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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로 간 ‘영광의 가위손’

영화 ‘효자동 이발사’ 영향 관심 고조 … 취임 전 인연이 계속 ‘긍지 크지만 돈벌이는 별로’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청와대로 간 ‘영광의 가위손’

청와대로 간 ‘영광의 가위손’

영화 \'효자동 이발사\'의 한 장면.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슬펐습니다.”

3월13일 청와대에 들어간 정주영씨(57)는 노무현 대통령 앞에서조차 어수선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불과 하루 전 ‘대통령 노무현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는 모습을 TV로 지켜본 터였다. 그는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군대 시절 얘기를 농담으로 던지는 노대통령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정씨는 5월14일 오전엔 초조한 마음으로 청와대에서 헌법재판소의 탄핵 선고 공판을 TV로 지켜봤다. 입이 바싹 타 들어갈 정도였다고 한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기각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마음을 놓지 못했다고 한다. 헌법재판소가 기각을 선고하자마자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튿날 오랜만에 국민 앞에 나서 담화문을 발표할 노대통령의 머리칼을 다듬었다. 노대통령은 직무 복귀 직후 머리 손질부터 한 셈이다.

퇴임 후에도 자택 방문해 머리 손질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선고 공판을 대통령과 함께 지켜본 정씨는 ‘청와대 이발사’다. 영화 ‘효자동 이발사’ 개봉을 계기로 정씨와 같은 대통령 이발사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효자동 이발사’는 부조리한 정치적 사건으로 얼룩졌던 한국의 1960~70년대를 한 평범하고 소심한 이발사의 눈을 통해 그려낸 영화.



‘효자동 이발사’의 주인공 성한모(송강호 분)는 권력이나 정치와 담을 쌓고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이다. 권력에 머리를 조아리는 법밖에 배우지 못한 성한모는 우연히 ‘각하’의 이발사가 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집단을 마주하고, 그 틈바구니에서 어처구니없이 아들이 희생되는 불우한 삶을 살아간다.

그렇다면 영화 속 성한모의 삶과 실제 대통령 이발사들의 삶은 얼마나 닮았을까.

픽션이 실제와 같을 수는 없는 노릇. 대통령의 이발사들은 대체로 영화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부산에서 개봉 첫날(5월5일) 영화를 봤다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발사 박수웅씨(67)는 “불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실과 터무니없이 다르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평범한 소시민이었던 박씨는 육영수 여사에 의해 발탁돼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 15년간 대통령의 머리칼을 다듬었다.

“나를 가장 화나게 한 건 15년 동안 모신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묘사예요. 영화 속 이야기를 사람들이 사실로 오해하지 않겠습니까. 박대통령은 특권 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유달리 싫어했어요. 이발사를 그런 식으로 다루지도 않았습니다.”

박씨는 영화에서처럼 ‘우연’이 아니라 대통령의 이발사가 되는 것을 간절하게 소망했다고 한다. 군 제대 뒤 청와대 근처 효자이발관에 취직하면서 ‘대통령의 이발사’가 되겠다고 마음먹는다. 양복 입은 정장 차림의 남자가 찾아와 “급히 이발할 사람이 있다”면서 청와대로 데려가던 날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청와대로 간 ‘영광의 가위손’

안정근씨

청와대로 간 ‘영광의 가위손’

김남식씨



청와대로 간 ‘영광의 가위손’

대통령들은 보통 보름에 한 번씩 머리칼을 자르지만 행사가 있을 때는 따로 머리 모양을 매만진다.

청와대를 떠난 뒤 박씨는 ‘부산항 보물사건’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1980년대 보물찾기에 나섰다가 적지 않은 재산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부산에 일제가 약탈한 보물이 은닉돼 있다”는 박씨의 주장은 “박 전 대통령 시절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권세를 누리던 청와대 이발사가 정보기관에서 확인한 내용”이라는 소문으로 전해졌고, 부산 문현동에선 지금도 다큐멘터리 작가 정충제씨(55)가 박씨의 주장을 근거로 수조원대에 이른다는 보물을 찾고 있다.

최규하 전 대통령의 이발사인 김남식씨(60·G호텔 이용원) 역시 개봉 첫날 영화를 관람했다고 한다. 김씨는 노태우 전 대통령 이발사였던 안정근씨(46·N호텔 이용원)와 함께 영화관을 찾았다. 김씨는 “영화가 실제와 다른 부분이 너무 많았다. 기대를 많이 하고 극장을 찾았는데 아쉬움이 너무 컸다”고 했다. 안씨 역시 “침체된 업계에 활력을 불어넣을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이발사들을 지나치게 폄하해 그린 것 같다”고 평했다.

청와대 이발사가 되기 전 김씨는 최 전 대통령이 국무총리 시절 머리칼을 잘랐던 정부종합청사 국무위원 이발소의 책임자였다. 지금도 서울 마포구 서교동 최 전 대통령 자택을 찾아 ‘각하’의 머리 모양을 다듬는다. 20년 넘게 최 전 대통령을 모시고 있는 셈이다. 김씨의 가장 큰 걱정은 최 전 대통령의 건강. 계단을 오르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최 전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 절로 울적해진다고. 노 전 대통령도 김씨의 단골손님이라고 한다. 지병으로 병원을 다니는 안씨가 노 전 대통령 수발을 양보해 맡게 됐다고 한다.

대통령의 이발사가 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최 전 대통령과 김씨의 경우처럼 대통령 취임 이전부터 관계를 맺은 경우와 대통령 취임 이후에 까다로운 선발 과정을 거쳐 청와대 이발사가 된 경우로 나뉜다.

용안(?)에 상처 낼까 … 얼굴 면도는 피해

흰 머리칼 휘날리던 ‘장발의 김영삼’을 앞머리를 올려 이마를 훤하게 드러낸 헤어스타일의 ‘대통령 김영삼’으로 바꾼 이승우씨(53·자영업)는 89년부터 롯데호텔 B이용원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머리칼을 손질하다 대통령의 이발사가 됐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발사 정주영씨도 200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 때부터 노대통령의 머리 스타일을 도맡아 다듬다 청와대에 입성한 경우다.

“짧게는 한 달에 한 번, 길게는 서너 달에 한 번씩 저희 이발소를 찾아오셨어요. 그러다 민주당 경선이 시작되면서 전속 이발사가 되었죠. 제가 깎는 스타일이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정씨)

노 전 대통령의 이발사 안정근씨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발사 박성배씨(44·여의도 C빌딩 이용원)는 세계기능올림픽 이발 부문에 국가대표로 참가한 실력을 디딤돌로 추천을 받아 ‘선발’된 경우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이발사였던 김모씨(56·자영업) 역시 대통령경호실 이발사 가운데 실력이 가장 뛰어나 대통령 이발사로 뽑혔다고 한다.

안씨(노태우 전 대통령)와 박씨(김대중 전 대통령)는 관사 생활을 하며 청와대에 상근한 게 다른 이발사들과 다른 점. 박씨는 평창동 관사, 안씨는 계동 관사에 머물며 국가원수의 머리 모양을 만졌다. 안씨는 “관사에서 청와대로 출퇴근하던 시절이 인생의 최고 황금기였다”고 했고, 박씨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과 김 전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식을 수행했을 때가 삶에서 가장 뿌듯한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대통령의 이발사들은 하나같이 ‘가문의 영광’이라거나 ‘일생의 영예’라며 청와대 이발사 경험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모셨던 대통령에 대한 이발사들의 ‘로열티’는 대단하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대통령의 이발사를 제외한 다른 이발사들은 지금도 모시던 대통령들을 ‘각하’라고 깍듯이 부른다. 안씨의 경우엔 병원 출입과 이발 일이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도 ‘혹시나 노 전 대통령에게 누를 끼칠까’ 싶어 김씨한테 노 전 대통령을 부탁했을 정도다.

대통령 이발사들 사이에선 대통령과 관련한 얘기를 밖으로 내뱉지 않는 게 불문율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발사들은 대통령에 대한 질문엔 “좋은 분” “훌륭한 분”이라는 대답 외엔 말을 매우 아꼈다. 이발사들의 또 다른 불문율은 대통령의 얼굴 면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 ‘용안’에 칼을 대지 않는 나름의 전통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머리카락을 자른 뒤 뒷머리는 면도한다.

이발사들은 “경제적인 면에서 보면 대통령 이발사를 하는 게 오히려 손해였다”고 입을 모았다. 대통령 전담 이발사가 되면 모든 일정을 대통령에게 맞춰야 하기 때문에 다른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

공무원 신분으로 청와대 직원 관사에서 생활하며 날마다 청와대로 출근한 안씨나 일요일도 없이 365일 대기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머리 모양을 손질했던 박씨는 다른 이발사들보다 더 힘들었던 케이스. 박씨는 “대통령의 이발사는 명예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라며 “보람이 컸지만 힘든 일도 많았다”고 토로했다.

청와대에 상주하다시피 했던 박씨와 달리 노대통령의 이발사 정씨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청와대에 들어간다. 과거보다 일의 강도는 떨어지고 ‘복지(?) 수준’은 훨씬 높아진 셈이다.

“노대통령은 머리카락이 센 편인데 혼자서도 드라이를 참 잘하세요. 일주일에 한두 번 모양을 잡아주면 제가 없는 날은 대통령께서 직접 스타일을 만들어내십니다. 짙은 염색과 숱이 많은 걸 싫어하시는데, 이외에는 까다롭지 않은 편이에요. 영광스럽게, 재미있게 일하고 있습니다.”



주간동아 436호 (p32~33)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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