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6

2004.05.27

63일간의 나라 살림 구상, 남은 임기 잘 먹여살릴까

노대통령 독서·토론하며 복귀 준비 … 국방·외교에 시간 많이 할애, 경제는 가장 큰 고민

  •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입력2004-05-19 17: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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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비서실 직원들은 5월9일 아침 노무현 대통령이 일독을 권한, 이날 ‘한겨레’신문에 실린 한 칼럼을 이메일로 받았다. 칼럼은 노대통령이 직접 읽고 추천했다는 게 대통령홍보수석실 관계자의 설명이다. 통상 노대통령 추천 칼럼은 홍보수석실에서 올린 칼럼 가운데 노대통령이 고르는데, 이 칼럼만은 노대통령이 직접 선정했다는 것.

    추천 칼럼은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가 쓴 ‘들러리 이데올로기’였다. 얼마 전 열린우리당(이하 우리당) 정동영 당시 의장이 한 사회복지시설을 방문, 정신지체 장애인을 알몸 상태로 목욕시키는 장면을 취재진에게 공개한 사실을 두고 주변에서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은 것은 ‘자기 보스를 제외한 이 세상 모든 것을 들러리로 인식하는 권력 주변의 사고방식’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노대통령이 칼럼을 직접 추천했다는 것은 그만큼 신문을 열심히 읽고 있다는 증거. 이는 또 노대통령이 직무정지 기간 동안 청와대 칩거생활을 어떻게 보냈는지를 추론해볼 수 있는 한 실마리기도 한다. 홍보수석실 관계자는 “노대통령이 추천하는 칼럼이나 글은 거대 담론을 주장하는 관념적인 내용보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적인 노대통령의 생각이 배어 있다는 것.

    청와대와 당 관계 설정도 시급한 현안



    홍보수석실은 5월14일 탄핵소추안 기각 결정 직후 ‘보도 참고자료’를 냈다. 자료 제목은 ‘성찰과 탐구 … 국정 되돌아본 학습의 시간’으로, 노대통령이 직무정지 기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를 정리한 글로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됐다. ‘지난 63일 동안 노대통령의 관저생활은 대부분 휴식과 독서, 토론으로 채워졌다.” 그러나 헌재의 심판 날짜가 다가오면서 노대통령은 기각 결정을 예상한 듯 향후 정국 구상과 함께 직무복귀를 위한 준비도 심도 있게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무엇보다 노대통령으로서는 청와대와 당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해나가야 하는 상황이다. 당정분리 원칙에 따라 과거와 달리 대통령이라고 해서 당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관심을 끄는 대목은 노대통령이 헌재 심판 직전 우리당 신기남 상임중앙위원을 청와대 밖에서 만났다는 점. 이날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신위원과 가까운 한 의원은 “그 무렵 정의장이 입각하는 것으로 정리됐기 때문에 노대통령이 당의장직을 승계할 신위원을 만나 ‘당을 잘 부탁한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겠느냐”고 풀이했다.

    노대통령은 직무복귀 이후의 리더십에 대해서도 상당한 고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4월11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북악산을 오르면서 ‘드골의 리더십과 지도자론’을 언급한 데서도 드러난다. 노대통령은 이날 “오로지 외로운 해방운동 끝에 파리에 입성하면서 정통성 있는 임시정부 수반으로 승인받을 수 있었던 지위에서 드골의 고집이 빛난다”고 말했다(상자기사 참조).

    그러나 노대통령은 드골식의 강력한 리더십은 발휘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5월15일 대국민 담화에서 “정치개혁이 안정된 토대 위에서 질서 있게 추진되도록 국정을 안정적으로 관리해서 착실하게 뒷받침하는 일에 전념하겠다”고 밝힌 대목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정부혁신은 ‘소프트웨어’ 쪽에 치중할 듯

    63일간의 나라 살림 구상, 남은 임기 잘 먹여살릴까

    노무현 대통령이 3월12일 탄핵안 통과 직후 경남 창원시 ㈜로템 공장 근로자들과 함께 하는 오찬에 앞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노대통령의 이런 태도는 ‘4ㆍ15’ 총선에서 우리당이 과반수 의석을 확보함으로써 권력 기반을 강화한 것과 무관치 않다. 직무복귀 이후 노대통령은 그야말로 소수파 대통령에서 다수파의 ‘힘있는 대통령’이 된 셈이다. 우리당 한 의원은 “이전에는 권력기반이 취약해 국민과 직접 상대하는 정치를 하다보니 포퓰리즘이라고 공격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총선 승리는 칩거기간 중 노대통령을 가장 기쁘게 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날 참모들과 함께 개표방송을 지켜보던 노대통령은 오후 6시 ‘우리당 압승’이라는 방송사의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환호하던 참모들과 달리 담담한 표정이었다고 한다.

    칩거기간 중 노대통령이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독서였다. 노대통령의 독서 습관은 상당히 독특한 것으로 알려졌다. 책상 위에 책을 펼쳐놓고 읽다가 지치면 그대로 책을 들고 방으로 내려가 눕거나 엎드려 읽곤 한다는 게 청와대 관계자들의 전언. 한 관계자는 “청와대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노대통령과 권여사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엎드려 책을 읽다가 발가락이 마주치자 장난을 치곤 하는 모습이 화제가 되었다”고 전했다.

    63일간의 나라 살림 구상, 남은 임기 잘 먹여살릴까

    노대통령이 4월21일 청와대 본관 인왕실에서 우리당 선대위 지도부와 만찬 장소로 이동하고 있다.

    무엇보다 노대통령 복귀 이후와 관련, 관심을 끄는 것은 노대통령이 4월28일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민간 자문위원 8명을 청와대 관저로 불러 진행한 토론. 이날 주제는 변화관리(change management)로, 조직 내에서 변화와 혁신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도록 하기 위한 체계적인 관리기법을 말한다. 초청된 민간위원 가운데는 기업현장에서 혁신을 주도한 기업체 임원도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토론은 노대통령이 정부혁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당의 한 의원은 “노대통령은 국민의 정부 시절 해양수산부 장관을 하면서 공무원 조직은 ‘안정적으로’ 끌고 가되 일하는 방식은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노대통령의 직무복귀 이후 추진될 정부혁신은 ‘하드웨어적’이라기보다는 ‘소프트웨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의 정부 때처럼 정부기구를 축소하거나 정부부처를 통폐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관계자는 “언론의 관심은 산업자원부와 정보통신부의 통합 여부 등 하드웨어적인 측면인데, 참여정부의 정부혁신을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고 말했다.

    노대통령은 대국민담화문에서 이라크 파병 문제는 “국민이 걱정하고 있는”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기회 있을 때 정리해서 말할 것”이라고 함으로써 나름대로 복안이 있음을 시사했다. 이라크 내 저항세력과 미군 간 전투가 내전상태로 치달은 데다 미군의 이라크 포로 학대사건이 불거지면서 파병 반대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는 것을 청와대 관저에서 지켜봤던 노대통령이 전문가들과 토론을 거쳐 대처방안을 어느 정도 마련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63일간의 나라 살림 구상, 남은 임기 잘 먹여살릴까

    직무에 복귀한 노대통령이 5월14일 만찬에서 밝은 표정으로 고건 총리와 환담을 나누고 있다

    더구나 4월9일에는 한국인 목사 7명이 이라크 현지에서 납치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노대통령은 이날 연세대 문정인 교수 등을 초청해 지도를 펴놓고 추가 파병 후보지가 어떤 곳인지, 쿠르드 자치구역에 파병부대가 주둔할 경우 인접 국가인 터키나 이란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를 물으며 대책을 구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문교수는 노대통령과 한 면담 사실이 알려지는 게 부담스러운 듯 기자와의 통화에서 “나도 모르는 내용이 언론에 났더라”고 한발 뺐다.

    국방과 외교 분야는 노대통령이 직무정지 기간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분야 가운데 하나라는 게 청와대 관계자들의 얘기다. 노대통령은 이라크 파병과 한미 동맹관계 등 외교 현안을 점검하면서 “가치 지향은 있되, 정책은 실용주의로 가야 한다”는 태도를 재확인했다고 한다. 노대통령은 국방과 외교 관련 토론에서 “협력적 자주국방과 한미 동맹관계의 지속적 발전은 동북아시대 한국의 위상을 정립하는 핵심”이라고 강조하는 등 실용주의적 기조를 그대로 드러냈다는 것.

    경제는 내수 진작에 무게 … 기업 투자유도 전망

    그러나 노대통령의 직무정지 기간 중 무엇보다 노대통령의 마음을 가장 무겁게 한 것은 경제문제였다. 청와대가 배포한 보도자료도 “노대통령은 경제보좌관을 비롯한 몇몇 경제학자들과 함께 미시와 거시 경제문제를 종합적으로 재점검했다. 토론과 학습은 휴식 없이 두세 시간을 넘겼다”고 언급하고 있다. 노대통령이 직무복귀 이후 대기업 오너들을 만나기로 한 이유도 이런 토론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당 유시민 의원은 이렇게 분석한다.

    “현재 수출은 잘되고 있지만 국내총생산 성장에 결정적 기여를 하는 내수가 문제다. 그런데 정부의 공공투자는 재정운영의 한계상 늘리기 어렵고 민간소비는 신용불량자 문제 등으로 얼어붙어 있는 상태다. 유일하게 기대할 수 있는 게 기업의 투자수요다. 현재 금리도 사상 최저상태이고, 사내유보가 많아 투자 여력이 충분한데도 기업이 투자를 망설이고 있는 이유는 불확실한 수익성 전망 때문일 것이다. 노대통령으로서는 기업인들을 만나 이 상황에서 정부가 무엇을 도와주어야 하는지를 들어보고 싶어할 것이다.”

    노대통령도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경제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당장의 ‘위기’상황을 해결하는 데 급급해 우리 경제의 중·장기적인 경쟁력 강화를 위한 시장개혁을 미룰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노대통령은 적어도 2000년 총선을 앞두고 경제개혁을 뒤로 미루다 카드 부실 등의 문제를 키워간 국민의 정부에서 많은 교훈을 얻은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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