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조지 W 부시미국 대통령과 백악관을 나서는 칼 로브(왼쪽 사진 왼쪽).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의 전략가로 활동했던 딕 모리스.
문제는 시장(유권자)의 선택이다. 시장은 어느 쪽 제품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일까. 주력상품으로 내놓은 쪽(범여권)일까, 기획상품으로 내놓은 쪽(한나라당)일까. 기획으로 한 번 내놓은 쪽은 안 팔려도 그만이다. 그렇지만 주력상품으로 내놓은 쪽은 사정이 다르다. 안 팔리면 회사가 도산할 수도 있다. 그만큼 신중한 선택이 필요하다. 그러나 관찰자 처지에서는 그들의 고민이 별로 깊지 않아 보인다.
선거 공학의 포지셔닝 전략과 관련해 흔히 언급되는 두 모델이 있다. 클린턴의 정치 컨설턴트인 딕 모리스가 구사한 이른바 공화당의 이슈를 뺏어오는 ‘중도선점 전략’, 부시의 정치 컨설턴트인 칼 로브가 구사한 보수 결집을 강화하는 ‘갈라치기 전략’이 그것이다.
딕 모리스와 칼 로브 두 모델
한국식으로 하면 ‘집토끼와 산토끼’ 논리로 볼 수 있다. 집토끼론이 칼 로브 방식이라면, 딕 모리스는 산토끼론을 지향한다. 결국 중도론은 산토끼를 잡기 위해 보수 진영은 ‘좌로 한 클릭’, 진보 진영은 ‘우로 한 클릭’ 이동하자는 뜻이다.
물론 한나라당에 여전히 보수강화론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권에서도 진보강화론(김근태, 천정배의 진보정당론)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대세는 역시 중도선점론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딕 모리스의 방식이 현재로서는 더 우세한 셈이다.
어느 방식이든 이들의 전략을 벤치마킹하기 위해서는 꼭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 첫째, 이들의 전략이 미국의 특수한 정치 상황에서 고안된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 딕 모리스의 중도전략은 한국의 여권보다 한나라당에 더 유용한 전략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미국 공화당은 한국의 여권과 비슷한 길을 걸어왔고, 민주당은 한나라당과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따라서 미국 선거에서 배우려면 보수와 진보를 떠나 여권은 공화당에서, 한나라당은 민주당에서 배워야 한다.
딕 모리스가 구상했다고 알려진 중도전략은 사실 1984년 알 프롬이 만든 DLC(민주당지도자협의회)가 고안한 것이다. 80년대 레이건, 부시 정권을 거치면서 무력감에 빠진 민주당을 살리기 위해서는 기존 민주당 노선을 뛰어넘는 제3의 길이 필요했던 것. 이 전략은 훗날 영국의 앤서니 기든스에게 영향을 미쳐 그가 토니 블레어에게 제3의 길을 조언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자신이 쓴 ‘노동의 미래’에서 제3의 길은 미국 DLC에서 가져온 것임을 솔직히 밝혔다.
신노선으로 집권한 클린턴이 과거의 민주당 노선으로 회귀해 치른 1994년 중간선거에서 패배(공화당은 깅그리치의 주도로 ‘미국과의 계약’이라는 캠페인으로 승리한다)한 뒤, 다시 신노선(공화당의 전통적인 정책도 과감히 채택했다)을 강화해 재집권에 성공한 것이 ‘가치 어젠다’로 알려진 96년 대선이다.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전통적으로 민주당의 주요 지지기반이던 베이비붐(1946~65년생) 세대가 40대가 되면서 일상생활 이슈에서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이자, 이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선택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5월7일 중도개혁 통합신당 김한길 대표가 꽃을 흔들며 당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최근 한국의 40대도 비슷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이들이 보수화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내 문제(부모, 부부, 자녀)가 급하다’는 것과 한국도 이젠 ‘웬만큼 민주화됐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마음 한쪽에는 여전히 변화와 개혁에 대한 열망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 40대가 올 대선의 키를 쥐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보이는 보수성과 개혁성의 이중성은 번지점프를 연상시킨다. 통상 번지점프는 두 가지를 확인해준다. 하나는 뛰었으니까 내려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몇 차례의 반동을 거치면서 내려온다는 것이다.
내려온다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개혁성을 상징한다. 몇 차례의 반동 꼭짓점은 일상생활의 보수성을 상징한다. 따라서 올 대선은 이들의 상반된 두 속성에서 어느 쪽이 더 강하게 나타날지가 관건이라 할 수 있다. 최근 한나라당이 대북정책과 경제적 이슈에서 변화를 보이는 것도 이들을 잡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그렇다면 범여권과 한나라당이 상대방의 이슈를 빼앗아오는 딕 모리스의 중도선점 전략을 구사한다면 어느 쪽에 더 승산이 있을까.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범여권의 중도전략이 몇 가지 점에서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있다. 가장 치명적인 위험은, 여권발(發) 중도론이 자칫하면 하나의 전선도 감당하기 힘든 역량을 가지고 두 개의 전선에서 싸워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 있다는 점이다. 즉, 범여권이 중도전략을 내세우면 안 그래도 힘겨운 보수와의 전선에 더해, 진보와의 전선도 새로 준비해야 할지 모른다. 이는 최악의 상황이다. 흔히 ‘길 가운데 서 있으면 양쪽에서 오는 차 모두에 치일 염려가 있다’는 말이 있다. 중도를 빈정댈 때 쓰는 말인데, 이것이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
현대 축구는 주로 ‘스리백 시스템’과 ‘포백 시스템’을 구사한다. 스리백은 수비수를 3명, 포백은 4명 세우는 것이다. 선진 축구를 하는 팀들은 거의 대부분 포백 시스템을 구사한다. 포백 시스템을 구사하면 더 공격적인 축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리백은 3명이 수비를 전담하다가 공격할 때만 미드필드까지 압박을 가하기 위해 올라간다. 반면 포백은 양 윙백이 공격 진영까지 과감히 치고 올라가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포백 시스템을 구사하려면 양 윙백의 체력이 뛰어나야 한다. 스피드도 받쳐줘야 한다.
거스 히딩크가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으로 왔을 때, 한국 대표팀은 스리백 전술을 구사했다. 히딩크는 이를 포백 시스템으로 전환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2002년 한일월드컵에는 스리백 시스템을 들고 나갔다. 홍명보 최진철 김태영 등 당시 주요 수비수의 나이가 너무 많아 포백 시스템을 소화할 체력과 스피드가 부족했던 탓이다. 억지로 포백으로 나선 평가전에서 한국 대표팀은 참패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지금 한국 축구대표팀은 포백 시스템을 구사한다. 이영표 조원희 송종국 김동진 등 스피드와 체력이 강한 선수들이 있기 때문이다.
범여권 마이너리티 될 가능성
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
일심회 사건으로 큰 타격을 받았던 민주노동당이 다시 활기를 띠게 된 것도 여권이 스스로 진보를 버렸기 때문이다. 진보 진영은 두 개의 반자유무역협정(FTA) 전선(반신자유주의 전선을 통해서는 한나라당, 반자유주의 전선을 통해서는 여권)을 기회로 영토를 확장하고 있다.
반면 한나라당의 사정은 여권보다 안정적이다. 젊고 패기 넘치는 포백 자원을 확보했음에도 스리백 시스템을 고수했던 한나라당은 왼쪽으로 무게중심을 이동해도 무방할 듯하다. 장마리 르펜이 이끄는 프랑스 국민전선 같은 극우 정당이 없기 때문이다. 올라가도 뒷공간이 안 열린다.
범여권의 중도론은 또 이슈 선점에서 마이너리티가 될 가능성이 높다. 사거리에서 길을 묻는데 어떤 사람들은 무조건 좌회전만 하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우회전, 또 다른 사람은 직진을 주문한다. 그렇지만 세상사가 어디 그런가. 좌회전해서 직진하다, 다시 좌회전해야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세상 이치다. 세계화, 정보화된 세상에서 좌파정책이나 우파정책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보수든 진보든 외곬으로 믿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중도란 독립적인 그 무엇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보수의 정책을, 때로는 진보의 정책을 유연하게 지지하는 합리적 선택을 말한다. 영국 보수당의 젊은 당수 데이비드 카메론이 내건 것처럼, 보수당도 사회경제적 정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와 관련한 모델도 두 가지가 있다. 바로 손학규 모델과 홍준표 모델이다. 두 사람은 범여권과 한나라당의 중도모델로 볼 수 있다. 손학규가 햇볕정책의 계승 등 정치적 진보를 표방한다면, 홍준표는 정치적으로 보수를 견지하되 사회경제적 이슈에서 과감히 진보 정책을 내놓는다.
정치적 민주화라는 이슈가 더 이상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없을 정도로 이 사회가 민주화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고 대중은 주머니에 들어온 것에 대해서는 감사할 줄 모르는 존재라는 점을 감안하면 평화 이슈를 전면에 내세우는 전략은 선진화를 내세우는 전략보다 열세에 놓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