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간동아 로고

  • Magazine dongA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주간동아칼럼

주민등록증과 진짜 나이

  • 최윤희 / 카피라이터

주민등록증과 진짜 나이

주민등록증과 진짜 나이
요즘 산에 가보면 나이 드신 분들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살갗에 입은 타박상이라면 ‘파스’나 ‘머큐로크롬’ 같은 것으로도 치유가 되겠지만 심장 중심부를 강타한 깊은 상처라 쉽게 치유될 것 같지 않다.

“글씨, 늙은 것도 서러운디 집에서 나오지도 말랴! 하이고.” “그러니께 우리는 급한 볼일이 있어도 해 떨어지기 기둘렸다가 좁은 골목길로만 다녀야 혀.”

매일매일 나이를 먹을 수밖에 없는 나에게 그분들의 한숨과 탄식이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니다.

전국에 강의를 다니고 있는 나는 평소에 두 개의 나이를 역설하곤 했다.

첫째, 주민등록증에 적힌 나이-이것은 정부에서 인구정책을 편리하게 할 수 있도록 만든 기호에 불과하다. 아라비아 숫자!



둘째, 우리의 진짜 나이-이것은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을 하느냐. 100% 그것이 결정한다.

겉모습이 아닌 사고와 행동이 나이 결정

그렇다. 주민등록상의 나이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지나친 편견이다. 나이 드신 분들을 두 번 슬프게 하는 일이다. 20대 젊은이도 매사에 대충대충~~ 적당적당~~ 산다면 그는 이미 늙었다. 정신이 노릇노릇하다면 그의 인생은 이미 퇴화한 것이다. 반대로 70, 80대도 파릇파릇한 정신과 도전에너지가 충만하다면 청춘임이 분명하다. 더구나 요즘은 100세 시대가 아닌가.

인생을 축구경기에 비교해본다면 25살까지는 연습기, 50살까지는 전반전이다. 75살은 후반전, 그리고 100살은 연장전이라고 할 수 있다. 골든골은 후반전, 연장전에서 잘 터진다.

내가 존경하는 76살의 여자 분이 계신다. 그분은 항상 007가방을 두 개씩 들고 다닌다.

“회장님, 왜 그 무거운 가방을 두 개씩이나 들고 다니세요?” 내가 물으면 그분은 씩씩하게 대답한다. “이것 봐, 우리 여자들은 가운데 중심이 없잖아? 이거 들고 다니면서 중심 잡아야 해!”

피부는 조글조글, 머리는 하얗지만 나는 그분을 뵐 때마다 한 번도 나이 드신 분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영원한 청춘이요, 새파란 꽃띠다.

1998년 실험정신에 불타 있던 우주인 존 글렌은 77살에 우주여행에 도전했다. 그가 지구에 무사귀환한 뒤 던진 첫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달력의 나이는 집어치워라! 내 나이는 내가 만든다!”

사실 나의 사회생활도 나이에 관한 편견을 깨부수는 대형사고였다. 집에서 살림만 하던 38살의 여자가 최첨단 광고회사에 덜커덕 입사했으니 얼마나 놀랄 일인가?

모든 직원들은 하나같이 나를 향해 이렇게 외치는 듯한 분위기였다.

‘아줌마, 여긴 웬일이세요? 집에서 솥뚜껑이나 운전하시죠!’

그들의 놀라움은 그야말로 지당한 원초적 본능이다. 저 깡촌에서 금방 상경한 중년 아줌마, 이목구비가 제대로 정리도 되지 않은 채 막대기처럼 뻣뻣하게 서 있었으니 얼마나 한심했겠는가? 게다가 내가 달고 나타난 타이틀은 광고회사의 꽃이라는 카피라이터!

그러나 나는 젊은이보다 두 배쯤 더 열정적으로 일했다고 자부한다. 나의 ‘변화지수’와 ‘도전지수’는 날마다 새롭게 팽창하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다.

얼마 전 지하철을 탔는데 어느 할아버지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TV에서 강의하는 것을 봤는디 이렇게 만나게 되니 정말 반갑구만 그려!”

그러면서 나에게 갱지로 된 노트 한 권을 보여주셨다.

그곳에는 연필로 쓴 영어 알파벳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어디 다녀오시는 거예요?”

“영어공부하고 오는 길이여.”

“갑자기 영어공부하실 생각은 왜 하게 되셨나요?”

“우리 손자 놈이 핵교 들어가더니 하루는 영어를 내 앞에 들이밀고 읽어보라고 하는 거여. 아, 글씨 내가 알아야 읽지. 그랬더니 손주 놈이 대뜸 큰소리로 이렇게 외치는 거 아녀? ‘우리 할아버지는 바보래요! 우리 할아버지는 영어도 모른대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무시해도 참겠는디 우리 손자 놈이 무시하는 건 못 참겠어. 그래서 영어공부를 하기 시작했지. 그랬더니 아주 재밌어. 오히려 손자 놈한테 감사하고 싶을 지경이여.”

연세가 일흔다섯쯤 되어 보였지만 그분은 봄 나무처럼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어찌 그분에게 “이제 나이 드셨으니 집안에만 조용히 계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주간동아 431호 (p96~96)

최윤희 / 카피라이터
다른호 더보기 목록 닫기
1367

제 1367호

2022.12.02

청약 초읽기 국내 최대 재건축 단지 ‘둔촌주공’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