2000년대 들어 ‘인티머시’ ‘마리 앙투아네트’ 같은 영화에서 조연을 거쳐 그가 본격적으로 주연을 맡은 영화가 바로 ‘이리나 팜’이고, 비열한 거리 소호로 돌아와 자신의 떨치기 힘든 과거와 직면하며 열연한 영화가 ‘이리나 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리나 팜’은 ‘성’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일’에 관한 영화다. 한 여자가 자신만의 일을 가지면서 벌어지는 변화, 예전에는 몰랐던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재구성해가는 변화들….‘이리나 팜’은 바로 노숙자에서 은막의 배우로 다시 돌아온 마리안 페이스풀이 가슴으로 풀어헤치는 ‘여자와 일’에 관한 모노드라마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초반부 매기는 섹스숍 사장 미키에게 자신을 늙고 못난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벽에 난 구멍에 얼굴을 들이미는 매기는 말 그대로 ‘구멍=창녀’라는 등식에 순순히 자신을 끼워맞추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감독 샘 가바르스키가 공을 들이는 쪽은 매기(또는 이리나)와 미키의 ‘손’이다. 매기는 첫 번째 손님을 맞은 후, 마치 죄에 물든 것처럼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그러고는 손을 씻는다.

    그러나 이리나 팜(‘이리나의 손바닥’이라는 뜻)이라는 예명을 얻은 뒤엔 누군가의 동업자가 돼 악수를 하고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손을 뻗는다. 특히 일에 열중한 나머지 ‘테니스 엘보(팔꿈치 통증)’ 대신 ‘페니스 엘보’라는 직업병까지 얻으니 이쯤 되면 이리나의 손은 그냥 손이 아니라 자신의 브랜드가 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일하는 곳을 ‘무대’ ‘스테이지’라 칭하고, 벽에 액자를 걸고 탁자에는 꽃병을 놓아둔다. 게다가 이제 스카우트 대상까지 되자, 고용주 미키는 자신이 은퇴 후 살 바닷가를 보여주며 이리나에게 걷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고백한다.

    늙어가는 여성 육체 사회적 통념 당당히 거부

    영국 영화는 늙은 여성의 육체에 대한 문제의식이 남달라 흐뭇하다. 백혈병에 걸린 친구 남편을 위해 옷을 벗어던진 채 달력 모델을 자청한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 ‘캘린더 걸’, 딸 애인과의 성관계 후 분노하는 딸과 맞서는 여자 메이의 이야기 ‘마더’. 이들 영국산 영화는 모두 늙어가는 여성의 육체에서 나이테 대신 빛바랜 자아를 발굴한다. ‘마더’의 문제적 각본가 하니프 쿠레이시는 아예 ‘어머니의 성’을 중산층 ‘가족’에 잠재한 ‘권력’의 문제로 사색하지 않던가.

    객관적으로 연출이 정교하거나 걸작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리나 팜’역시 이 같은 맥락에서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늙어가는 여성의 육체는 ‘무성(無性)’이라고 생각하는 사회 통념을 당당히 거부하는 문제의식과 가부장제에서 곱게 늙는다는 것의 허구성을 단번에 깨버리는 통쾌함. 그러니 노병만 죽지 않는 게 아니다. 어머니, 우리들의 어머니도 죽지 않는다. 단지 서서히 사라져갈 뿐. 어머니의 ‘손맛’은 이렇게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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