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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 칼럼

차이를 인정할 수만 있다면 …

  • 양운덕/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철학모임 ‘필로소피아’ 소장

차이를 인정할 수만 있다면 …

차이를 인정할 수만 있다면 …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문화적 코드는 다양성이다. 다양한 차이와 이질성이 공존하지 않는다면 올바른 자와 정의의 세력이 모든 것을 지배하면서 차이를 없애려 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다양성의 감각을 얼마나 기르고 있을까. 우리 안의 차이와 이질성, 우리와 다른 문화의 이질성에 대해서 얼마나 받아들이고 차이들을 포용하려고 노력하는가(우리는 우리와 다른 처지, 문화, 사고를 지닌 이라크에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으려는 걸까).

1. 내가 좋아하는 것을 줄 것인가, 상대가 원하는 것을 줄 것인가. 체코의 소설가 쿤데라는 ‘불멸’에서 재미있는 예를 든다.

“슈만을 좋아하고 슈베르트를 싫어하는 친구가 있다고 하자. 물론 당신은 슈베르트를 미치게 좋아하고 슈만이라면 질린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 친구의 생일선물로 누구의 음반을 줄 것인가. (…) 물론 슈베르트의 음반이다. 슈만의 것을 선물한다면 당신은 성실하지 못하다고, 곧 그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비속한 욕망에서 그를 기쁘게 하고자 일종의 뇌물을 친구에게 선물한다는 달갑지 않은 인상을 줄 것이다. 어쨌든 당신이 선물을 한다면 그건 애정 때문이고, 당신 자신의 일부를, 당신 마음을 주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당신은 친구에게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선물하고, 그 친구는 당신이 떠난 뒤 음반에 침을 뱉고 두 손가락으로 그것을 집어 휴지통에 던져버릴 것이다.”

나와 다른 사고·문화·처지도 존중해야

2. 이솝 우화에서 여우와 두루미가 서로를 초대해서 약 올리는 장면을 보자. 한 번은 여우가 두루미를 저녁식사에 초대하고선, 맛있는 음식을 잔뜩 차려서 넓적한 그릇에 내온다. 아무리 배가 고프고 음식냄새에 취했다 한들 두루미는 긴 부리 때문에 먹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몇 번 시도하다가 음식을 물리치고 만다.



1라운드가 끝났으니 이제 두루미가 여우를 초대할 것이다. 아마 2라운드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역을 바꿔서 연출되리라. 여우의 웃음이 낭패감으로 바뀌고, 두루미는 복수의 쾌감을 느낄 것이다.

우리끼리 새로운 만남을 마련해보자. 여우가 자기 잘못을 반성하고 다시 두루미를 초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두루미를 배려한 그릇을 쓰면 된다. 여우는 여우 그릇에, 두루미는 두루미 그릇에…. 서로 즐겁고 맛있게 음식을 먹으면서 우의를 다질 수 있으리라.

이처럼 여우와 두루미를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각자에게 맞는’ 그릇이 있으면 충분하다. 그것은 ‘하나의’ 같은 그릇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개의 그릇이다. 그렇다면 여우가 자기의 그릇을 두루미에게 강요하는 것이나 두루미가 여우에게 자기 방식을 강요하는 것은 모두 하나의 그릇으로 모든 그릇을 대표하려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3. 생각과 양식이 다른 두 사람이 마주 보면서 자기와 남의 ‘차이’를 ‘잘잘못’으로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자기를 앞세우고 남을 평가절하하면서 자기의 옳음을 주장한다. 차이를 상하의 위계로 만들어서 우월한 자기가 열등한 남을 가르치고 그를 바르게 고치려고 한다.

녹차가 아니라 커피를 마셔야 하고, 예쁘고 참한 여성만 애인 자격이 있고, 공부 못하는 녀석은 모자라고, 이 노래를 좋아하지 않으면 우리 편이 될 수 없고, 이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위험하거나 잘못된 세계관을 지닌 자고, 우리 민족이 가장 우수한 민족이고, 세계는 이 방향으로만 가야 한다고 잘난 체한다.

차이를 무시하고, 차이가 지닌 ‘울퉁불퉁해서 재미있고 생산적인 측면’을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은 차이를 없애면 정의롭고 살기 좋은 세계가 마련될 수 있다고 보는가. 상이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에서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어떤 보편적 기준을 모두에게 적용할 것인가. 기준 없는 이질적인 공존을 인정할 것인가. 한 문화와 다른 문화가 맞서서 서로 자기의 기준을 상대에게 강요하면 어떻게 되는가.

(좀 엉뚱한 ‘통일지향’ 문화는 서로 의견이 다르면, 이 차이를 결함으로 본다. “저것은 잘못이야, 바람직하지 않아, 아직 멀었어, 정신 차려!” 자기의 기준만이 완전하다고 하니 어쩌겠는가. 그런데 차이를 인정하면 서로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고, 상대를 지배하지 않고, 진리와 정의의 이름으로 상대를 짓누르지 않는 길을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서로 다른 사고와 기준을 가진 이들이 공존하는 길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순히 개인적인 취향에 관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적 정치·경제·문화의 바탕을 마련하는 길이자 다양한 문화가 평화 공존하는 지구촌을 지향하는 것이기에 중요하다.



주간동아 442호 (p96~96)

양운덕/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철학모임 ‘필로소피아’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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