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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자본 유출 ‘눈뜨고 당할 판’

브릿지증권 대주주 BIH, 고배당·건물 매각·무상증자 등 발빼기 수순 ‘투기 본색’?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국내자본 유출 ‘눈뜨고 당할 판’

국내자본 유출 ‘눈뜨고 당할 판’

서울 을지로 브릿지증권 본사와 노조원들이 내건 현수막들

국내자본 유출 ‘눈뜨고 당할 판’
브릿지증권 노조원들은 서울 중구 을지로 브릿지증권 본사에서 두 달째 철야농성을 벌이고 있다. 대주주가 회사의 유보금을 빼먹으려는 것을 막겠다는 게 철야농성의 이유다. 도대체 멀쩡한 상장회사를 사지로 몰고 있다는 대주주는 누구일까.

브릿지증권의 대주주는 영국계 홍콩자본 BIH. BIH는 말레이시아의 조세회피 지역인 라보안에 본사를 둔 투자펀드로 1998년 브릿지증권의 전신인 대유증권을 인수하면서 한국 시장에 첫발을 내디뎠다.

BIH가 철수 준비에 나섰다는 관측이 나오는 가운데 노조의 주장대로 BIH가 회사자본을 ‘빼먹는다’면 회사는 빈껍데기가 되고 개인투자자들도 피해를 입을 수 있다. 노조가 제기하는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국부(國富) 유출.

의혹 사실일 땐 회사 빈껍데기만 남아

1997년 이후 한국에 들어온 외국자본은 크게 둘로 나뉜다. ‘외자유치가 최고 선(善)’이라는 명제 아래 투자자본과 초국적 투기자본이 뒤엉켜 들어온 것. 투기자본은 주로 한국 증시를 공략 대상으로 삼았다. 투기자본과 투자자본을 구분한다는 것은 사실 무의미하다. 하지만 굳이 따진다면 BIH는 투기자본에 가까워 보인다.



브릿지증권에서 일하는 K씨는 외국계 대주주의 행태에 치를 떤다. K씨가 증권사에 들어온 때는 1994년. 입사 초기 K씨의 직장생활은 남부러울 것 없었다. 주식시장의 활황에 힘입어 꽤 두툼한 월급봉투를 받을 수 있었던 것.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가 불어 닥치면서 회사는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그때 나타난 구세주가 BIH의 전신인 KOL이다. 브릿지증권은 리젠트증권과 일은증권의 합병으로 탄생한 회사로, K씨는 일은증권에서 일했다.

BIH는 1998년 대유증권, 99년 경수종금, 2000년 3월 해동화재를 차례로 인수하고 리젠트자산운용을 설립한 뒤, 2000년 11월 일은증권을 인수했다. 리젠트증권과 일은증권은 2002년 1월 통합된다.

BIH에 회사가 넘어간 뒤 한동안은 즐겁게 일했다는 게 K씨의 회고.

“주식시장이 다시 오름세로 돌아서면서 회사가 눈에 띄게 좋아졌습니다. 지점을 대폭 늘리겠다는 외국인 사장의 공언에 고무되기도 했고요. 외환위기 당시보다 급여가 두 배가량 늘었으니 불만이 나올 수 없었죠. 언젠가는 투기자본의 면모를 드러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정도로 비열하게 나올 거라곤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BIH는 한국 상륙 이듬해인 1999년부터 본색을 드러낸다. 99년 리젠트증권이 70%의 고배당을 실시한 것. BIH 측은 투자금액의 상당 부분을 이때 배당으로 회수할 수 있었다. 외국계 투기자본이 투자금을 회수하는 수단으로 가장 흔히 사용하는 것이 고배당이다. 배당은 자본주의 하에서 주주의 당연한 권리로 고배당 자체를 문제시 할 수는 없다.

BIH는 일은증권을 인수한 직후 자회사인 리젠트종금과 리젠트화재에 일은증권 자금 1200억원을 지원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당시 일은증권 이사진의 반대로 자금 지원이 무산됐는데, 당시 대주주에 반기를 들었던 이사진들은 결국 해임됐다. 자금 지원이 이뤄졌다면 일은증권은 심각한 경영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건물 매각과 관련해서도 자본 유출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브릿지증권은 최근 을지로와 여의도 사옥을 시가보다 낮은 가격에 GE캐피털에 매각했다. △몸집 줄이기를 통한 경상경비 절감 △유사시에 대비한 현금 확보가 매각의 주요 목적. 그러나 노조는 BIH의 속셈이 다른 데에 있는 것 같다고 주장한다.

“자본 유출을 위해 고정자산을 현금화하는 것은 투기자본의 속성입니다. 건물 매각은 대표적인 고정자산 현금화 방법이에요. 향후 투자 계획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사옥을 매각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결국 회사의 자산을 현금화해 다른 곳에 쓰겠다는 뜻이지요.”(브릿지증권 노조 관계자)
국내자본 유출 ‘눈뜨고 당할 판’

브릿지증권 노조원들은 두 달째 철야농성을 벌이고 있다.

유상감자로 자본 유출 ‘제재 수단 없어’

고배당과 건물 매각은 자본 회수의 전초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노조는 “대주주가 대규모 유상감자로 회사를 빈껍데기로 만들려고 한다”고 우려한다. 유상감자란 온갖 방법으로 자본금을 늘린 뒤 주당 일정액을 보상받는 방식으로 자본을 유출하는 방법. 자동차부품업체인 만도의 대주주 JP모건이 2003년 말 지분 33.46%를 유상감자하는 방식으로 760억원을 챙겨간 바 있다.

노조 측의 유상감자 시나리오는 이렇다. “자사주(19%)를 포함해 90%에 가까운 지분을 가진 BIH가 100% 무상증자를 실시하면 자본금이 1376억원으로 늘어난다. 그러고 나서 주당 2000원씩 보상하는 방식으로 액면가 기준 600억원을 유상감자하면 1200억원에 가까운 자금을 고스란히 대주주가 가져갈 수 있다.”

이 같은 시나리오의 사실 여부를 묻는 증권거래소의 공시 요구에 대해 브릿지증권은 “당사의 자본감소와 관련해 대주주 BIH로부터 자본감소를 위한 이사회 결의 등 공식적인 제안을 받지 못한 상태다. 구체적인 사안이 확정되는 대로 재공시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노조의 의혹 제기에 화답이라도 하듯 브릿지증권은 5월13일 증권시장 마감 후 공시를 통해 1주당 2.9주를 무상으로 배분하는 290% 무상증자를 실시하기로 결의했다고 밝혔다. “거래량 부족과 주가 저평가를 개선하기 위한 대주주의 방침에 따른 것”이라고 브릿지증권은 설명했다.

하지만 시장에선 브릿지증권이 290% 무상증자를 결의한 것을 자본 회수를 위한 수순이라고 보고 있다. 유상감자를 통한 자본 유출 의혹이 힘을 얻어가고 있는 것이다. 증권업계의 한 관계자는 브릿지증권의 최근 행보에 대해 “한국 시장 철수 준비에 들어간 것 같다”고 풀이했다.

유상감자는 제재 수단이 전무한 데다 손쉽게 투자자금을 회수할 수 있어 러시아 동남아 등에서 투기자본들이 즐겨 사용한 방식이다. 문제는 금융감독 당국이 투기자본의 유상감자를 통한 자본 유출 행태를 규제할 수단이 거의 없다는 점. 유상감자는 주주총회의 승인사항인지라 감자는 최저자본금 기준만 맞추면 현실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다.

이와 관련해 이찬근 인천대 교수는 “유상감자 등을 당국의 인허가 사항으로 바꿔야 한다. 외국계 투기자본의 무리한 유보금 탈취 행위에 대한 법적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외국자본에 대한 통제는 한국 경제의 젖줄인 외자유치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업계에선 “껍데기만 남긴 뒤 매각할 것”이라는 노조의 우려보다 한 발 더 나아가 BIH가 브릿지증권을 청산할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앞서의 K씨는 “다음번 대주주는 꼭 한국 자본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K씨의 바람과 달리 회사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속수무책으로 외국자본에 휘둘리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씁쓸한 현실을 보는 것 같다.



주간동아 436호 (p40~41)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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