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86

2007.05.22

헉! 5000원권 동일 위폐 8212장

일련번호 ‘다마2772464라’ 구권 대량유통 … 동일범 소행 추정돼도 당국 속수무책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07-05-16 15: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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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헉! 5000원권 동일 위폐 8212장

    5000원권 위폐는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해 아직도 상당수 위폐가 시중에 유통되고 있다.

    해외여행을 하다 보면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는 물론 미국과 유럽에서조차 피해갈 수 없는 검증 과정이 하나 있다. 물건을 구매하고 지불을 위해 고액권을 내밀었을 때 하는 위조화폐(이하 위폐) 검증이 그것이다. 주로 100위안이나 100달러 등이 시빗거리가 되는데, 현금만큼은 아무 의심 없이 사용해온 한국인으로선 수사관처럼 달려드는 매장직원의 태도에 주눅들 수밖에 없다. 그만큼 위폐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다는 얘기다.

    한국도 위폐 안전 국가는 아니다. 일부 분별력 없는 컬러복사기 사용자들이 ‘재미 삼아’ 저지른다고 알려진 위폐 사건이 해가 갈수록 급증해 발권당국을 긴장시키고 있는 것. 문제는 수사당국이 위폐 사건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뿐 아니라 수사 의지마저 없다는 점이다. 1만원권에 집중됐던 위폐 사건이 5000원권으로 확산되는 기현상을 보이고, 심지어 조직범죄의 가능성까지 있는데도 단 한 번도 제대로 수사한 적이 없다.

    해마다 급증 조직범죄 가능성도

    낯설게만 느껴졌던 ‘가짜 한국돈’의 증가율은 해가 갈수록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국내에서의 위폐 적발 사례는 1996년까지만 해도 한 해 10건 안팎이었을 정도로 미미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디지털 사무기기의 보급이 늘면서 97년 35건, 98년 66건, 99년 68건, 2000년 160건 등 심상치 않은 증가 조짐을 보였다.

    160건이 적발된 2000년만 해도 위폐 수는 1142장이었으며, 건수에 비해 액수는 매우 적었다. 그러나 이후 초정밀 컬러프린터와 복사기가 일반에게 보급되면서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적발된 위폐 수는 2003년 3896장, 2004년 4353장, 2005년 1만2889장으로 급증했고 지난해에는 2만1939장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 가운데 1만원권 위폐의 증가는 일시적 현상으로 해석되고 있다. 지난해 적발된 1만원권 위폐는 총 7400여 장으로, 전년의 5400여 장에 비해 37% 증가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지난해 1만원권 위폐가 주로 성인오락실에서 발견됐다는 점에 비춰볼 때, 1만원권 위폐 증가는 사행성 오락기의 확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설명한다. 성인오락실의 특정 오락기가 위폐를 인식하지 못하는 점을 악용한 일시적 현상이라는 것.

    문제는 5000원권 위폐다. 적발된 5000원권 위폐 수는 2003년 437장이었으나, 2004년 987장에서 2005년 7337장으로 한 해 동안 무려 7.4배나 늘었다. 지난해에는 7387장이 적발돼 상승세를 이어갔다. 5000원권 위폐가 전체 위폐 수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5000원권 위폐에 대해 발권당국이나 수사당국은 속수무책이다. 특히 ‘동일범 혹은 단일 조직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강력한 물증이 있음에도 관계당국이 손을 놓고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 화폐 관리 능력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2004년 이후 급증한 구 5000원권 위폐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것은 ‘다마2772464라’라는 일련번호가 찍힌 위폐다. 2005년 3월 처음으로 이 위폐 2장이 신고된 이후 폭발적인 증가 곡선을 그려왔다. 2005년에는 1137장이었던 것이 2006년에는 무려 5599장의 동일번호 위폐가 적발된 것. 올해 5월3일까지 전국적으로 8212장이나 적발돼 단일 일련번호로는 국내 위폐 사상 최대 수량이다.

    그뿐 아니다. 이 일련번호의 일부인 ‘77246’이 찍힌 위폐까지 포함하면 올 3월까지 모두 1만3433장이 적발돼 5000원권 전체 위폐의 90%에 이른다. 만일 일련번호 ‘77246’ 앞에 ‘다’ 또는 ‘마’의 한글 기호와 숫자만 달리해 유통시켰을 경우, 단 한 명의 위폐범이 최대 수만 장의 5000원권 위폐를 만들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위폐조직이 등장했다는 의미다.

    5000원권 위폐 증가의 원인은 2005년까지 발행된 구권 화폐에서만 발견된다는 특징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은행 발권정책팀 관계자는 “구권 지폐는 1983년 기본 골격이 만들어진 이후 20년 이상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위조에 취약했다”고 말한다. 은색선과 홀로그램이 없어 마음만 먹으면 실물과 흡사한 위폐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2007년부터 신권이 유통되기 때문에 위조범이 서둘러 구권 위폐를 대량으로 유통시켰을 것이라는 해석도 제기된다.

    위폐 적발의 경로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한국은행이나 각 은행지점을 통해 경찰에 신고 접수되는 사례로, 전체의 65%에 이른다.

    헉! 5000원권 동일 위폐 8212장
    “지문채취 외 뾰족한 수 없어”

    문제는 은행을 통해 신고된 위폐는 수사자료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은행에 오기 직전의 유통경로를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지문이 흐트러진 경우가 많아 수사가 대부분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건배당만 하고 1년이 지나면 장기미제 또는 내사중지로 결론난다고.

    시민들이 직접 신고한 경우라 해도 수사는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서울관내 한 지능수사팀 관계자는 “위폐 사건을 배당받으면 지문채취 외의 수사방법이 없어 수사 착수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라고 토로한다. 일선 경찰서의 위폐 사건을 총감독하는 경찰청 지능범죄수사과 역시 “뾰족한 수가 없다”고 답한다. 전국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적발되는 위폐 사건에서 공조수사를 펼칠 만한 단서를 발견할 수 없다는 항변이다.

    게다가 위폐 사건은 피해자가 확실치 않고 피해액도 미미해 일선 형사들이 수사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심지어 과거 일부 경찰은 신고자의 위폐를 진폐로 바꿔주고 신고접수 없이 돌려보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정도다.

    하지만 발권당국 관계자들은 경찰이 일련번호 ‘다마2772464라’ 위폐 8200여 장이 동일범의 소행일 수 있다는 정황을 애써 무시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한다. 5000원권 위폐 사건에 대해 경찰에서 특별수사팀은커녕 어떠한 공조수사도 하지 않은 점은 직무 태만에 가깝다는 것. 경찰의 미적지근한 반응이 계속되자 한때 동일범의 소행임을 주장했던 한국은행 역시 “수사기관이 아닌 한국은행이 결론내릴 수 없는 일”이라며 한 발 물러선 상황이다. 결국 구권이 신권으로 완전히 교체되면 위폐도 자연스럽게 줄어들 것이라는 게 한국은행이 말하는 해법의 전부인 셈이다.

    여전히 경찰과 한국은행은 “위조지폐범은 5년 이상의 징역은 물론 사형까지 받을 수 있다”는 경고만 할 뿐이다. 하지만 이 경고가 왠지 공허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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