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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진보, 국회 벽을 허물다

금배지 단 진보 ‘대중 속으로’

열린우리당·민주노동당에 다수 포진 … 본격 ‘보혁’시대 등장, 기존 체제·이념 대변화 예고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금배지 단 진보 ‘대중 속으로’

금배지 단 진보 ‘대중 속으로’
1991년, 민주노동당(이하 민노당) 노회찬 비례대표 당선자가 감옥에 있을 때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이 면회를 갔다. 현장에서 노동운동을 같이했던 두 인사는 각별한 사이였다. 김의원은 이런저런 얘기 끝에 노당선자가 마르크스 전집 12권을 읽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이 말을 들은 김의원은 그에게 앨빈 토플러가 쓴 ‘제3의 물결’을 전달했다고 한다. 노당선자는 당시 이 책을 읽지 않았다. 이후 두 인사는 서로 다른 길로 가 민중·노동운동을 해왔다. 17대 국회에서 마주선 김의원과 노당선자 사이에는 ‘3선’과 ‘초선’이라는 거리가 존재한다. 2002년 대선 당시 민노당 권영길 후보는 TV 토론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50년이 걸렸다”고 소감을 밝혔다.

50년 세월을 돌아온 ‘진보’가 ‘4·15’ 총선을 계기로 마침내 국회 벽을 넘었다. 미풍으로 시작한 진보의 흐름은 17대 국회가 출범하기도 전에 핵심 이슈로 떠올랐다. 권영길 대표의 한 측근은 “먼 길을 돌아온 만큼 임팩트도 클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2002년 50여년 만에 대중 앞에 섰던 진보는 불과 1년4개월 뒤 두 자릿수 득표율과 의석수로 원내 3당으로 떠올랐다.

이라크 파병 철회·국가보안법 폐지 등에 대한 시각 ‘16대 때와는 큰 차이’

진보세력의 제도정치권 진출은 본격 보혁(保革)시대의 등장을 의미한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총선 결과의 정치적 의미를 젊은층과 진보성향 유권자의 승리, 그리고 한국사회의 왼쪽으로의 이동 등으로 평가했다. 이에 대해 국내 정계 인사들도 대부분 동의한다. 구체적 데이터가 이를 뒷받침한다. 17대 의원 당선자 스스로 평가한 본인의 이념 성향은 열린우리당(이하 우리당)에서 ‘매우 진보’와 ‘다소 진보’를 합쳐 60%를 넘는다. 이들은 진보적 색깔을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진보세력의 등장으로 국회 의제는 다양화할 것이 분명하다. 진보 진영 인사들은 비록 소수이나 17대 국회의 의제 설정을 좌우하는 선도그룹이 될 것이 유력하다. 이들은 아직 ‘17대 국회가 출범하면 무슨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조율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기존 체제, 이념을 한 번은 뒤바꿔놓아야 한다는 원칙에는 모두 찬성한다. 손을 대야 하는 순서와 대상도 대체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이런 흐름은 사회 각 분야에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올 원동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움직임은 이미 감지된다. KBS가 국회의원 당선자 150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논란을 빚고 있는 이라크 추가파병 문제에 대해 우리당 당선자 가운데 70% 정도가 당론과 달리 파병 철회에 동의했다. 민노당은 모두 파병에 반대했다. 어렵게 파병안을 통과시켰던 청와대로서는 안방에서의 반란 가능성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그것이 시대정신”이라고 되받는다. 국가보안법도 앞으로 뜨거운 감자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17대 당선자 가운데 76%가 전면 폐지, 또는 부분 개정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절대 폐지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는 1%에 그쳐 16대 국회와 다른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체제와 상관없이 민족적 차원에서 북한을 지원해야 한다고 대답한 당선자가 90%에 이른다는 사실도 16대와 다른 점이다. 세대교체 흐름을 타고 새로 등장한 뉴페이스들은 의문사 진상규명법, 친일행위 진상규명법, 민간인학살 진상규명법 등 시민단체들이 제정 또는 개정을 요구하는 사안들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접근하고 있다.

진보세력들은 이런 난제들을 풀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대중들의 달라진 지지 분위기가 자리잡고 있다. 총선 후 민노당에는 시민 당원 가입이 급증하고 있다. 민노당 한 관계자에 따르면 선거일 이전 한 달간 하루 평균 70여명이던 인터넷 당원 가입자가 15일 이후부터는 매일 150~180명이 몰려 두배 이상 급증했다. 전에 없던 현상이다. 민노당 관계자들은 “총선을 통해 민노당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커졌다는 증거”라고 풀이한다. 총선 후 축하 화환과 화분이 쇄도한 것도 짧지 않은 민노당 역사 속에 낯선 풍경이다. 민노당 홈페이지에 “화환 보내지 마세요”라는 팝업 광고를 띄웠지만 민노당 당사에는 한동안 원하지 않는 화환들이 즐비했다.



기존 정당에겐 큰 부담 … 변화와 개혁 ‘무언의 압력’

민노당 관계자들도 의아해하는 이런 현상에는 어떤 배경이 있을까. 민노당 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신,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 등이 바탕에 깔려 있지만 진보의 달라진 모습도 한몫했다. 하회탈을 연상시키는 노회찬 당선자의 미소로 대별되는 달라진 진보 이미지가 이념이라는 벽을 허물고 진보라는 부담스러운 주제를 대중 속으로 몰입시켰다.”

진보세력은 이번 총선을 통해 대중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여건과 공간을 확보한 것이 사실이다. 권대표가 4월16일 탄핵 철회와 관련해 3당대표회담을 제의한 것은 이런 자신감의 발로로 봐도 무리가 없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한 측근은 권대표의 이런 제안에 “세상 참 많이 변했다”고 말했지만 언론과 국민들은 의제설정 주도권을 잡은 권대표의 행보에 박수를 보낸다. 이런 흐름을 읽은 한나라당 지도부는 권대표의 주장을 놓고 심야토론을 벌여야 했다. 20석인 원내교섭단체 구성요건 완화를 각 당에 제안한 것도 자신감에서 출발한다. 아직 야생(野生)의 흔적이 없지 않지만 민노당이 2012년 집권을 목표로 하는 미래형 집권정당의 소중한 모체라는 자부심은 이곳저곳에서 확인된다.

금배지 단 진보 ‘대중 속으로’

4월15일 저녁, 각 당에 마련된 총선상황실에서 개표작업을 지켜보고 있는 정동영 의장과 박근혜 대표.같은 날 밤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표가 경남 창원시 선거사무실에서 개표방송을 지켜보며 함박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진보세력의 등장은 기존 정당에게는 큰 부담이다.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무언의 압력으로 작용한다. 우리당은 4월19일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열기로 했던 당선자 오찬 간담회 장소를 효창운동장 내 백범기념관으로 변경했다. 음식도 도시락을 주문했다. 새로운 정치를 지향하는 정치문화를 선도하자는 취지지만 밑바탕에는 행여 있을지도 모를 민노당과의 대비를 우려한 계산이 깔려 있다.

우리당의 고민은 고유의 정체성과 근본적인 지향점을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한나라당이 보수, 민노당이 진보를 선점했기 때문에 우리당으로서는 갈 길을 정하기 쉽지 않은 형국이다. 보수와 진보의 경계에서 어정쩡한 개혁론으로 무장한 우리당의 한계를 절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내 일각에서는 “모든 국민을 다 대변하려는 정당이 되겠다는 것은 결국 아무도 대변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자기비판이 나오고 있다. 진보세력의 대거 등장은 한나라당의 변화도 촉발시킨다. 3선의 한나라당 K의원은 “이제 변해야 산다”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한나라당은 이제 중산층 이상의 계층과 특정 지역의 이익을 더욱 충실히 대변하는 합리적 보수정당으로 변신할 수밖에 없다. 수구냉전 논리와 세력은 당내 소수파로 전락했고 갈수록 설 자리는 줄어든다.

민노당이 원내 대책 가운데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은 정기국회 국정감사 준비다. 국회의 기본 기능인 행정부 감시·견제 기능을 일상적으로 수행하고 국감을 내실 있게 진행하기 위해 이달 말까지 진보국감 사업계획안을 확정할 계획이다. 당 관계자는 “민노당의 원내 활동은 현장성, 연대성, 전문성의 3대 원칙을 가지고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민노당의 이런 적극성을 전해들은 일부 정부 부처는 입맛을 다신다. 특히 경제 운용 기조를 주도하는 재정경제부와 근로자와 서민들의 문제를 직접 다루는 노동부와 보건복지부 등은 민노당의 움직임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재벌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공정거래위원회의 경우 민노당 의원들의 집중적인 감시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됐다는 부담감을 안고 있다. 진보의 바람이 정치권을 넘어 행정부처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금배지 단 진보 ‘대중 속으로’

4월15일 민노당 등 진보세력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개표작업을 지켜보며 즐거워하고 있다.3월12일 탄핵안 가결을 선포하는 박관용 국회의장(작은 사진).

민노당과 진보세력은 ‘분배론’에 비중을 둔다. 그들 누구도’성장론’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재계와 정부가 수시로 얼굴을 붉힌 이 화두가 또다시 거대한 담론의 수렁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 언론이 총선 후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우리당 당선자 10명 중 6명꼴로 분배에 무게를 뒀다. 민노당 당선자 전원은 분배 우선을 주장한다. 재계에서는 우리당의 제1당 부상과 노동계 정당인 민노당 인사들의 원내 진입에 대해서는 경영환경이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한다. 진보세력들이 대거 국회 재정경제위나 산업자원위, 환경노동위 등에 배치돼 반(反)기업적, 친노(親勞) 성향의 입법활동과 기업인 소환 등에 따른 부담이 만만치 않을 것이란 판단도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계로서는 신진세력과 민노당의 약진에 대응할 마땅한 수단이 없다는 점이 고민이다.

한·미 동맹에도 영향 … 자주국방 쪽에 무게 더할 듯

진보세력의 등장은 기존의 한·미 동맹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한국의 대미정책은 동맹우선주의에 입각 추진됐다. 그러나 개혁 성향을 보이고 있는 현 정부와 진보 성향 의원들이 이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알 수 없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동맹보다 자주국방에 비중을 둔다.

‘한국사회의 왼쪽으로의 이동’으로 규정되는 진보세력의 등장에 대한 불안과 우려도 만만치 않다. 한국이라는 배가 한 번도 가보지도 않은 미지의 해역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비유가 이를 상징한다. 우리당 내 진보세력과 민노당이 손잡고 급진적 개혁을 밀어붙일 가능성을 일부 언론이 짚고 있다. 대북 문제 및 대미 외교의 판을 흔들 경우 혼란은 피할 수 없다. 이런 우려에 대해 정부는 “정부 정책이 절대로 왼쪽으로 안 간다”며 적극적인 홍보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구호로 불안감이 가시지는 않는다. 이미 일부 재벌은 진보세력의 등장에 부담을 느끼고 당분간 투자를 중단, 흐름을 관망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앞으로 어떤 리더십을 보이느냐에 있다. 노대통령의 통합의 정치를 기치로, 보수와 진보의 양날개를 동시에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17대 국회는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에 변화의 개혁 바람을 예고한다. 유권자들은 이미 총선에서 학력과 경력, 성, 나이를 파괴했다. 더 이상 정치권력은 성역이 아니고 권위의 대상도 아니다. 가부장적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한국정치는 이제 창조적 파괴의 희생물로 전락했다. 하회탈 미소를 지닌 노회찬 당선자와 그 동지들이 선봉에서 이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그들의 실험은 과연 성공할 것인가.





주간동아 2004.04.29 432호 (p14~16)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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