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9

2006.01.17

‘시스템’은 없고 ‘코드’만 있다

1·2 개각으로 보은·오기 인사 절정 … 측근 인물 자리만 바꾸는 ‘회전문 인사’도 특징

  •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입력2006-01-11 11: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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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중하고 합리적인 성품으로 실용적인 유연성을 가지고 있으며 풍부한 노사 갈등의 조정과 중재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조정3비서관의 직무를 잘 수행해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2005년 8월12일 김만수 대통령 대변인의 브리핑 내용이다. 공석 중이던 대통령 사회조정3비서관에 김경협 동북아평화연대 기획위원을 내정한다고 발표하면서 김 비서관의 임명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 것.

    그러나 당시 열린우리당 쪽에서는 김 비서관의 임명 배경을 두고 다른 해석이 나왔다. 이상수 노동부 장관 내정자가 그해 10월26일로 예정된 부천 원미갑 국회의원 재선거 출마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 차원에서 역시 이 지역 재선거 출마를 위해 열심히 뛰고 있던 김 비서관의 ‘청와대행’을 주선했다는 것이다. 김 비서관은 1987년 부천지역 노동운동에 투신한 이후 이 지역에서 상당한 기반을 쌓아왔고, 2004년 총선 당시 당내 예비경선에서 2위를 하기도 했다.

    물론 김 비서관이나 이 장관 내정자 측에서는 이런 해석을 일축한다. 그러나 당의 한 관계자는 “당내에서는 김 비서관의 ‘청와대행’을 두고 ‘역시 이상수’라는 소리가 나왔다”면서 “노무현 대통령은 재선거에서 낙선한 그를 1월2일 개각에서 노동부 장관에 발탁함으로써 마음의 빚을 확실히 갚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 장관 내정자의 입각에 대해 ‘보은 인사’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장관 내정자는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 캠프의 불법 대선자금 모금을 주도한 혐의로 사법처리됐지만 지난해 8월 사면복권됐다.

    여당 의견도 ‘모르쇠’ … 독선과 오만 빗댄 ‘獨傲 선생’ 아호 얻어



    1 ·2 개각을 계기로 노무현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이 다시 도마에 오르고 있다. 정세균 당 의장 겸 원내대표의 산업자원부 장관 ‘징발’에서 보이는 여당 무시, 여당의 반대 여론에 ‘모르쇠’로 일관한 유시민 의원의 보건복지부 장관 내정자 밀어붙이기, 이상수 노동부 장관 내정자에 대한 ‘보은 인사’, 이종석 통일부 장관 기용에서 보이는 인재 풀 한계 등 노 대통령 식 ‘내 맘대로’ 인사의 종합판이라는 혹평이 나올 정도다. 한나라당 이계진 대변인은 3일 언론 브리핑을 통해 노 대통령이 이번 개각에서 독선과 오만을 다시 보여주었다면서 ‘독오(獨傲) 선생’이라는 아호를 붙였다.

    과거와 다른 점은 이번에는 야당뿐 아니라 여당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비등하고 있다는 사실. 열린우리당의 한 초선 의원은 “1월2일 개각에 대한 당내 비판은 언론 등 외부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이라고 전했다.

    사실 개각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 그럼에도 노 대통령의 인사에 대해 여당 내에서조차 반발이 제기되고 혹평을 하고 있는 현실은 아이러니다. 노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 비서실을 벤치마킹해 대통령 비서실 내에 인사보좌관(현 인사수석)을 두는 등 취임 초기부터 인사 시스템 확립을 위해 고심해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인사수석은 과거 민정수석이 함께 담당하던 인사 추천과 검증 기능 가운데 인사 추천 기능을 담당하도록 했다.

    정권 초기 노 대통령의 시스템 인사는 나름대로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도 있다. 과거 정권과 달리 정권 실세가 정무직 인사에 개입할 수 있는 소지를 없앤 것만으로도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는 것. 2003년 조각 때 국정 경험이 있는 관료 출신이 중용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시스템 인사의 작동 결과라는 평가를 받을 만했다.

    ‘시스템’은 없고 ‘코드’만 있다
    그러나 2004년 ‘탄핵 사태’와 열린우리당의 4·15 총선 승리 이후엔 시스템 인사가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여당 내 대권주자들의 경력 관리를 위한 입각, 4·15 총선 낙선자 배려 등 정치적 요소가 인사에 개입되면서 인사 추천 및 검증 시스템이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

    인사 시스템에 구멍이 뚫린 대표적 사례는 2005년 1월 이기준 전 서울대 총장의 교육부총리 발탁. 이 부총리는 ‘부동산 명의신탁’, 큰아들의 ‘대학 부정입학’ 의혹 등이 불거지면서 57시간의 단명에 그쳤다. 당시 여당에서도 “설령 대통령의 추천이라고 해도 이를 다시 검증해보는 것이 인사 시스템의 본래 취지인데, ‘실세 총리’로 불리는 이해찬 총리와 김우식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과의 인연 때문에 검증을 소홀히 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4·15 총선 낙선자를 배려하는 과정에서는 정부 산하기관장 인사 시스템이 무력화되기 시작했다. 산하기관장 인사는 기관장 추천위원회를 구성해 공모하도록 시스템은 갖춰져 있었지만 공모 때마다 ‘사전 내정설’이 흘러나왔다. 심지어 사전 내정된 인사가 공모 결과 1등이 되지 못하면 아예 공모 자체를 없었던 일로 해버리기도 했다. “공모라는 형식을 빌려 눈 가리고 아웅 하지 말고 차라리 대통령이 임명하는 게 낫다”는 비판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지역 편중도 도마에 … 부산·경남 출신 인사 중용 현상 뚜렷

    지난해 가을 한국학술진흥재단 이사장직에 응모했던 한 인사는 “산하기관장 공모가 있을 때마다 수천 표씩 떨어져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뒤늦게 자신이 들러리를 섰다는 사실을 깨달은 응모자들이 정권 비판에 나서기 때문”이라는 것. 당시 공모에는 대학 총장급 인사 등 수십명이 응모해 후보자 2명이 청와대에 추천됐지만 두 사람 모두 낙점을 받지 못했다. 결국 재공모를 통해 지난해 말 허상만 전 농림부 장관이 이사장에 임명됐다.

    청와대 참모진에 대한 ‘회전문 인사’도 비판 대상이다. 노 대통령 측근 인사들이 내부 자리를 돌아가면서 맡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 비서관급 인사에서 대통령 국정상황실장에 이호철 대통령 제도개선비서관이 다시 앉았는데, 그는 현 정권 출범 후 대통령 민정비서관을 하던 ‘부산 386’의 맏형이다. 당시 인사에서는 참여기획→정무기획→의전→국정상황→의전비서관으로 빙빙 돈 인물도 있다.

    이에 대해 노 대통령 주변에서는 노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을 반영한 것이라고 변명한다. 노 대통령은 한 번 자리를 주어 검증한 뒤 거기에서 통과된 사람들을 계속 중용하다 보니 ‘회전문 인사’ 형식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노 대통령의 인재 풀이 좁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지난해부터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가 부산·경남 출신 인사들의 중용이다. 특히 지난해 7월부터 지난해 말까지 노 대통령이 단행한 고위급 인사 24명 중 41%인 10명이 이 지역 출신 인사였다. 2003년 3월 조각 당시 장·차관급 인사 60명 가운데 10명이 부산·경남 출신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늘어난 셈이다.

    ‘시스템 인사’를 강조하는 노 대통령이 1·2 개각에서 ‘오기 인사’ ‘내 맘대로 인사’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여당을 대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을 보면 역시 ‘인사가 만사’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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