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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남편 살인 ‘가혹한 형벌’

대부분 폭행·욕설 등 지속적 학대 속 범행 … 수사와 재판과정 자포자기로 형량 늘어나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아내의 남편 살인 ‘가혹한 형벌’

아내의 남편 살인 ‘가혹한 형벌’

남편의 가정폭력에 대한 상담 건수는 한 해 8만여건에 달한다.

청주여자교도소 여성 수형자들의 가장 흔한 죄명은 무엇일까. 정답은 살인. 10명 중 4.6명이 살인범이다. 그중에서도 남편을 살해한 경우가 단연 많다. 전체 수형자 531명 중 133명이 남편을 살해했다(2004년 1월8일 기준). 10명 중 3명이 ‘남편을 살해한 아내’인 셈이다. 왜 아내들은 남편을 죽인 걸까.

현재 청주여자교도소에 복역하고 있는 정미선씨(33)는 남편을 살해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사건’이 벌어진 그날, 남편은 술에 취하면 으레 그랬듯이 아이들 앞에서 정씨를 폭행했다. 칼을 들이대며 죽이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정씨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며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그만 범행을 저질렀다.

수형자 66% “매월 1회 이상 폭행당했다”

정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남편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학교를 그만두고 동거를 시작했다. 남편은 알코올 중독에다 여자관계가 복잡했다. 술만 마시면 정씨와 아이들을 폭행하고 살림살이를 부순 뒤 강제로 성관계를 요구했다. 한번은 어쩌다 사귄 남자와 잠깐 가출한 적이 있는데, 이후 남편은 외도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녔다. 폭행과 강제적인 성관계 요구는 더욱 심해졌다. 정씨는 “창피하고 억울했다”며 당시 심경을 털어놓았다.

법무부 용역보고서 ‘여성 살인범의 특성, 범죄 이유, 그리고 재활 가능성’은 여성 살인범들의 범행에 대해 ‘남편의 학대가 살인의 매우 강력한 동기’라고 지적한다. 김영희 교수(충북대 아동복지학과) 연구팀은 2월부터 6개월간 청주여자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110여명의 여성 살인범을 대상으로 심층 면담을 벌인 결과 이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심층 면담에 응한 여성 살인범 대부분은 남편에게서 폭행과 욕설, 협박 등 지속적인 학대에 시달렸다. 설문조사 결과 ‘매월 1회 이상 폭행당했다’는 응답자가 66%, ‘결혼 전에도 폭행에 시달렸다’는 응답자가 25%, 그리고 ‘생활비를 주지 않았다’는 응답자가 41%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A씨의 사연은 다른 여성 살인범들의 그것과 비슷하다.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A씨(61)는 결혼 32년 만에 집을 장만해 새 살림살이를 들여놓은 날 그만 범행을 저질렀다. 남편이 술에 취해 칼로 살림살이를 다 그어놓자 더는 참을 수 없었던 것. A씨의 남편은 30년 넘도록 일주일에 한두 번씩 술에 취해 아내를 폭행하고 살림살이를 부수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지속적인 학대가 주는 고통에 대한 사회적 몰이해로 인해 여성 살인범들이 지나치게 과중한 형량을 언도받는다고 지적한다. 남편의 학대가 살인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범죄 행위에 가려 사법 절차를 통해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다는 것. 10여명의 여성 살인범을 변론한 이명숙 변호사는 “수사기관은 학대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고, 범행 당시 상황에만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아내의 남편 살인 ‘가혹한 형벌’

청주여자교도소 전경. 10명 중 3명이 남편을 살해한 여성 재소자다.

현재 청주여자교도소에 복역하고 있는 남편을 살해한 아내 131명 중 가장 많은 형의 종류는 무기징역으로 10명 중 3명꼴(36명)이다. 유기징역의 평균 형량은 9.4년에 달한다. 이밖에 1명이 사형을 언도받은 상태다.

김영희 교수는 “심리적 탈진, 그리고 죄책감으로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수사와 재판에 응하기 때문에 경찰, 검사, 판사의 질문에 모두 ‘예’라고만 대답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심지어 덤비는 남편에 대항하다 실수로 흉기로 찔렀는데도 조사 과정에서 ‘직접 찔렀다’며 사실과 다르게 응답한 경우도 많다는 것.

애인이 있다면 쉽게 치정에 의한 살인으로 간주돼 형량이 가중되는 경향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연구에 참여한 박광배 교수(충북대 심리학과)는 “애인을 사귀게 된 것 또한 남편 학대로부터 도피하려는 의도인 경우가 많았다”며 “애인이 있다 하더라도 진짜 범행 동기는 치정이 아닌 학대인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아내 정당방위 요건 범위 확대해야”

1993년부터 여성 살인범들을 위한 변론 활동을 펼쳐온 서울여성의전화 정춘숙 부회장은 “남편이 아내를 마구 폭행해 숨지게 하면 과실치사나 폭행치사로 집행유예가 선고되지만 아내가 더는 탈출구를 찾을 수 없어 저지르는 범행은 살인죄로 무겁게 다뤄지고 있다”며 “법의 형평에 맞지 않을 뿐더러 가정폭력의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8월28일 남편을 살해한 뒤 자수한 이모씨(42) 또한 극한 상황에서 범행을 저질렀다. 이씨의 남편은 술에 취하기만 하면 이씨와 아이들을 마구 폭행했고, 심지어 중학교 1학년생인 딸을 성추행해왔다. 이씨는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으나, 남편은 도리어 친정식구들까지 모두 죽이겠다며 협박했다. 남편은 칼을 품고 처가로 찾아간 적도 있다.

그날도 남편은 술에 취해 폭행을 휘두르다 잠이 들었다. 이씨를 면담한 이명숙 변호사는 “이씨는 아이들까지 ‘죽고 싶다’며 괴로워하자 남편에게서 벗어나는 길은 살인뿐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며 절박한 심경을 토로했다”고 전했다.

이에 최일숙 변호사는 “남편 살인 사건의 경우 정당방위 요건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현재 정당방위는 △상대의 위협이 사건 당시 벌어지고 있을 것(현재성) △방어 수준이 위협 수준과 비슷할 것(상당성)을 성립요건으로 삼는다.

그러나 여성 살인범들의 경우 남편이 잠깐 잠든 사이나, 남편에게 폭행당하는 과정에서 범행을 저지르기 때문에 정당방위가 인정되지 않는다. 전자의 경우 현재 급박한 위험이 닥친 상황이 아니며, 후자의 경우 과도한 방어라는 것이다.

그러나 최변호사는 “남편의 학대는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일이었으며, 대부분 아내들은 가출, 설득, 경찰신고 등 갖가지 방법에 실패한 뒤 최후의 수단으로 살인을 택한 것”이라며 “이러한 특성을 고려해 정당방위 요건의 범위를 좀더 확대해 해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이 같은 사건에서 정당방위 판결이 나오고 있다. ‘피학대여성증후군’이라는 심리적 이상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남편이 무기를 들고 접근했을 경우 배심원 판결에서 76%가 무죄를 선고하고 있다.

피학대여성증후군이란 항상 긴박한 위험 상태에 놓여 있다고 느끼며, 다른 상황을 생각할 능력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김교수는 “인터뷰한 여성 살인범들 가운데 다수는 여전히 피학대여성증후군을 보였다”고 말한다. 남편이 사망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폭행당했던 기억이 떠오르고, 남편에게 매 맞는 꿈을 꾼 뒤 온몸이 아프다고 느끼며, 평소에도 맞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남편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만 봐도 불안해지는 등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에 김교수는 “미국은 여성살인범 재판에서 정신과 전문의, 상담 전문가, 가정폭력 전문가 등의 견해를 증언으로 채택하게 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전문가 증언을 채택하지 않거나 여성계가 적극 개입하지 않는다면 여성살인범에 대한 과중한 형량 부과는 계속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박교수는 “죄 값은 치러야 하는 것이지만, 재판 과정에서 범행동기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충고했다.



주간동아 454호 (p86~88)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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