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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조선조 500년 지배한 정도전, 그 ‘정신’ 닮겠다고?

토지개혁으로 농민 마음 사고 前 왕조 지배이념 뒤엎어 … 노무현 대통령 ‘역할 모델’로 다시 주목

  • 이덕일/ 역사평론가

조선조 500년 지배한 정도전, 그 ‘정신’ 닮겠다고?

  • 노무현 대통령이 요즘 공·사석에서 가장 많이 거론하는 역사 인물이 정도전이라고 한다. 조선 500년을 있게 한 혁명을 성공시킨 사람은 정도전이다. 권력의 승패가 아니라 제도와 문화와 이념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며 정도전의 예를 즐겨 든다는 것.
  • 조선조 창업의 기틀을 세운 정도전에게서 노 대통령이 받아들인 ‘코드’는 과연 무엇일까.
  • 정도전의 삶과 정치 역정을 살펴본다. <편집자>
조선조 500년 지배한 정도전, 그 ‘정신’ 닮겠다고?
불운을 딛고 한 세상을 풍미한 사람을 풍운아라고 한다면 정도전만큼 이 말에 어울리는 사람을 찾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불우한 환경을 떨치고 일어나 개국(開國)의 주역이 되었으나 한명회 같은 출세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당시로는 진보적 사상이던 성리학 사상가이자 그 실현에 모든 것을 건 정치가였으며, 원명(元明) 교체기라는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를 간파하고 친명(親明) 노선을 걸었으나 한편으로는 요동정벌을 추진했던 진취적 민족주의자였다.

정도전은 자존심이 강했다. ‘태조실록’ 7년 8월26일자의 졸기에는 정도전이 조선이 개국할 즈음 취중에 왕왕 “한고조(漢高祖)가 장자방(張子房)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쓴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신분제 사회에서 서녀(庶女) 아들의 말치고는 대단한 자부심이 배어 있다. 정도전의 어머니는 정팔품 말단 무관인 산원(散員) 우연(禹淵)의 서녀였다. 그의 아버지 정운경(鄭云敬)은 수령 재임 시의 선정으로 ‘고려사’ 열전 양리(良吏)조에 등재되고 형부상서(刑部尙書)까지 올랐으나, 정도전은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여러 차례 곤란을 겪었다.

자부심 강한 庶女의 아들

정운경이 이색(李穡)의 부친 이곡(李穀)과 학우여서 정도전은 이색의 문하가 되었다. 이색의 문하는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이존오(李存吾) 등 문사들이 몰렸던 당대 최고의 학벌이었으나 정도전은 출신 배경 때문에 뒤에 대간(臺諫)의 고신(告身·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을 얻지 못하는 곤경에 처했고, 이 때문에 우현보 집안과는 시종 심각한 갈등관계에 있었다.

정도전은 공민왕 11년(1362) 진사시에 합격해 충주사록(忠州司錄)·전교주부(典敎注簿) 등의 하급 관직을 역임하다 공민왕 15년(1366)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나자 고향 영주(榮州)로 내려가 학문에 전념했다. 공민왕 19년(1370) 성균관이 중영(重營)되면서 성균 박사에 등용된 그는 이색, 정몽주, 이숭인, 이존오 등과 강론하면서 성리학자로서 정체성을 확립했다. 그러나 1374년 우왕(禑王)의 즉위와 함께 이인임(李仁任) 일파가 집권하면서 그는 시련을 겪는다. 이인임 일파의 친원(親元) 외교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원명 교체기의 동아시아는 명나라가 뜨는 해였다. 그러나 집권 권문세족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친원 정책을 고수하려 했다. 우왕 1년(1375) 권신 이인임·경복흥 등이 정도전에게 북원(北元)에서 보낸 사신을 맞이하라고 명하자 그는 “선왕(先王·공민왕)께서 계책을 결정하여 명나라를 섬겼으니, 지금 원나라 사자를 맞이함은 옳지 못하다”라며 거부했다. 그의 이런 곧은 자세는 권신들과 마찰을 일으켜 전라도 나주목 관할의 천민 마을인 거평부곡으로 유배되는 신세가 되었다.

3년간 귀양살이 끝에 풀려난 그는 한양 삼각산 밑에 초막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으나 한 권문세족이 초막을 헐어버렸고, 부평으로 옮겼으나 왕씨 성의 권문세족이 다시 집을 헐어버려 김포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웅지를 펼치기는커녕 한 몸 편히 누울 곳도 없는 고단한 신세가 된 그는 이리저리 유랑하다가 우왕 9년(1383) 함경도 함주(咸州)로 이성계를 찾아간다. 유배형에 처해진 지 9년 만의 일이었다.

조선조 500년 지배한 정도전, 그 ‘정신’ 닮겠다고?

경기도 평택 문헌사

그는 유배생활 동안 ‘심문천답(心問天答)’과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를 지었다. 이 저서들은 그가 유배생활 중에도 성리학 사회의 실현을 꿈꾸며 준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데, 1383년 그가 스스로 몸을 일으켜 머나먼 이성계의 군막까지 찾아간 것은 이런 사회를 실현할 무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가 이성계에게 “이 군사를 가지고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말하자 이성계는 “무엇을 이름인가?”라고 묻는다. 정도전은 “왜구(倭寇)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라고 딴청을 피웠다. 그의 ‘무슨 일’은 왜구 토벌 이상의 거사였고, 모른 체했지만 이성계도 이를 짐작하고 있었다.

무사와 손잡고 혁명적 토지개혁

성리학자 정도전과 신흥 무장 이성계라는 서로 다른 길을 걷던 두 사람은 이 만남을 계기로 하나가 되었다. 미래 사회에 대한 비전과 전략을 지닌 사상가와 그 사상을 현실화할 무력을 가진 무사가 한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 것이다. 이 만남은 실로 500년 고려 왕업을 목적(牧笛)에 부칠 태풍의 눈이었다.

이성계의 천거로 벼슬길에 나선 정도전은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실권을 잡으면서 밀직부사로 승진해 실력자가 되면서 개혁에 나섰다. 당시 고려 사회의 가장 큰 과제는 권문세족의 횡포로 파탄에 이른 농민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소수의 권문세족들은 산천을 경계로 삼는 대농장(大農莊)을 소유한 반면, 대다수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유랑하거나 노비로 전락하는 사회 해체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가장 절실한 것이 바로 전제(田制)개혁이었는데, 이성계와 손을 잡은 정도전은 전제개혁 추진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는 공양왕에게 이렇게 건의한다.

“부유한 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집니다. 심지어 스스로 살아갈 방도가 없어서 땅을 버리고 유랑하다 종국에는 도적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오호라, 그 폐단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그들이 사는 곳에 가셔서 친히 그 광경을 보시고 감연히 전제개혁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십시오.”[정도전,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부전(賦典)]

조선조 500년 지배한 정도전, 그 ‘정신’ 닮겠다고?

정도전과 단양에 있는 도담삼봉(島潭三峯)관계를 설명하는 서울대 한영우(韓永愚)교수.

정도전은 신흥사대부 조준(趙浚)과 손잡고 조민수 등 구세력을 제거한 뒤 공양왕 3년(1391) 혁명적 전제개혁안인 과전법을 통과시켰다. 그는 원래 모든 농민에게 농토를 분배하는 계구수전(計口授田) 방식의 전제개혁을 구상했으나 권문세족 등 구세력의 반대 때문에 직역(職役)이 있는 자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것으로 절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도전이 “고려조의 문란했던 전제에 비하면 어찌 몇만 배나 낫지 않겠는가”라고 말한 것처럼 과거의 토지제도에 비하면 혁명적인 개혁이었다. 실로 500년 왕업의 고려가 멸망했음에도 농민 봉기가 전무하다시피 했던 것은 과전법이 농민들에게 실제적인 이득을 안겼기 때문이다.

또한 그해에 고려는 5군 제도를 3군 제도로 전환하면서 삼군 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만들었는데 이성계가 도총제사, 정도전과 조준이 각각 우군총제사, 좌군총제사를 차지해 역성혁명파가 고려의 군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듬해 정도전은 새 나라 개창에 반대하던 이색·우현보 등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경상도 봉화(奉化)로 유배되었으며,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 중에 낙마한 것을 계기로 정몽주·김진양(金震陽) 등의 탄핵을 받아 예천의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조준·남은(南誾) 등 다른 역성혁명파도 모두 유배되어 전세가 뒤집힐 위기에 처했다.

조선조 500년 지배한 정도전, 그 ‘정신’ 닮겠다고?

정도전 숭덕비

이때 이방원이 던진 정몽주 격살(擊殺)의 승부수가 성공하면서 같은 해(1392) 7월 정도전은 조준·남은 등 50여명의 도평의사사 재추(宰樞)들과 함께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는 데 성공했다. 정도전으로서는 고려에 대한 충역(忠逆)의 관점을 넘어 평생을 추구해왔던 개혁의 대권을 잡은 것이었다.

그에게는 새 왕조 조선의 기틀을 잡는 임무가 주어졌다. 개국 일등공신에다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등 수많은 문무 관직을 한 손에 거머쥔 그는 국왕에 버금가는 최고 실세였다. 그가 태조 3년(1394) 이성계에게 지어 올린 ‘조선경국전’은 이후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모본(模本)으로서 500년 동안 조선인의 법률의식을 지배했다. 태조 4년에는 ‘감사요약(監司要約)’을 지어 전라도 관찰사 이무(李茂)에게 주어 지방행정의 기틀을 잡게 했고, 같은 해 ‘경제문감(經濟文鑑)’도 저술했다. 과거에서 미래의 나아갈 방향을 찾기 위해 정총과 함께 ‘고려사’ 37권을 편찬하기도 했다.

계룡산 신도안을 주장하는 세력에 맞서 서울 인왕산(仁王山)을 주산(主山)으로 하는 천도(遷都)를 관철시킨 인물도 정도전이었다. 도성 한양은 사실상 그의 작품으로 그는 궁전과 궁문, 도성문, 도성 내외 49방(坊)의 이름과 신도팔경시(新都八景詩)를 지을 정도로 서울 건설에 큰 자부심을 가졌다.

요동정벌 계획한 진취적 정치가

그는 친명 정책을 주장하다 귀양 갔으며, 조선 개창 해에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나 친명 사대주의자는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친원이냐 친명이냐가 아니라 어느 것이 국익에 부합하느냐였다. 사대주의는커녕 고구려 이래 민족의 숙원인 요동수복에 전력을 기울인 진취적 민족주의자였다. 판의흥삼군부사로서 군권을 장악한 그는 조선 개국 과정에서 사병화한 군대를 단계적으로 공적 군대로 편재시키는 국방개혁을 단행했다. 진법(陳法) 강무도(講武圖) 등을 만들어 군사들을 훈련시켰는데, 개국 직후부터 추진된 이런 국방개혁의 과녁은 요동수복이었다.

태조의 내락과 남은·심효생(沈孝生) 등과의 협조 속에 치밀하게 진행된 요동수복 운동은 이를 간파한 명나라를 긴장시켰다. 당황한 명나라는 조선이 요동에 사람을 파견해 변장(邊將)을 유인하고 여진족을 끌어들이려 한 사실을 문제 삼다가, 태조 4년 조선에서 보낸 표전문이 무례하다는 트집을 잡아 그 기초자로 지목한 정도전의 압송을 요구했다. 그 속셈은 요동수복 운동의 주모자인 ‘조선의 화근(禍根)’ 정도전을 제거하는 데 있었다.

정도전은 이에 굴하지 않고 요동수복 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요동정벌 운동은 공민왕 때부터의 숙원이었다. 그는 비록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개창했으나 전 왕조의 모든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요동수복 운동에서 드러나듯이 전 왕조의 진취적 기상을 계승해 고토 회복을 추진했다. 백전불패의 용장 이성계와 전략가 정도전이 손을 잡고 요동정벌에 나섰다면 내키지 않는 싸움터에 나가야 했던 과거 이성계·조민수의 요동정벌군과는 상황이 달랐을 것이고, 만주를 되찾을 가능성이 높았다. 명나라가 조선군의 움직임에 크게 당황하며 우려했던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정도전에게 권력이 집중된 것에 불만을 느낀 세력은 요동정벌로 명나라와 긴장이 높아진 것을 정도전 제거의 계기로 이용했다. 신의왕후 강씨 소생의 방석(方碩)을 세자로 책봉한 것에 불만을 품은 태조의 5남 방원에 의해 정도전은 1398년 9월 제거되고 말았다. 태종도 나름의 정당성은 있겠지만 영토 문제에 국한할 때 이는 우리 역사가 반도에 갇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조선조 500년 지배한 정도전, 그 ‘정신’ 닮겠다고?

충북 단양 정도전의 사당인 문헌사(文憲祠)에 보관돼 있는 `삼봉집(三峯集)`의 목판.

정도전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저술한 ‘불씨잡변(佛氏雜辨)’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우리는 지(知)와 행(行)을 말하고, 저들은 오(悟)와 수(修)를 말한다. 우리의 지는 만물의 이치가 내 마음에 갖추어 있음을 아는 것이요, 저들의 오는 이 마음이 본래 텅 비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의 행은 만물의 이치를 따라 행하여 잘못되거나 빠뜨림이 없는 것이요, 저들의 수는 만물을 끊어버려 내 마음에 누(累)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위의 글에서 ‘우리’는 유가(儒家)를 뜻하고 ‘저들’은 불가(佛家)를 뜻하는데, 정도전이 불교를 강하게 비판한 이유는 그것이 고려 지배층의 이념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불교라는 지배이념을 성리학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역사상 전무후무한 불교 비판서를 쓴 것이다. ‘불씨잡변’에 대해 홍이섭 교수는 “주자학파의 불씨 비판의 설을 수용하여 활용하고 있음은 당시로는 물론 장관(壯觀)이며, 이러한 비판은 구 귀족세력에 대결코자 하는 정신으로 한 시대를 도인(導引)할 뿐만 아니라… 정도전의 방법과 정신이 그대로 습용(襲用)되어 그의 정신은 조선 근세사회를 뒤덮어 왔다”(홍이섭, ‘정도전의 주자학적 정치이념’)라고 평했다.

이방원은 비록 정도전은 제거했으나 그 자식들을 등용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정도전의 사상만큼은 조선의 이념으로 계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몸은 비록 죽었지만 정신은 조선조 500년 동안 살아 숨쉬었던 것이다.

그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요즈음 다시 정도전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세종이나 정조를 후계체제 수립에 실패한 정치가로 평가하면서 새삼 정도전에 주목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그러나 정조 이야기가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정도전의 무엇이 노무현 대통령의 의중과 맞아떨어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몸은 비록 죽었어도 체제는 계승됐던 부분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정도전의 어떤 부분이 노 대통령의 현재의 정치행위와 접목되는지는 알 수 없다.

정도전은 비록 역적으로 몰려 죽었지만 세조 때 편찬된 ‘삼봉집’ 후서(後序)에서 신숙주가 “선생은 손수 일곡(日 ·태조 이성계를 보필함)을 이끌어 온 누리를 밝혀 우리 동방의 억조창생을 건지셨다”라고 쓴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를 살아남게 한 것은 누구도 가릴 수 없었던 공(功)이었다. 과전법으로 농민 생활을 향상시켰고, ‘불씨잡변’으로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만들었으며, ‘조선경국전’으로 조선의 법률적 기초를 쌓았고, 요동정벌로 고토 회복을 꾀했던 정도전은 신숙주의 평가대로 “당시에 영웅호걸이 일시에 일어나 구름이 용을 따르듯 했으나 선생과 더불어 견줄 자가 없었다.” 한반도 북부를 영토 조항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반(反)역사적 헌법개정론까지 거리낌없이 등장하는 요즘 요동수복을 꿈꾸었던 정도전 같은 진취적 정치가의 등장을 바라는 것이 필자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주간동아 2006.01.31 521호 (p84~87)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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