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1

2004.02.12

“10만원권 새 지폐 모델 최초 여의사 김점동이 제격”

  • 박성래 한국외국어대 과학사 교수/ parkstar@unitel.co.kr

    입력2004-02-05 13: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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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만원권 지폐를 만든다면 거기에 누구의 초상을 넣는 것이 좋을까. 어느 신문의 여론조사 결과로는 광개토대왕이 단연 1등을 차지했다. 이미 정부측에서는 10만원권 지폐의 필요성을 인정했다고 하니, 어쩌면 생각보다 가까운 장래에 우리나라 사상 최고액권이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여성계는 벌써부터 이번엔 여성 인물의 초상을 넣자며 신사임당, 허난설헌, 유관순 등 대표적인 여성 인물들을 추천하고 있다. 온통 전주 이씨 옛 남자들(세종 이이 이황) 일색인 한국 화폐에 여성을 넣자는 데 반대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여성들보다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여자의사인 김점동을 추천하고 싶다.

    김점동(金點童·1877~1910)은 박에스터(Esther Park)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김’씨가 어떻게 ‘박’씨로 변한 것일까. 그는 개화기 선교사 스크랜튼 부인을 만나 이화학당에서 공부했고, 1893년 박여선과 결혼해 1895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래서 그의 성이 서양식으로 바뀌어 박에스터가 된 것이다.

    미국 연방정부가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한 시기는 1920년, 영국(1918년)보다 조금 뒤였다. 프랑스는 이보다 늦은 1946년에서야 여성이 투표를 할 수 있었다. 당연히 조선에서의 여성의 지위란 말하지 않아도 뻔한 상황이었다. 김점동은 한국 역사 최초로 서구 여성 유학생이 됐다. 이후 최초의 여성 의사가 되어 1900년 귀국했다. 그의 일생이 더욱 극적으로 보이게 된 데는 남편 박여선의 희생이 있었다. 함께 미국에 간 그들 부부는 생활을 위해 남편 박여선이 농장이나 식당에서 노동해가며 아내 김점동의 대학 공부를 도왔다. 1896년 10월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한 그녀는 1900년 5월 졸업했지만, 남편은 아내의 졸업을 8개월 앞두고 폐결핵으로 숨지고 말았다. 요즘은 그리 드물지도 않은 현상이지만, 이 남성이야말로 한국 역사에서 최초의 외조자(外助者)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졸업과 함께 귀국한 김점동, 즉 박에스터는 서울에서는 주로 보구여관(保救女館·이대부속병원의 전신)에서, 평양에서는 선교사가 세운 기홀(起忽)병원에서 10년간 여자 환자를 치료하는 데 봉사했다. 때로는 당나귀를 타고 시골 진료를 다녔다는 여의사 김점동의 일생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이 너무도 많다. 귀국한 뒤 꼭 10년 동안 끊임없이 환자를 찾아다녔던 그녀는 1910년 4월3일 서울에서 과로로 숨을 거두고 만다. 그녀가 의과대학을 졸업할 수 있도록 도와준 남편과 마찬가지로 과로와 폐결핵으로 쓰러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아직 이들 부부의 일생에 대해서는 연구가 너무도 부족하다. 김점동 박여선 부부의 삶과 사랑에 대해 알려진 게 이 정도에 불과한 것은 근대사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그만큼 부족했음을 증명한다. 화폐에 등장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더욱더 극적인 삶을 산 인물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역사란 극적인 전개를 통해 인간에게 영감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 김점동만큼 드라마틱한 ‘여자의 일생’이 어디 또 있을까.

    너무나 어려워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쳤던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의 모습 가운데 감동적인 한 여성 의사의 일생을 10만원권을 통해 보게 되면 어떨까. 아무래도 우리 새 지폐의 모델로는 김점동이 제격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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