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6

2004.05.27

“한국차 좋아요, 요샌 힘들어요”

인천 율도 중고차 수출단지 바이어 ‘발길’ … 이라크 치안 악화 잘나가던 수출 ‘주춤’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4-05-19 18: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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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차 좋아요, 요샌 힘들어요”

    5만평 규모의 율도 중고자동차 수출단지에서 흥정을 하고 있는 중동계 바이어들과 수출업자들

    5월13일 오전 10시30분께 인천 서구 원창동 율도 중고자동차 수출단지 들머리. 단지로 들어가는 2km 정도 거리의 왕복 2차로에는 구청의 불법 주정차 단속 딱지가 붙은 번호판 없는 차들이 양쪽 1차로씩을 차지한 채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폐차들인가 했더니 모두 엄연한 수출용 자동차들이란다.

    5만여평의 단지 안은 더 장관이었다. 컨테이너로 만든 작은 관리사무실을 지나자 단지는 10여개의 블록으로 나눠져 있고, 그 안에 수출용 중고자동차들이 빽빽이 도열해 있었다. 컨테이너를 사무실로 쓰고 있는 100여개의 중고차 수출업체들도 오토코리아무역, 세경인터내셔널, 탑 비즈니스 등 무역회사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간판을 내걸고 영업하고 있었다.

    내수용 중고차 매매시장에 가면 서로 자신들의 사무실로 안내하려는 ‘삐끼(호객꾼)’들로 심기가 불편한 경우가 많지만 이곳은 누구 하나 옷깃을 잡아끄는 이가 없다. 낯선 이가 와도 무관심하다. 이들의 관심을 끄는 이들은 오직 외국계 바이어들뿐. 특히 중동지역 바이어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오토코리아무역 사무실에 들어가자 대학 3학년 때부터 중고차 수출 업무에 뛰어들었다는 박송희 대표(31)가 요르단 바이어 뮤타즈 에에(40)와 한창 얘기하고 있었다. 아랍어, 영어, 한국어가 뒤섞인 특이한 대화를 처음엔 알아듣기 힘들었다.

    율도 단지 안에서 홍일점 대표인 박씨는 대학 때 영어학원에 다니다 중동 친구를 만났고, 그게 계기가 돼 중고차 수출업계에 뛰어들었다. 영어뿐 아니라 아랍어 실력도 뛰어나 자신이 직접 흥정해서 거래를 성사시키고 있다. 요즘은 주로 요르단 지사에 나가 일한다.



    “어려서부터 모험심이 강한 편이었습니다. 그동안 거친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기계와 함께하는 생활이었지만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제 또래들보다 몇 배는 더 돈을 잘 벌고, 전망도 밝기 때문입니다.”

    5만평에 자동차 빽빽이 도열

    뮤타즈는 한국 업체들과 5년째 거래하고 있는 중견 바이어. 한국 물정에도 밝은 그는 요즘 곧 선적할 ‘물건’들을 고르고 있었다.

    “한국차 좋아요. 에어컨 있어요. 값싸요. 그런데 요새 장사 안 돼요.”

    뮤타즈는 한국에서 중고차를 수입해 주로 이라크 지역에 내다 판다. 그런데 최근 이라크에 반미세력이 득세하면서 치안이 악화되자 미군이 요르단과 이라크 간 고속도로를 폐쇄해 중고차를 내다 팔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영향으로 다른 국내 중고차 수출업체도 똑같은 타격을 입고 있다. 박송희 대표는 “그 여파로 한 달 전부터 요르단 시장에 중고차가 넘쳐나고 있다”며 “차 가격도 동시에 떨어지고 있어 걱정이 많다”고 말했다. 올해 초만 해도 프린스 96년식이 260만원까지 치솟았다가 다시 150만원대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 따라서 박씨는 이라크 상황이 좋아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차 좋아요, 요샌 힘들어요”

    한국차가 좋다고 치켜세우는 요르단 바이어들(위) 선적을 앞둔 중고차들.

    한국 중고차 수출의 견인차는 지난해 이라크 종전이었다. 복구작업이 한창 시작되면서 한국 중고차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국내시장에서 10만원짜리가 이라크로 가면 100만원에 팔렸다. 1000만원짜리 차는 2000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중고차 수출업자들은 “가격이 미쳤다(crazy price)”고 외치며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바이어들이 폐차장에 가서까지 통째로 차를 사와 수리하는 일도 생길 정도였다. 폐차장의 부품 가격도 오랜만에 대목을 만난 것은 물론이었다.

    지난해 중고차 수출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최근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해외로 수출된 중고차는 모두 16만3000대로 전년에 비해 34.6% 늘어났다. 이는 1999년의 두 배 수준으로 중고차 수출 사상 가장 많은 대수다. 반면 중고차의 국내 거래는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초 실적도 좋은 편이다. 중고차 수출업계에 따르면 3월 말 현재 이라크를 포함한 중동에 수출한 중고차 대수는 8만3477대. 이는 지난해 수출 대수의 절반에 이르는 수치다. 인기 품목은 프린스와 와이드봉고, 베스타 등으로 연식이 오래되어도 가격이 크게 떨어지지 않고 있다. 이대엽 태화무역 상무는 “무엇보다 사막 기후에 꼭 필요한 에어컨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미 많은 한국차가 보급돼 각종 부품을 구하기 쉽다는 게 상승작용을 일으켜 수출에 호조를 보이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중고차 수출 경기가 좋아지자 수출업체도 크게 늘어났다. 그런데 자동차를 실어 나르는 무역선이 한정돼 있다 보니 경쟁이 치열해졌고, 서로 자동차를 야적할 수 있는 땅을 차지하느라 혈안이 됐다. 땅을 구하지 못한 업자들은 율도 단지 초입 길가 같은 곳에 무단 정차해둘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것이 이라크의 상황 변화로 갑자기 찬바람을 맞고 있는 것이다.

    “경기가 내리막길로 갈 낌새를 보이자 작은 업체들은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차들을 큰 업체에 떠넘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형업체들은 차를 모아뒀다가 다시 수출길이 열리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이대엽 상무)

    오토코리아무역은 매달 100대 정도를 수출하고 있다. 한국에 직원 13명, 요르단 현지 지사에 10명을 둔 이 회사의 연간 매출 실적은 15억~20억원대. 오토코리아무역은 율도 단지 안에서 조금 큰 편에 속하지만 크고 작은 100여개 회사들이 연간 10억원씩만 벌어들여도 1000억원대에 이른다.

    외화 벌지만 정부 지원책 ‘미흡’

    이 단지가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지만 정부 지원책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단지 안에는 어떤 하수시설이나 수도시설도 없다. 업주들은 건물도 지을 수 없어 컨테이너만 덩그러니 놓여 있고 화장실도 임시용이다 보니 여직원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투덜거린다. 야적장 바닥은 맨땅에 자갈만 깔아둔 상태여서 마른날엔 먼지가 풀풀 날린다. 자동차 기름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토양이 오염된다. 산뜻한 주차시설을 갖추고 고객을 끌어들이는 내수용 중고차 시장과 큰 차이가 난다.

    바이어들도 요르단 현지의 야적장과 비교하면 시설이 너무 형편없다고 불만이다. 자신들이 사갈 차들이 좀더 깨끗한 상태로 보존되기를 바라기 때문. 바이어 알리(26)는 “중고차들이 들어가는 요르단 아카바 항의 경우 왕이 직접 챙길 정도로 시설 등에 신경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부가세를 환급받고 있지만 그것도 수출용이라고 해주는 게 아니라 폐자원 재활용 차원에서 해주고 있는데, 그만큼은 세무조사를 해서 반드시 다시 가져갑니다. 수출용 자동차에 넣는 기름도 몇 백대에 넣다 보면 금액이 만만찮아 큰 부담이 됩니다. 중고차에도 면세용 기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습니다.”(A무역 사장)

    “중고차라 늘 손봐야 할 데가 많고, 선적할 때면 시동 안 걸리는 차들 때문에 수리업체가 필수인데도 단지 안에 수리업체를 허가해주지 않아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합법적으로 수리하려면 외부 업체를 불러와야 하는데 출장비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출장비를 안 물기 위해 차를 몰고 단지 밖으로 나가면 영업 정지 처분을 받습니다.”(S오토 부장)

    “한국차 좋아요, 요샌 힘들어요”

    수출을 기다리고 있는 ‘이동파출소’의 중고차들

    더욱 엉뚱한 일은 인천항에서 수출용 중고 자동차들이 선적되기 전에 오디오, 타이어, 각종 부품 등이 도난당한다는 사실. 이곳은 일반인의 입·출입이 통제되는 곳이기 때문에 업주들은 관리 직원들의 짓으로 의심하고 있지만 뚜렷한 물증이 없어 속앓이만 하고 있다. 바이어 뮤타즈도 “율도에서 체크한 차들이 요르단 항에 들어왔을 때는 뼈다귀만 남은 차도 있다”며 “알리바바와 40인 도둑, 나빠요. 머리 아파요”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한 번 열린 수출길은 큰 변수가 없는 한 당분간 지속되게 마련이다. 기왕에 열린 수출길을 좀더 체계적인 지원으로 넓히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한 업주는 “수출해서 먹고사는 나라인데, 말로만 수출하는 데 애로가 없게 하겠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되는 게 없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마침 지난 3월 인천시는 2006년까지 율도 단지 일대에 대규모 자동차 수출물류단지를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율도 중고차 수출업체들은 이 계획이 실현되기 전에라도 자신들이 영업을 원활히 할 수 있는 지원책이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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