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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찾는 논술 비전|이미지와 기호의 배반 (2)

실재와 이미지의 기막힌 역전

  • 노만수 학림논술연구소 연구실장·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

실재와 이미지의 기막힌 역전

실재와 이미지의 기막힌 역전

르네 마그리트의 ‘인간의 조건’.

여기에 거의 나체인 한 남자 운동선수의 사진이 있다. 바다를 가르며 전속력으로 달리는 요트의 난간과 밧줄을 잡고 선 그의 팔과 넓적다리는 곧게 뻗쳐 있고 근육은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다. 이 이미지의 의미를 규정하는 설명문은 다음과 같다.

‘진짜 남성의 인생, 그래 멋진 남성의 인생이 여기에 있다. 매일 아침 애프터 셰이브 로션의 짙은 향기를 맡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다.’

광고회사는 이 청년을 통해 애프터 셰이브의 쾌적함을 표현하기 위해, 이미지와 설명문의 수사학이라는 이중의 테러리즘을 사용한다.

ⓐ ‘깔끔한 남자가 되십시오. 매일 아침 멋있는 남자가 되어 자신도 만족하고 여자에게도 만족을 주십시오. 이 애프터 셰이브를 사용하든가, 아니면 별 볼일 없는 남자가 되든가, 명심하시라.’

- 르페브르 ‘현대세계의 일상성’, 연세대 2003년 논술



‘바다’ ‘요트’ ‘근육’ 등과 같은 시니피앙(의미한 것·기표)들이 요술을 부려 애프터 셰이브가 정말로 ‘진짜 인생’ ‘쾌적함’ ‘멋진 남성’ 등과 같은 시니피에(의미된 것·기의)를 보장해준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기호학자 소쉬르에 따르면 언어는 기표와 기의의 결합에서 의미가 생긴다. 기호학과 신화학을 접목한 롤랑 바르트는 언어의 의미에는 좌우 ‘양 날개’가 있다고 생각했다. 왼쪽 날개는 ⓑ사전적 의미(denotation), 오른쪽 날개는 ⓒ사회문화 맥락(connotation)이다. 가령 혼혈인의 ⓑ는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2세’다. 하지만 ⓒ는 ‘대한민국에서 차별받는 이등국민’이다. 광고는 ⓑ와 ⓒ를 혼란스럽게 해 교묘한 이득을 얻는다. 애프터 셰이브의 ⓑ는 ‘로션’인데, ⓒ는 ⓐ인 것이다. 그러므로 소비자는 로션의 품질보다는 ‘ⓒ = ⓐ’이므로 구매하지 않으면 멋진 남자가 못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만다.

“소비과정은 기호를 흡수하고 기호에 의해 흡수되는 과정이다. 기호의 발신과 수신만이 있을 뿐이며 개인으로서의 존재는 기호의 조작과 계산 속에서 소멸한다. 소비시대의 인간은 자기 노동의 생산물뿐만 아니라 자기 욕구조차도 직시하는 일이 없으며, 자신의 모습과 마주 대하는 일도 없다. 그는 자신이 늘어놓은 기호들 속에 내재할 뿐이다.”

-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이화여대 2004년 정시논술

실재와 이미지의 기막힌 역전

1. 르네 마그리트의 ‘허상의 거울’.
2. 남성미 넘치는 카우보이의 이미지를 파는 말보로 담배 광고.

광고는 이렇게 하나의 상품에 현실과 상상(이미지)이라는 이중적 존재를 부여해 소비자에게 만족과 쾌락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심어준다. 현실을 변질시키는 기호와 이미지의 배반이다.

그래서 베네치아 관광객은 베네치아 자체가 아니라 베네치아에 대한 담론을 소비한다. 말보로를 피우는 흡연자는 배우 존 웨인처럼 ‘쿨’한 서부 사나이가 되고 싶고, ‘애니스타’(속칭 이효리 폰)를 들고 다니면 이효리처럼 ‘섹시’해질 수 있다고 느끼며, 타워팰리스 주민은 평수보다는 ‘타워팰리스 아이콘’(상류사회 신분증)에 더 만족을 느끼며 살아간다. 현대 소비사회의 소비자는 상품의 품질(사용가치)을 소비하는 게 아니라 이미지(기호)를 소비하는 것이다.

2007년 3월6일 세상을 떠난 프랑스 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분석이다. 그는 이렇게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미지 만들기 과정’을 ‘시뮬라시옹’(Simulation·위장하기)이라고 명명했다. 모든 실재의 인위적인 대체물은 ‘시뮬라크르’(Simulacre·위장물)다.

플라톤은 시뮬라크르(이미지나 기호로서의 예술)를 본질(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깔보지만, 보드리야르는 이미지(가짜)가 실재(진짜)를 지배한다고 한다. 상품광고도 시뮬라크르, 즉 실재의 모사나 이미지에 불과한데 소비자는 상품실재의 실용성보다는 상품광고의 이미지나 기호의 ⓒ를, 어떤 이는 파산을 감수하고도 소비한다.

결국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가 역전돼 실재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시뮬라크르들이 더욱 실재 같은 극실재(하이퍼리얼리티) 현상이 벌어진다. 이를테면 고도로 발달된 미디어는 전쟁도 ‘파생실재화’(시뮬레이트)한다. 컴퓨터의 센서로 조정되는 화면상의 미사일 궤도는 실제 탄의 궤도가 아니다. 적은 사람이 아니라 모니터에 떠 있는 상징 이미지, 픽셀이나 단순한 숫자에 불과하다. 버튼 하나를 눌러 미사일을 발사하는 미군 병사도, CNN 위성방송을 통해 전쟁뉴스를 보는 시청자도 이라크전쟁을 월드컵처럼 관람한다.

화면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판타지 시뮬라크르’는 전쟁을 컴퓨터 게임처럼 만든다. 사라지는 것은 흥건한 피와 병사들의 아비규환 그 구체성이고, 얻는 것은 흥미로운 ‘스펙터클 가상현실’일 뿐이다. 그래서 전쟁이 고도화될수록 후방의 민간인들은 최전선 병사의 고통을 느낄 수 없다. 추상적인 자국의 신념에 사로잡혀 갈수록 총력전의 의지를 다진다. 이미지의 배반이 꾸민 이상한 광기다.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 100만 대군에 맞선 스파르타 군인 300명을 다룬 최근 개봉 영화 ‘300’도 장엄한 흑무(黑霧)색 3차원영상 홀로그래피가 전쟁 현장을 뮤직비디오나 광고 영상처럼 볼거리로 꾸민다. 결국 참혹한 살육의 실재는 비현실적인 가상이미지가 돼, 전쟁이란 잔혹하지 않다는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이미지는 깊은 사실성을 감추고 변질시켜, 사실과 이미지는 무관하다(저서 ‘시뮬라시옹’)”고 말했다.

▷르네 마그리트의 ‘인간의 조건’도 ‘풍경 밖’(3차원 현실)과 ‘캔버스 풍경’(2차원 이미지)이 이어져 어느 것이 더 현실인지 혼란스럽다. ‘실재와 이미지의 혼동’ 시뮬라시옹은 마그리트의 회화 주제였다.

‘꿈의 열쇠’를 보자. 그림 속 말(馬)은 문, 시계는 바람, 달걀은 아카시아, 구두는 달, 모자는 눈이다. ‘자연의 은혜’에서는 나무의 잎들이 하늘로 날아가 새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새들이 서서히 식물화된 끝에 결국 초록의 맥박을 멈추면서 땅에 파묻히는 것인가. 사람의 눈동자에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을 그려 넣은 ‘허상의 거울’ 등 이미지와 실재의 경계가 사라지고, 이미지는 어미인 실재를 배반하기 일쑤다. 마그리트에게 회화는 대상을 지시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들의 네트워크인 셈이다. 그래서 미셸 푸코는 마그리트에게서 ‘재현 자체의 사라짐’을 읽었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이성복 ‘남해 금산’

이성복의 시세계처럼 삼라만상이 서로 연계되었다. 그러면서 사물은 이름을 갖고 있지만 우리가 그보다 더 적합한 이름을 찾을 수 없는 것도 아니고, 기호와 이미지는 우연하고 자의적이어서 그것과 실재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때문에 사물의 본질을 알고 싶거든 언어와 회화가 재현하는 기호와 이미지를 현실 그 자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즉 기호와 이미지의 배반을 직시하라는 마그리트의 역설이 그의 초현실주의다.

그럼 현대 소비사회에선 가상이미지만 난무하기 때문에 현실의 본질을 알 수 없는 것일까. 예술은 쓸모없는 허상의 짓거리인가. 18세기 연암 박지원이 ‘20세기 마그리트’인 양 통찰 한 꾸러미를 풀어놓았다.

“허공을 날며 우는 새의 소리야말로 얼마나 생기 넘치는가. 그런데 적막하게도 새 조(鳥) 한 글자로 새들의 빛나는 색깔을 말살하고 몰각시키며 그 모습과 소리를 놓치고 없애버리니, 이는 마실 가는 촌노인의 지팡이 꼭대기에 새겨진 새 모양과 무엇이 다르랴. 아침에 일어나니 푸른 나무로 녹음진 마당에 철새들이 서로 정답게 울고 있다. 나는 부채를 들어 책상을 두드리며 크게 부르짖었다. 이것이야말로 새가 날아가고 날아온다는 정경의 문자이고, 서로 울며 화답한다는 모습을 담은 글이다. 나는 오늘 ‘참독서’를 했도다.”

-연암 박지원 ‘참다운 독서(答京之 之二)’

당대에 비유컨대 CNN 위성방송의 분석뉴스 자체보다 이라크 전쟁터에서 겪는 인간의 실재(real) 고통을 느끼는 게 ‘참된 인식’이란 것이다.

생각 & 토론거리

1. 일부 학자들은 시뮬레이션이 가상(virtual)과 실재(real)를 대체할 것이라고 한다. 가상현실도 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판타지, 공상과학소설(SF), 하이퍼텍스트, 홀로그래피 등에서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 부정성과 긍정성, 양 측면을 생각해보자.

2. 예술 이미지와 광고 이미지의 차이는 무엇인가?

3. 예술작품과 보통의 평범한 물품을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프랑스 바칼로레아 논술

4. 상품은 효용이 먼저인가, 기호로서의 세련됨이 먼저인가?

5. 과시소비는 소득재분배를 하거나 돈을 돌게 하므로 긍정적인가, 위화감과 황금만능주의를 조장하므로 부정적인가? -한국외대 1999년 정시논술

6. 광고는 절대 믿을 수 없는가? -한양대 2001년 정시논술




주간동아 2007.03.27 578호 (p95~97)

노만수 학림논술연구소 연구실장·서울디지털대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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