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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삼남매,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다

1년 전 어머니가 비정의 아버지 살해 서울 오픈클리닉 도움으로 충격 벗어나 안정 되찾아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문경 삼남매,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다

문경 삼남매,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다
아버지는 항상 술에 취해 있었다. 날마다 지독한 소주 냄새를 풍기며 어머니와 삼남매를 매질했다. 프라이팬, 전깃줄, 망치, 칼 등 아버지의 폭력은 수단을 가리지 않았고 운이 나쁜 날에는 대여섯 시간씩 맞아야 했다. 어머니마저 일하러 나가고 없는 날이면 삼남매는 아버지를 피해 집 근처 공원 화장실에 몇 시간씩 숨어 있곤 했다.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가 죽였다. 아버지가 돼지고기를 소주로 바꿔 마신 것이 화근이었다. 곤궁한 살림 탓에 김치로만 끼니를 때운 지 열흘 남짓 되자 반찬투정을 하는 아이들을 위해 어머니가 마지막 남은 비상금을 털어 사온 돼지고기였다.

가정폭력으로 인한 불안·공포 증세 탈피

지난해 11월 언론에 크게 보도됐던 이 사건으로 어머니 이모(37) 씨는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한순간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떨어지게 된 삼남매는 1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경북 문경에 있는 외가에서 지내고 있는 삼남매 중 둘째와 막내인 윤호(가명·15)와 재호(가명·13)는 지난 4월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했다. 이날은 대치동에 있는 ‘인권피해자를 위한 오픈클리닉’(대표 조용범·02-563-3853,http://www.openhrc.org/)을 처음 방문하는 날. 하지만 윤호와 재호는 다정다감하게 말을 거는 오픈클리닉 연구원들에게 선뜻 마음을 열지 않았다.



“윤호는 감정적으로 매우 억압된 상태였습니다. 반대로 재호는 분노감이 컸고요. 그러면서 둘 다 심각한 환청과 환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채송희 팀장)

결혼생활 내내 가정폭력에 시달린 어머니 이씨는 법정 심리평가에서 ‘학대받는 여성 증후군’진단을 받았다. 심각한 우울증과 ‘100명 중 7등’에 해당할 정도로 높은 자살 관념을 나타냈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척도도 높았다. 불안과 공포 증세 또한 심각했다. 그러나 가정폭력으로 아픈 것은 이씨만이 아니었다. 아이들 또한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특히 PTSD의 경우 오히려 어머니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을 나타냈다.

윤호는 “선생님 귀에도 종소리가 들려요?” “저쪽 구석에서 귀신이 날 쳐다보고 있어요”라고 말해 연구원들을 놀라게 했다. ‘아버지’와 ‘가장 무서운 꿈’을 묻는 심리검사지에는 각각 ‘술만 마시고 때리는 사람’ ‘아버지가 나오는 꿈’이라고 썼다. 일상적인 대화가 어려울 정도로 상대방에게 집중하지 못했고 감정 기복도 커서 기분이 좋다가도 옷에 티끌 하나만 묻어도 몹시 울적해했다.

재호는 분노감을 자주 표출했다. 화가 나면 형에게 마구 주먹을 휘둘렀고, 기분이 상했다는 이유로 무작정 학교 밖으로 뛰쳐나간 적도 있었다. 귀신이 무서워서 혼자 화장실 가길 꺼렸지만 한편으로는 ‘링’과 같은 공포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문경 삼남매,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다

문경 삼남매를 돌보고 있는 오픈클리닉 연구원들. 왼쪽부터 윤수정, 이에스더, 배진화, 조용범, 서지영, 채송희 씨.

연구원들이 무엇보다 가슴 아파했던 것은 두 아이 모두 체격이 왜소하다는 점. 둘 다 중학생이지만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채송희 팀장은 “두 아이 모두 영양실조 상태였고 낮은 자존감, 의욕 상실, 학습 부진 등의 상태에 있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매주 토요일마다 오픈클리닉을 찾아오면서 이들 형제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7월부터는 첫째인 누나 세정(가명·16)이가 함께 살게 되면서(세정이는 3년 전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한 후 보육원에 맡겨졌다) 삼남매는 ‘행복하게 사는 법’에 대해 하나씩 깨우쳐 나가는 중이다.

“처음에는 낯선 어른들에게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종이컵에 질문 종이를 넣고 하나씩 뽑아서 대답하는 놀이를 하면서 조금씩 친해졌어요.”(윤수정 연구원)

조용범 대표(임상심리학 박사)의 지휘하에 연구원들은 삼남매의 엄마이자 친구, 과외 선생님이 되었다. 토요일마다 버스터미널로 마중과 배웅을 나갔고, 주중에는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컴퓨터와 TV에만 빠져 있는 생활습관을 고치기 위해 매시간마다의 활동 사항을 스스로 써넣는 생활계획표를 만들고 잘 지키기로 약속했다. 응석 부리기 좋아하는 윤호에게는 ‘멋진 신사답게 행동하는 법’을 가르쳤고, 쉽게 화를 내는 재호에게는 ‘멋지게 자기 감정 표현하기’를 익히게 했다. 연구원들은 한 과목씩 맡아 또래에 비해 많이 뒤처진 학교 공부도 가르쳤다.

예쁘고 큰 눈망울을 가진 세정이는 “사람들이 내 눈이 아빠를 닮았대요. 그래서 절 싫어하나 봐요”라고 말해 연구원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연구원들은 늘 착한 아이로 보이고 싶어하고 애정을 갈구하는 세정이에게는 상처를 보듬어주면서 자존감을 키워주기 위해 노력 중이다.

연구원들 헌신적 심리치료 ‘결실’

매주 토요일 오후 시간을 함께 보내는 연구원들의 노력으로 삼남매는 정서적 안정과 생활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더 이상 ‘귀신’이 나타나지 않고 아빠가 나오는 악몽도 꾸지 않는다. 장래희망이 없다고 했던 윤호는 요즘 입버릇처럼 “심리학을 공부해서 저처럼 아픈 아이들을 돌봐줄래요”라고 한다. 수학 시험에서 한두 문제를 겨우 맞히던 실력이었지만 지난 중간고사 때는 76점이나 받아 연구원들을 기쁘게 했다. 얼마 전에는 과학경시대회를 잘 봐야 한다며 과학문제집을 갖고 와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쳐달라고 조르기도 했다고.

컴퓨터와 TV에 매달리며 “그냥 실업고나 가야죠”라고 했던 재호는 요즘 하루 1시간 이상 컴퓨터를 하지 않는다. 좋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고 싶다며 공부도 열심이다. 제대로 챙겨먹질 않아 늘 배탈이 나곤 했었는데, 이제는 밥도 잘 챙겨먹어 반년 만에 키가 4cm나 컸다. 재호의 멘터인 이에스더 연구원은 “예전에는 전화를 걸면 ‘그냥 있었어요’ 했는데 요즘은 ‘누구랑 놀았어요’라고 말한다. 친구 따윈 필요 없다고 했던 녀석인데 참 기쁘다”며 웃었다.

동생들이 “누나는 변태”라고 불평했을 정도로 세정이는 동생들을 자주 끌어안고 늦은 밤에 몰래 성인방송을 보는 등 문제 행동을 보였다. 아버지의 성추행이 그릇된 영향을 준 것. 불안한 기분이 들면 살점을 물어뜯는 자해 행동을 하기도 했다. 세정이의 멘터인 배진화 연구원은 “아직 많은 과제가 남았지만 과거보다는 많이 밝아졌고 정서도 안정돼가고 있다”고 말했다.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준 오픈클리닉 연구원들 덕분에 예전보다 한층 밝아진 삼남매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조용범 대표는 “지금까지 어른들로부터 보호와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우선은 연구원들과의 신뢰 관계 형성이 중요하다”며 “좀더 정서가 안정되면 PTSD 치료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2년 후 출소하는 어머니와 함께 살 때를 대비해 좀더 성숙한 청소년으로 성장하는 것도 이들 남매에게 남은 과제다.

오픈클리닉은 범죄 피해자들에게 무료로 심리치료를 해주고 있다. 군 폭력, 연쇄살인사건, 데이트 폭력 등의 피해자들이 오픈클리닉의 도움을 받고 있다. 물론 삼남매를 돌보는 일 또한 금전적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채송희 팀장을 비롯한 연구원들은 “어제보다 밝아진 아이들이 ‘선생님, 사랑해요’라고 말할 때 느끼는 보람은 어떤 대가보다 값지다”고 한결같이 말했다.

지난 여름방학 연구원들은 문경에 있는 삼남매 집을 방문했다. 그리고 ‘1년 후 나의 모습’을 적은 종이를 타입캡슐에 넣어 뒷마당에 묻어놓았다. 내년 여름, 다 함께 꺼내보기로 약속하고서.

“아이들이 종이에 무엇을 써넣었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하지만 믿어요. 지금처럼 노력한다면 세 아이 모두 바라던 대로 되어 있을 거라고요.”(윤수정 연구원)



주간동아 561호 (p34~35)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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