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54

2004.09.30

“용돈? 나를 설득해봐라” 하시던 합리적인 멋쟁이 신사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4-09-23 16: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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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돈? 나를 설득해봐라” 하시던 합리적인 멋쟁이 신사
    옷감에 맞춰 정성스레 고른 브로치, 스카프와 화려한 꽃 모양의 장식은 꿀꿀한 검은 양복 일색의 국회의사당 분위기를 화사하게 만든다. 샛노랗게 물들인 재킷, 순백의 치마, 원색의 소품 등 그의 색상은 과하다 싶을 만큼 또렷하고 또 강렬하다.

    민주당 손봉숙 의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베스트드레서다. 그의 아버지 역시 고향 마을에서 버금가라면 서러워할 ‘멋쟁이 신사’였다고 한다. 칼 같은 바지주름이 찰랑거리는 백구두, 바지와 재킷의 색을 세심하게 배려한 형형색색의 넥타이…. 아버지는 어린 시절 손의원의 가장 큰 자랑거리였다.

    “은행원이었던 아버지는 농촌 마을에서 보기 드물게 펜대를 굴리는 직장을 다닌 데다 늘 멋진 양복 차림이어서 형제들을 으쓱거리게 만들었어요. 베스트드레서로 선정된 것은 아버지의 패션 감각을 물려받은 덕인 것 같습니다. 열심히 하고 있는 의정 활동으로 상을 받아야 하는데….”(웃음)

    하늘 높고 들판 풍성한 가을 한가위마다 아버지는 손의원을 비롯한 형제들에게 새 옷을 한 벌씩 선물했다고 한다. 그런데 선물받은 치마와 블라우스를 입고 마실 나가기가 낯부끄럽고 부담스러웠다고. 시골 마을에서 찾아보기 힘든 세련된 디자인과 요샛말로 쿨한 색감 탓이었다.

    손의원은 명절 때 아버지가 옷 사주던 기억, 집집마다 차례음식 돌리던 추억, 막걸리 심부름 갔다 돌아오는 길에 막걸리 들이켜던 기억이 이젠 아주 오래 전 일처럼 느껴진다 했다. 큰 키에 호리호리한 ‘멋쟁이 부친’은 1969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고향은 경북 영주시다.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영주에서 살았다. 지금은 도농 복합도시로 번성했지만 그가 초·중·고교를 다니던 50년대는 막걸리 심부름 나온 아이가 어느 집에 사는지, 그 집에 세간이 어떤지, 숟가락은 몇 개인지를 알 수 있는 그런 시절이었다.

    “추석 때면 온 동네를 돌며 차례음식을 돌렸거든요. 아버지가 어찌나 꼼꼼하시던지 차례상 차린 음식을 집집마다 하나도 빠지지 않고 똑같은 양으로 나누어 담아야 했어요. 마을이 30~40호 정도 됐는데 모두 도는 데 한 시간쯤 걸린 것 같아요.”

    손의원은 아버지한테서 민주주의의 메커니즘을 배웠다고 말한다. 고등학교 시절의 일이다. 그는 맞건 틀리건 선생님의 말씀은 절대적 권위로 치부되던 시절 교장선생님과 논쟁을 한다.

    “교장선생님, 저희가 생각하는 건….”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이런 호로자슥이….”

    손의원의 아버지는 8남매에게 권위주의적 사고를 가르치지 않았다. 용돈을 달라거나 물건을 사달라고 조를 때도 꼭 “나를 설득하라”고 했단다. 손의원의 주장이 옳아선지(?) 아버지는 늘 ‘설득을 당했다’.

    “내가 말을 잘하는 건 다 아버지 덕”이라며 손의원은 소리 내어 웃는다. 토론을 누구보다 좋아하고 합리적인 논거로 상대를 이끄는 손의원의 능력은 아마도 이때 길러진 것 같다.

    가족은 4·19 혁명 직후 서울로 이사한다. 서울 생활은 지난했다. 대자로 누워 목청껏 노래 부르던 대청마루의 추억도, 더 바랄 게 없던 풍성한 추석도 서울에선 찾기 힘들었다. 바쁘게 살다 보니 옛 기억도 예전 같지 않다.

    “살아 계셨더라면 좋으련만…. 시민운동가로 또 국회의원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데 앞장서온 딸을 아버지가 보셨다면 좋을 텐데,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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