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1

2004.02.12

경찰서장이라고 다 같은 줄 아나?

전국 262명 천차만별 세계 … 여건 따라 5등급 분류, 서울 종로·강남·서초 ‘최고 요직’

  • 이남희 기자 irun@donga.com

    입력2004-02-05 10: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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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찰서장이라고 다 같은 줄 아나?

    1998년 4월 경찰청에서 열린 경찰서장회의에서 서장들이 경례를 하고 있다.



    ‘경찰 업무의 꽃이자 경찰 업무의 종합예술.’(이길범 총경)

    ‘주민에게 서비스로 봉사하는 사람.’(경기 A시의 한 경찰서장)

    ‘주민의 치안 지킴이, 약자의 인권 수호자.’(김강자 전 총경)

    세 명의 전·현직 경찰서장이 내린 ‘경찰서장’ 임무에 대한 정의다. 수백명의 경찰과 전ㆍ의경을 통솔하는 경찰서장 자리는 경찰관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직책이다. 이들은 담당 지역의 수사 정보 경비 보안 교통 등 모든 분야 업무를 총괄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다. 하지만 경찰서장은 경찰의 허리에 해당하는 ‘총경’ 계급으로, 공무원으로 치면 겨우(?) 4급 공무원인 서기관에 불과한 신분. 그래도 경찰서장만큼 대규모 조직을 이끌며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4급 공무원을 찾기란 어렵다. 더구나 이들의 가치관, 행동, 언행에 따라 지역의 민생치안과 주민의 삶의 질이 좌우되기도 한다.



    서울 서장은 총경 진급 4년 이상 돼야

    1월 경찰 인사의 계절을 맞아 대대적인 ‘서장 물갈이’가 이뤄졌다. 1월6일에는 총경으로 승진한 55명의 명단이 발표됐고, 26일에는 총경급 인사발령이 있었다. 새로운 곳에서 업무를 시작한 경찰서장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관내의 치안상황과 지역특성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부하직원, 지역유지, 지역주민과 만나기 위한 발빠른 행보도 이어진다. 지방의 외곽 지대로 발령’난 ‘물먹은’ 경찰서장들은 “내 역량을 발휘하겠다”며 재기 의지를 다지고 있고, ‘물 좋은’ 경찰서의 서장이 된 이들은 기쁨도 잠시 “실수나 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때로는 ‘범죄 소탕의 일등 공신’으로 추앙받고, 가끔은 ‘비리의 민중지팡이’로 폄훼되는 대한민국 경찰서장은 무엇으로 사는가.

    현재 전국에는 모두 262명의 경찰서장이 있지만 이들 모두가 같은 경찰서장은 아니다. 이들의 업무 경력과 연차에 따라 배치되는 경찰서가 다르기 때문. 경찰은 관할 인구, 범죄발생률, 치안여건, 치안수요 등을 고려해 262개의 경찰서를 5개 등급으로 분류한다.

    서울의 31개 경찰서는 모두 최상급인 특별군이며, 경기 지방의 일부 경찰서와 광역시 관할 경찰서가 1군, 나머지 지방경찰서들이 그 규모에 따라 2, 3, 4군으로 나뉜다. 각 군에 속하는 경찰서의 서장에 부임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자격 조건이 필요하며 특별군의 경우 총경에 진급한 지 4년 이상이 돼야 한다. 매년 50~60명이 배출되는 총경들은 승진하거나 정년퇴직할 때까지 보통 서너 군데 경찰서의 서장을 지낸다. 1군 경찰서 서장은 총경이면 누구나 한 번씩 거치는 자리지만, 특별군인 서울의 경찰서장만큼은 다르다. 대개 서울에서 경찰 근무를 시작해 1군 경찰서장을 마친 사람에게만 서울의 경찰서장 자격이 부여되고, 그중에서도 잘나가는 일부 인사만이 서장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하지만 참여정부의 인사정책을 고려할 때 ‘서울의 경찰서장’ 경력이 더 이상 승진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6월 청와대가 지방에서 근무하는 경찰관들의 경무관 승진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서울 근무 자격조건’이란 조항을 삭제하기로 했기 때문. 과거 정부는 ‘서울지역에서 총경으로 6개월 이상 근무한 자만이 경무관으로 승진할 수 있다’고 제한해왔다. 반면 ‘지방분권화’를 표방하는 참여정부는 올해 경무관 인사에서 지방에 재직 중인 2명의 총경을 경무관으로 승진시키는 전례 없는 기록을 남겼다.

    경찰서장 가운데에서도 요직 중의 요직은 바로 서울의 종로와 강남, 서초 경찰서장. 이어 중부와 영등포 경찰서장이 그 뒤를 따른다. 종로서와 중부서가 서울의 중심부를 관할해온 ‘전통 명문’이라면, 강남서와 서초서는 떠오르는 ‘신흥 명문’이다.



    경찰서장이라고 다 같은 줄 아나?

    1월30일 한 일선 경찰서에서 아침 회의가 열리고 있다. 2003년 이후 ‘빔 프로젝터(beam projector)’를 이용한 회의가 일선 경찰서에 활성화됐다.

    관내에 청와대, 미국대사관, 정부종합청사 등 주요 공공기관이 있는 종로서는 대통령 의전 등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윗사람들과 교류할 기회가 많아 지망 0순위로 꼽힌다. 또 ‘모든 시위의 종착역은 종묘공원’이라 불릴 만큼 시위가 많은 지역이라 대개 ‘경비통’으로 불리는 전문가가 종로서장으로 발탁된다. “종로서장 출신치고 승진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게 경찰 내부의 속설. 최기문 경찰청장도 종로서장을 거쳤다.

    강남, 서초서의 경우 관내에 정·재계 고위층 인사들이 많이 살아, 서장들은 고위층 인사들의 민원과 빈발하는 대형 강력사건을 해결하면서 진급의 발판을 마련한다. 특히 강남서는 승진의 엘리트 코스로 꼽힌다. 이무영 전 경찰청장, 이팔호 전 경찰청장, 이상업 경찰대학장 등이 강남서장을 거친 대표적 경찰간부들이다. 경찰서 공식서열 1번인 서울 중부서장도 최상위급에 해당한다. 중부서장은 1년에 한두 차례 열리는 전국 경찰서장회의에서 전국 서장을 대표해 의전행사를 지휘하는 특권을 누린다. 영등포서장은 관내에 국회와 민주노총 등이 있고 시위가 빈번해 ‘경비 업무’를 잡음 없이 수행해야 하는 중책을 떠맡고 있다.

    이렇다 보니 이들 경찰서장직을 놓고 벌어지는 총경들의 물밑경쟁도 치열하다. 한 전직 경찰 간부는 “강남, 종로 등 주요 서장이나 본청과 서울청의 주요 과장 자리로 진입하기 위해 일부 총경들은 권력 실세와 친분을 맺는 데 여념이 없다”고 지적했다. 윗사람에게 ‘눈도장’을 찍는 것이 승진에 아무래도 유리하다는 것. 업무 능력과 처세 능력을 두루 갖춘 인사가 고위 간부로 진입하기 쉽다는 설명이다. 또 일부 경찰서장들은 재계와의 인연을 넓히고 지역 유지들로부터 ‘대가성 없는 용돈’을 받아 쓰는 데 관심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직위해제의 굴레에 빠지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주요 경찰서들의 서장직이 모든 총경이 바라는 ‘파라다이스’는 아니다.

    “주요 경찰서장들의 업무 부담은 다른 서장들보다 몇 갑절 큽니다. 월급은 똑같은데 말이지요. 주요 경찰서에서 업무를 잘하면 그만큼 인정받지만, 조금의 실수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주요 경찰서장직을 거치는 것이 꼭 진급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고요.” 경찰청 한 총경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종로서나 강남서에서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물러나는 경찰서장도 많았다. 남형수 전 강남서장(현 서울남부경찰서장)은 지난해 6월 납치사건을 벌인 부하직원에 대한 관리 소홀을 이유로 부임 2개월 만에 직위해제됐다. 남 전 서장의 경우 부임한 지 보름 뒤 마약반 소속 형사가 납치사건에 연루됐고 곧바로 사표를 제출했기 때문에 짧은 기간에 조직원 성향을 파악하기 힘들었을 것이란 동정여론이 일기도 했다.

    종로서의 경우 1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경찰서장이 많았다. 1993년 종로서장으로 부임한 최기문 경찰청장은 관내 조계사에서 폭력분쟁 사태가 벌어져 중도하차했고, 2002년 김운선 전 종로서장은 대학생들의 미국대사관 난입 등에 대한 경비 책임을 물어 전보조치됐다. 1년 4개월의 종로서장 임기를 무사히 마친 이길범 총경(현 서울청 청문감사담당관)은 “재작년 말부터 이어진 촛불시위 등 대규모 집회를 비교적 불상사 없이 진행시켜 다행이었다”며 “종로서장으로서의 삶은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았다”고 고백했다. 종로서만의 인력으로 모자라 서울지방청의 기동대까지 시위 진압의 인력으로 투입하기도 했지만 모든 책임은 종로서장이 지기 때문에 더욱 부담스러웠다는 것이다.

    경찰서장들은 언행이나 행동, 언론과의 관계에서 상당히 신중한 처신을 보인다. 박기륜 서울 강남서장의 경우 “관내 사건 이외에 사적인 부분에 대한 인터뷰는 사절한다”며 말을 아꼈다. 자칫 사적인 발언이 곡해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경찰서장이라고 다 같은 줄 아나?

    최기문 경찰청장

    사실 적절치 못한 언행과 처신은 경찰서장이 가장 경계해야 할 요소로 손꼽힌다. 지난해 10월 말 당시 김성훈 영등포경찰서장(현 서울 관악경찰서장)은 노동자들의 잇따른 분신자살에 대해 ‘기획한 느낌’이라고 발언해 물의가 일자 서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양성철 전 서울 서초경찰서장은 지난해 말 조직폭력배 출신의 고향 후배의 부탁을 받고 고소 사건을 왜곡처리했다는 혐의로 직위해제됐다.

    한 경찰 관계자는 “출입기자와의 돈독한 관계는 경찰서장의 덕목”이라고 꼽았다. 시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문제점을 발견할 수도 있고, 활발한 의사소통으로 오해도 줄일 수 있다는 것. 기자를 기피하는 경찰서장의 경우 사소한 문제가 큰 문제로 확대돼 자리에서 물러나는 경우도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최근 경찰서장들이 갖는 큰 관심사는 ‘자치경찰제’다. 자치경찰제란 시·도 경찰청장 임명 제청권과 경찰서장 임명권을 시·도 자치단체장이 행사하는 지방경찰 인사제도를 뜻한다. 현재 참여정부의 ‘지방분권화’ 정책에 따라 자치경찰제로의 개편이 가시화되고 있는 상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중앙경찰제’를 통해 중앙에서 경찰 총경의 인사를 단행해왔다. 미국의 경우 중앙경찰인 FBI(연방수사국)와 각 지역의 민생치안을 담당하는 자치경찰을 이원화해 운영하고 있다. 경기 A시의 경찰서장은 “총경으로 처음 승진한 사람은 모두 3, 4군으로 분류되는 지방 경찰서장직을 거치는데 서울에서 내려온 지휘관과 지역 토박이인 부하 직원들이 서로 괴리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자치경찰제는 지역 사정을 잘 아는 경찰과 지역 주민과의 유대감을 더 높일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서울의 경찰서장과 달리 지방의 경찰서장은 지역 주민들의 더 높은 관심을 받는다. 나랏일을 하는 공무원에 대한 주민들의 따스한 시선이 남아 있는 것. 일부 지방에서는 총경 승진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나붙을 만큼 경찰서장은 영향력 있는 자리다. 지방 경찰서장들의 경우 서울보다 업무 부담이 덜해 지역유지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을 기회도 많다. 하지만 이 대목은 자치경찰제의 한계로 지적되기도 한다. 지역유지와 경찰서장의 유착이 고착화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 경찰서장의 인사가 얼마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졌을까. 참여정부가 들어선 이후 경찰 인사는 많이 투명해졌다. 또 올해 경찰청과 서울경찰청의 총경급(과장) 인사 과정에서 ‘직위공모제’가 도입돼 경찰관들의 정정당당한 경쟁이 이뤄졌다는 평가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TK 출신의 경찰간부가 주를 이뤘고, DJ정부에서도 ‘호남 편중 인사’란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이에 비하면 현 정부는 과거에 비해 ‘제도’로서 인사의 공정함을 찾아가고 있는 셈.

    그러나 총경급을 대상으로 한 ‘직위공모제’가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했다는 비판도 없지 않다. 한 경찰관계자는 “경찰청이나 서울경찰청의 감사, 인사, 공보과장 등의 요직은 4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으나 사실 인사 결과가 발표되기 전부터 내정자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다. 결국 나머지 지원자는 들러리가 아닌가”라고 꼬집었다. 김강자 전 총경(현 민주당 시민사회특별위원장)도 최근 있었던 경찰 인사에 대해 “최기문 경찰청장이 부임한 이후 인사 원칙이 비교적 공정해졌으나, 분명한 것은 여전히 권력층의 입김이 상당히 작용한다는 사실”이라며 쓴소리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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