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1

2004.04.22

IT공룡들 “가전업체, 한판 붙자”

인텔·MS·HP 등 TV시장 본격 진출 … 향후 디지털 가전업계 주도권 노리는 듯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4-04-14 14: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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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공룡들  “가전업체, 한판 붙자”

    TV OS(운영시스템)사업에 뛰어든 빌 게이츠.

    ”종국엔 IT업체가 샴페인을 터뜨릴지도 모른다.”

    삼성전자의 한 임원은 TV시장에서 가전업체와 IT(정보기술)기업의 주도권 다툼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인텔과 MS를 비롯해 굴지의 IT업체들이 앞다퉈 가전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는 것을 두고 한 얘기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인텔 MS HP 델 게이트웨이 모토로라 등 내로라하는 IT업체와 삼성전자 LG전자 소니 마쓰시타 파나소닉 등 전통적 가전업체가 가전시장에서 조우했다. 박 터지는 경쟁을 벌이고 있는 가전업체들로선 기존 경쟁 상대 외에 또 다른 적을 만난 것이다.

    윈도우즈로 PC 운영시스템(OS) 시장을 석권한 MS는 올 1월 남의 밥그릇인 TV용 OS시장에 진출했다. MS는 TV가 향후 구축될 홈네트워크의 서버 역할을 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디지털 컨버전스(융합)로 TV의 기능이 확대되면 TV에서도 PC처럼 OS의 중요성이 커지게 된다.

    PC용 반도체 시장을 장악한 인텔도 가전 분야로 사업 영역을 확대했다. 인텔은 최근 디지털TV 값을 현재보다 반으로 줄일 수 있는 칩을 개발하겠다고 공언해 가전업계를 긴장시켰다. PC를 비롯한 모든 디지털기기에 자사의 칩을 넣어 ‘Intel Inside’를 ‘Intel Everywhere’로 재편한다는 게 인텔의 목표다.



    가전업체들 “기술 우위” 자신감

    IT업체가 경쟁적으로 가전시장에 뛰어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삼성경제연구소 권기덕 연구원은 “IT업체들이 유행처럼 가전시장에 기웃거리는 건 PC와 다른 가전제품들이 컨버전스 되는 시점에서 디지털TV로 교두보를 마련한 뒤 향후 구축될 디지털 가전시장에서 이니셔티브(주도권)를 쥐겠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LCD와 PDP로 상징되는 디지털TV 시장은 봇물 터지듯 가전시장에 들어온 IT업체의 교두보 구실을 하고 있다. 컴퓨터를 만들던 델 HP 게이트웨이가 자사 브랜드로 디지털TV를 출시했고, 카메라 강자인 캐논과 프린터로 유명한 엡손 야마하 모토로라 등도 디지털TV 시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IT공룡들  “가전업체, 한판 붙자”

    포토프린터가 내장된 엡손의 디지털TV.삼성전자의 `63인치 벽걸이TV.

    IT업체의 가전시장 러시는 IT와 가전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전문가들은 지난 20년간 IT업계의 혁신을 PC가 견인했다면 다음 20년의 혁신은 가전이 이끌 것이라고 전망한다. 민후식 동양금융증권 애널리스트는 “앞으로 다른 정보기기를 주무르는 서버 기능을 갖출 디지털TV는 기존 가전업체와 IT업체의 영역을 아우른다”고 말했다.

    한국을 먹여살릴 성장 동력의 하나로 꼽히는 디지털TV는 가전업체들에게 막대한 수익을 안겨줄 것으로 기대되는 캐시 카우(cash cow)다. 기존 기업들간의 경쟁도 치열한 판에 새로운 경쟁자가, 그것도 PC시장에서 수위를 다투는 내로라하는 IT업체들이 나눠 먹자면서 숟가락을 내민 것은 한국업체에 악재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MS 인텔 HP 델 게이트웨이 등 IT업체가 터줏대감인 삼성전자 LG전자, 나아가 소니나 샤프의 적수가 될 수 있을까.

    가전업체들은 디지털가전시장은 가전업체 중심으로 짜여질 것이라고 낙관한다. IT업체들은 저가 시장의 일부를 잠식하는 수준에 그칠 것이라는 주장이다. 파나소닉의 한 딜러는 “한마디로 경쟁 상대가 아니다. 성능이나 브랜드 이미지에서 게임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LG전자 관계자 역시 “가전시장에서의 IT업체의 이미지 기술력은 LG 삼성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우려의 시각 또한 적지 않다. “IT업체의 가전시장 진출은 단기적으로 시장의 경쟁을 심화시키면서 기존 가전업체의 수익 구조를 악화시키고, 중장기적으로는 시장 주도권 경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LG경제연구원 배수한 수석연구원) “정보가 부재한 상황이라 위기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술력에서 훨씬 앞서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태도가 문제다.”(디지털TV 부품업체 대표 J씨)

    IT공룡들  “가전업체, 한판 붙자”
    IT업체 중 가장 먼저 디지털TV를 출시한 게이트웨이가 미국 시장에서 성공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니케이일렉트로닉스에 따르면 게이트웨이는 2003년 6월 미국 PDP 시장에서 31%의 점유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연착륙에 성공한 게이트웨이는 가전시장 진출 시기를 저울질하던 IT업체들이 올 초부터 속속 디지털TV 시장에 뛰어드는 직접적 계기가 됐다.

    게이트웨이가 성공한 이유는 가전업체들보다 30% 가량 저렴한 가격에 디지털TV를 공급했기 때문이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는 단순한 유통구조를 가진 IT업체들은 가전업체 대비 약 25~30% 정도 가격경쟁력에서 비교 우위를 갖고 있다.

    올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가전시장 공략에 나설 세계 1위 PC업체 델은 게이트웨이 못지않은 직접 판매망을 갖고 있다. 델은 눈에 띄는 기술력을 보유하지 못했음에도 중간 상인을 거치지 않는 직접판매 방식으로 PC시장 점유율 세계 1위를 달성한 바 있다. 세계 2위 PC업체인 HP 역시 높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가전업체들의 텃밭을 흔들 전망이다.

    그렇다면 한국 가전업체들은 주도권 다툼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앞서의 삼성전자 임원은 1970년대 소니가 그랬던 것(상자기사 참조)처럼 기존 질서가 무너지는 변혁기는 후발주자가 선두로 등장할 수 있는 호기라고 말했다. 소니와 인텔의 칩 전쟁, 가전업체와 MS의 TV용 OS 전쟁 등 앞으로 IT업체와 가전업체가 벌일 표준 전쟁은 새로운 경쟁자들에게 파이를 빼앗길 위기인 동시에 선두로 도약할 기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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