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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봉이 만난 영화, 영화인

변신 또 변신 … 스크린의 팔색조

‘태양은 없다’‘젊은 남자’의 이정재

변신 또 변신 … 스크린의 팔색조

변신 또 변신 … 스크린의 팔색조
나는 그를 볼 때마다 건강한 사슴을 떠올린다. 기름기 없는 그의 얼굴은 언제나 맑다. 나처럼 배가 나오고 얼굴에 기름이 번질거리는 사람은 심한 콤플렉스를 느끼기 딱 좋다. ‘태양은 없다’ 시절만 해도 나는 그가 도심의 옥상에 웅크리고 있는 승냥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를 짐승에 비유한다고 해서, 그가 짐승 같은 사람이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그러면 승냥이에서 사슴으로 신분 상승한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할지 모르지만, 그것보다는 도시적 감성으로 무장한 신세대 이미지에서 벗어났다는 뜻으로 이해해달라.

우리는 자주 부딪친다. 엘리베이터에서, 지하 주차장에서, 하루에 두세 번 스칠 때도 있다. 같은 아파트, 같은 동에 살기 때문이다. 그는 19층, 나는 17층에 산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내부수리를 하기 위해서 주민들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나는 19층에 가서 벨을 누르다가 문 바깥에 있는 커다란 패널을 보았다. 이정재의 사진과 호랑이의 사진이 반반씩 들어 있는 패널이었다. 그것을 보니까 그의 모습이 호랑이를 닮은 것도 같았다. 아마 어떤 팬이 선물하기 위해 집을 찾았다가 사람이 없어서 문 앞에 놓고 간 것이리라. 혹은 다른 사연이 있는 물건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집 근처에 있는 헬스클럽에서도 마주친다. 나는 시속 9km의 속도로 1시간 동안 러닝머신 위에서 달린다. 그리고 30분 동안 간단한 웨이트 트레이닝 기구로 상체와 하체 운동을 번갈아 한다. 내가 가지 않는 지역은 바벨이 놓여 있는 곳이다. 미스터 코리아 나갈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울퉁불퉁 근육을 만드는 것보다는 단단한 몸을 만드는 것이 더 좋다.

어느 날 물 마시기 위해 그쪽으로 어슬렁거리며 다가갔다가 그를 만났다. 그는 사람들이 없는 외진 곳에서 바벨을 들고 있었다. ‘젊은 남자’나 ‘태양은 없다’를 본 사람들이라면 그의 단단한 몸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다시 또 몸을 만들기 시작했다. 11월1일부터 촬영에 들어가는 곽경택 감독의 ‘태풍’ 때문이다.

‘태풍’은 제작비 100억원이 넘는 대작이다. ‘친구’로 한국 영화 흥행사를 다시 쓴 곽감독의 야심작이다. 남과 북 모두에서 버림받은 뒤 한반도를 복수의 대상으로 삼은 바다의 해적에 장동건이, 그의 음모를 저지하려는 군 특수장교 역에 이정재가 캐스팅되었다.



이정재는 ‘모래시계’의 백재희 역으로 대중들과 만났다. ‘귀가시계’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그 드라마를 통해 젊은 여성들에게 검도 배우기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주인공이 이정재다. 말없이 고현정을 지키는 보디가드로서의 그의 이미지는 매우 강렬했지만, 몇 줄 안 되는 대사를 할 때는 이미지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대사의 기본기가 안 되었다는 지적은, 커피숍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TV의 장내 정리를 도맡아 하는 FD를 거쳐 배우로 캐스팅된 그의 성공신화 이력과 함께 사람들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이정재를 두고 그 시절을 떠올릴 수는 없다. 그는 데뷔 초기의 어색함에서 훨씬 벗어나 있다. 그의 오늘은 전적으로 그의 노력 덕분이다. 체계화된 전문 액터스 스쿨이 턱없이 부족한 국내 현실에서, 우연치 않게 뛰어든 배우로서의 삶을 자기 점검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정재는 대학로의 뛰어난 배우들에게 발성훈련과 기초 연기훈련 등을 배우기도 했다. 나는 그가 매우 성실하게 자신을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변신 또 변신 … 스크린의 팔색조

영화 '태양은 없다'

사실 내가 배우로서 그를 처음 발견한 것은 배창호 감독의 ‘젊은 남자’였다. 신은경과 공연한 그 영화에서, 배창호 감독의 연출보다 이정재만 눈에 띄었다. 우리가 낯익게 만날 수 있었던, 사랑에 집착하고 암울한 현실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청춘이 아니라, 신분 상승의 욕망을 위해 빠른 속도로 세계의 표면을 달려가는 쿨한 이미지를 그는 힘 있고 감성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이정재에게 대종상 청룡상 백상예술대상 신인남우상을 안겨준 ‘젊은 남자’는 이전 세대와 확실하게 선을 그은 90년대의 신세대 담론을 가장 훌륭하게 형상화한 영화였고, 이정재는 그 대표선수였다.

탄력 있는 연기로 다양한 캐릭터 소화 … 가는 목소리는 ‘단점’

이정재는 그러나 짧은 기간의 군 입대를 거쳐 복귀 작품인 ‘박대박’ ‘불새’ 등으로 실패를 거듭한다. 이때의 실패는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좋은 자산이었다. 그는 젊은 날에 자신에게 쏟아진 대중들의 스포트라이트가 일시적인 것일 수 있음을, 결국 연기는 잠깐의 화려한 조명 아래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오랜 공력과 정성을 들인 땀으로 승부가 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 이후 그의 선구안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 공이 타석에 들어올 때까지 그는 기다린다. 그리고 쳐야 할 공과 버려야 할 공을 선택한다. ‘정사’ ‘선물’ ‘시월애’로 이어지는 이후 작품 목록만 봐도 확인된다.

정우성과 공연한 김성수 감독의 ‘태양은 없다’는 젊은 날의 그의 대표작이다. 외형적으로는 화려한 정우성에 관심이 갔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이정재의 연기가 훨씬 더 강렬하게 눈에 들어온다. ‘태양은 없다’는 두 명의 쿨 가이를 전면에 포진한 버디 무비다. 이정재의 캐릭터는 순박하고 인간적이며 촌티가 나는 어눌한 정우성에 비해 약삭빠르고 이기적이며 도시적이다. 이정재는 마음에 촬영을 한 뒤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 촬영 장면을 다시 머릿속에서 복기한다. 그리고 오늘 촬영분에서의 모자란 점을 분석하고 다음에 그 신의 앞뒤 연결신을 찍을 때 오늘의 실수나 단점을 가릴 수 있는 연결장치를 만들어서 연기를 한다. 그의 이런 영악스러움이 더 완벽한 연기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정우성이라는 당대 최고의 꽃미남 캐릭터와 부딪힌다는 긴장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결국 이 작품으로 이정재는 청룡상과 영화평론가협회에서 주는 영평상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는 심은하와 두 편의 작품을 함께했다. 박광수 감독의 ‘이재수의 난’과 변혁 감독의 데뷔작 ‘인터뷰’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성공하지 못했고, 유명한 감독들이었던 그들에게서도 크게 배우지 못했다. 그는 이후에 ‘오버 더 레인보우’ ‘오 브라더스’ 등을 했다. 특히 조로증에 걸린 동생에게서 삶의 참맛을 깨우치는 불륜전문 사진사 오상우 역을 맡은 ‘오 브라더스’는 이정재의 탄력 있는 연기가 아니었으면 호소력 있게 전달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배역을 소화해내는 데 훨씬 유연해졌다. 자기발전을 이루고 싶은 그의 욕망은 그에게서 다양한 캐릭터를 이끌어낸다.

지난 10월 ‘오버 더 레인보우’ 홍보차 일본에 간 그는, 한국에서 작품을 개봉할 때마다 찾아오는 일본의 열성 팬에게 자신의 영화가 일본에서 개봉하면 일본을 방문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본에 왔다고 말해서 일본 언론의 대대적인 주목을 받았다. 또 ‘일본 여성처럼 내조를 잘하는 여성이 좋다’고 말해서 ‘정재사마’ 호칭을 듣기도 했다.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지금 배우 김민희와 만나고 있는 중이다. 김민희의 연기도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고 그 이유가 이정재의 조언 때문이라는 호사가들의 입방아가 있지만 이번 인터뷰에서는 무시하기로 한다.

나는 배우로서 그의 가장 큰 단점은 발성이라고 생각한다. 배우는 대사와 몸짓으로 자신이 맡은 역할을 표현한다. 목소리는 배우의 가장 훌륭한 자산 중 하나다. 이정재의 목소리는 개성 있고 호소력 있지만 너무 가늘다. 굵은 저음까지 내려가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폭넓은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게 해준다. 가령 최민식이나 송강호 설경구 등 한국 남자배우 빅3는 이런 신체조건을 갖추고 있다. 발성훈련은 후천적 노력으로도 가능한 것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그에게 했고, 그는 노력한다고 했다.

우리는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마다 언제 술 한잔 하자고 그러지만, 이사 와서 그와 술 마신 적은 없다. 그리고 이제 그는 ‘태풍’ 촬영에 들어갔다. 당분간 그를 만나기 힘들 것이다. ‘태풍’은 2005년 5월까지 찍고, 오랫동안의 후반작업을 거쳐서 2005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할 예정이다. 촬영지가 서울도 아니어서 그를 만나 술 한잔 하는 것은 내년 5월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주간동아 459호 (p6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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