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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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뭉쳤노라 절반 해냈노라?

비례대표의원 50대 50 관철 17대 30여명 진출(?) … 여성의 정치세력화 공감대 큰 진전

  •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입력2004-02-26 13: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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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뭉쳤노라 절반 해냈노라?

    1월8일 17대 총선 당선운동 여성 대상자 102명 명단 발표 뒤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는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 회원들.

    한동안 신문 정치면을 떠들썩하게 장식했던 여성광역선거구제 논의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한순간에 사그라졌다. “여성 국회의원 50명 시대가 열린다”, “지역구 의석을 늘리기 위한 정치권의 꼼수다”, “남성 역차별 아니냐”며 흥분하던 목소리들도 함께 잦아들었다. 그러나 ‘여성 정치세력화’를 향한 여성계의 ‘악전고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비례대표직 확대, 여성광역선거구제 도입 등 여성계가 주도적으로, 또는 고육지책으로 택한 방안들이 모두 무산될 위기에 처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여성 정치세력화에 대한 여론 환기, 국민적 공감대 형성, 정치권을 향한 압박 등에서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진전이 있었다. 무엇보다 비례대표직에서나마 두 명 중 한 명을 여성으로 하는 50대 50 원칙 관철에 성공함으로써 17대 국회에서는 30명 안팎의 여성이 의정활동에 나서게 될 것으로 보인다. 16대 국회의 여성의원 수가 16명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발전이다.

    여성 국회의원 5.9% 최하위권

    “1991년 지방자치제 부활 때부터 여성계는 정치세력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성과는 크지 않았다. 2003년 10월 현재 여성의 의정 참여는 국회의원 5.9%(16명), 기초자치단체장 0.4%(2명), 광역의회의원 9.2%(63명), 기초의회의원 2.2%(77명) 등 미미한 수준이다. 국회의원 비율만 놓고 봐도 세계 181개국 중 103위, 서구는커녕 아시아권인 베트남(27.3%) 중국(21.8%) 싱가포르(11.8%) 몽골(10.5%) 인도네시아(8.0%) 일본(7.3%) 등에도 못 미치는 최하위권이다.” 한국여성개발원 김원홍 박사의 설명이다.

    이렇게 ‘숫자’ 자체는 획기적으로 늘지 않았지만 여성 정치인에 대한 사회 인식은 남녀평등의식 고양과 함께 사뭇 달라졌다. 비례직 여성 할당제만 해도 4, 5년 전에는 “여성에 대한 특혜”라고 반발이 적지 않았으나, 이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 남윤인순 공동대표는 “사회 전반의 민주화가 주요 원인이다. 정치권도 현 상태로는 여성 유권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부패정치에 대한 국민의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여성정치인 육성이 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공감대가 광범위하게 형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2001년 세계은행(IBRD) 발표에 따르면 여성의 의회 진출이 많은 나라일수록 부정부패가 적고 국민소득도 높았다. 반(反)부패지수와 여성의원 비율은 비례한다는 것이다. 이는 국제의회연맹(IPU)의 2003년 연례 조사에서도 확인된 사실이다.

    이러한 배경 아래 여성계는 지난해 초부터 17대 국회에 더 많은 여성을 진출시키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작은 힘으로 큰 벽을 깨는 일이다. 끈질기고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이하 정개특위) 회의도 우리처럼 열심히 방청한 팀이 없다.”

    여성정치세력민주연대(이하 ‘여세연’) 조현옥 대표의 말처럼 17대 총선을 겨냥한 여성계의 활동은 빠르고 조직적이었다. ‘17대 총선을 위한 여성연대’(이하 ‘여성연대’)와 ‘맑은정치여성네트워크’(이하 ‘맑은넷’)가 그 두 축 역할을 했다.

    지난해 8월 결성된 ‘여성연대’는 전국 321개 여성단체가 참여한 범여성계 조직이다. 정당법, 정치자금법 개정 등 주로 제도 개선에 초점을 맞춰 움직이고 있다. 지난해 11월 출범한 ‘맑은넷’은 각계 여성 200여명으로 구성된 단체다. 여성 국회의원 후보 선정 및 추천, 지지·당선운동 등 여성연대에 비해 더욱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활동을 벌인다.

    지난 1월8일 ‘맑은넷’은 ‘17대 총선 당선운동 대상 여성’ 102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조현옥 ‘여세연’ 대표는 “명망 있는 남녀 인사들로 추천위원회를 꾸려, 운영위원회에서 올라온 명단을 토대로 세밀히 심사했다. 정치적으로 훈련된 여성이 많지 않은 실정상 도드라진 사람보다 하자 없고 발전 가능성이 큰 여성을 발굴하는 데 주력했다”고 말했다.

    명단에는 여야 정당 소속 정치 신인과 명망가, 전문직 종사자, 여성운동가 등이 두루 섞여 있다. 일각에서는 “색깔이나 지명도 등이 들쭉날쭉하다. 눈길을 확 끄는 인재도 없다. 각 정파나 세력 간 균형 맞추기에 급급한 것 아니냐”는 등의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여성신문’ 김효선 사장은 “여성 정치세력화에 색깔이나 정파는 크게 중요치 않다. 여성운동계 내부에서 불협화음이 날 소지도 적다. 지금 우리의 요구라는 것이 워낙 수위가 낮아, 합의를 이끌어내고 한목소리를 내는 데 무리가 없었다. ‘자리 또는 이권을 둘러싼 이전투구가 있었을 것’이라는 식의 추측은 지극히 남성적인 시각”이라고 주장했다.

    공천경쟁 가시화 여성 이슈 밀려

    그러나 이러한 여성계의 착실한 준비와 상관없이 정치권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지난해 12월 초까지만 해도 한나라당 민주당 열린우리당 등 여야 정당은 비례대표의 50%를 여성으로 하고 지역구에도 30% 여성공천할당제를 도입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두 제도가 성공적으로 도입될 경우 17대 국회는 유례 없는 ‘여성시대’를 맞이할 것이었다. 이에 여성계는 한 발짝 더 나아가 현재 273석인 의석 수를 299석으로 늘리고 ‘비례대표 대 지역구’ 의석 수를 1대 2로 가져갈 것을 제안했다. 15%(273석 중 46석)의 비례대표만으로는 여성뿐 아니라 장애인 등 소수 대표권 보장, 직능대표성 및 전문성 확보라는 본래 취지를 살리기 어렵다는 취지에서였다. 그런데 공천경쟁이 가시화하고 각 당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들면서 그만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여성 관련 이슈가 논의의 중심에서 급속도로 밀려나기 시작한 것이다.

    1월15일 국회 정개특위는 ‘비례대표 50% 및 공천 30% 여성 할당 의무화’를 정당법 개정에 포함시키지 않기로 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여성후보 할당제는 “정당 자율에 맡겨야 한다”며 법 개정을 반대한 때문이었다. 한나라당은 한 술 더 떠, 전체 의석 수는 현행대로 두되 46석인 비례대표 수를 30석으로 줄여 남은 16석을 지역구로 돌리겠다는 뜻을 밝혔다.

    여성계는 발칵 뒤집혔다. 30% 여성공천할당제 폐기를 문제 삼을 여력조차 없었다. ‘비례대표 50% 여성 할당’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비례대표 의석이 16석이나 준다는 것은 설사 각 당이 당헌에 따라 ‘50% 할당’ 약속을 지킨다 해도 여성의원 수가 8명이나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계는 1월20일 여성연대를 주축으로 국회에서 ‘정치개악규탄 여성 비상시국회의’를 여는 등 거세게 저항했다. 다행히 ‘비례대표 50% 할당’ 약속은 지켜질 듯했지만, 3당이 사실상 지역구 의석은 늘리고 비례대표 의석은 줄이는 데 합의함으로써 큰 문제가 생겼다. 이는 여성계가 애초 도입을 주장하지 않았던 여성광역선거구제를 받아들이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여성계의 반발이 커지자 정치권이 일종의 ‘무마책’으로 여성광역선거구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여성광역선거구제란 전국을 26개 권역으로 나눠 각 1명의 여성의원을 선출토록 하는 방안이다.

    “지난해 민주당은 전국을 23개 권역으로 나눠 여성후보끼리 경쟁하는 ‘여성전용선거구제’ 안을, 한나라당은 약 20개의 분구 예정 지역구에 남녀 2인씩을 선출하는 ‘양성평등선거구제’ 안을 제시한 적이 있다. 당시 여성계는 이 두 안이 시민운동 진영의 비례대표 확대 요구를 희석시킬 수 있는 데다, 여성끼리 경쟁하는 일종의 ‘마이너리그’를 탄생케 할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도입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비례대표 의석 확대는커녕 축소가 기정사실화하자 차선책으로서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여성민우회 김상희 대표의 설명이다.

    조현옥 ‘여세연’ 대표도 “여성광역선거구제 도입은 ‘비례대표 축소, 지역구 확대’를 무마하려는 정치권의 고육책이었다. 특히 당 지지도 하락으로 정당명부제에 따른 비례대표 선출에 큰 부담을 느낀 한나라당의 정략이 크게 작용했다. 그걸 다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역구 의석 수를 둘러싼 ‘밥그릇 싸움’에 끝까지 몰입한 정치권은 어렵게 공론화된 여성광역선거구제 논의마저 ‘없었던 일’로 만들어버렸다. 게다가 국회 정개특위 위원장인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이 민주노동당 여성부대표를 만나 “여성광역선거구는 여성계의 요구 때문에 립서비스한 것”이라고 발언한 사실이 알려짐으로써 여성계는 또 한번 분노에 휩싸였다.

    현재 여성계는 ‘비례대표 확대, 50% 여성 할당’이라는 최초 입장에 다시 무게를 두고 있다. 남윤인순 ‘여연’ 대표는 “정치권의 여성 비율 확대 의지가 진심이라면 비례대표 수를 늘려달라. 한나라당의 ‘의석 수 현행 고수’ 주장은 여성광역선거구제 도입을 당론으로 정한 그 순간 실효가 없어졌다. 그 스스로 26석 확대를 주장했던 것 아니냐”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여성광역선거구제도, 비례대표 확대도 현재로서는 실현 가능성이 크지 않아 뵌다. 김상희 여성민우회 대표는 “누군가는 ‘절반의 성공’이라 하지만 아직 멀었다. 국회 본회의에서 한나라당의 ‘지역구 확대, 비례대표 축소’라는 시나리오가 관철된다면 이는 굉장한 개악이다. 시민단체들과 손잡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현옥 ‘여세연’ 대표는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역설적으로 여성의 정치세력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힘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곤혹스러운 상황을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성광역선거구제 논란 등을 통해 국민들에게 여성 정계 진출이라는 ‘화두’를 던질 수 있었던 점에 주목한다. 이 주제가 지금처럼 사회의 핫이슈가 된 적이 있었느냐. 앞으로 큰힘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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