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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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신비’ 찾아서 수수께끼 대결

‘이승 차지’ 타이틀 소별왕 허허실실 공격 … 지나친 난센스 결론 없어 다음 시합 준비

  • 류이/ 문화평론가·연출가 nonil@korea.com

    입력2004-01-15 14: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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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신비’ 찾아서 수수께끼 대결

    소별왕과 대별왕이 이승을 차지하기 위해 수수께끼 다툼을 벌인 뒤 꽃피우기 시합을 하고 있다.

    제대로 된 수수께끼는 ‘앉으면 커지고 서면 작아지는 것’처럼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빗대어서 표현하여 그 사물의 뜻이나 이름을 알아맞히는 말놀이다. 그래서 알 듯 말 듯하여 바로 맞힐 수 없다는 점이 수수께끼의 묘미이기도 하다. 그 ‘빗댐’이 기발하여 의표를 찌르거나 상상력을 넓고 깊게 자극할수록 재미있는 수수께끼가 된다.

    그런데 ‘이승 차지’라는 우주적인 과제를 놓고 대결을 벌이는 소별왕 수수께끼를 보고 필자는 무척 당황했다. ‘앉으면 커지고 서면 작아지는 것은?’ ‘천장’ 하듯 정답이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디를 찾아봐도, 이 수수께끼를 해설해놓은 게 없다. 소별왕 수수께끼와 씨름하느라고 또 밤을 새운다. 지난번에는 소별왕의 ‘용상’을 놓고 밤을 새웠는데…. 소별왕의 신명은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라야 제대로 만날 수 있나 보다.

    상고대인 과학과 철학의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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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수께끼라! 수수께끼에 천하를 건다. 이승과 저승을 놓고 겨루는 수단이 힘이 아니라 지혜 다툼이라는 것이 재미있지 않은가? 그 다툼이 수수께끼 놀이라는 것이 신화답다는 생각이 든다.



    수수께끼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이 소별왕 수수께끼에 담긴 의문은 ‘생명 현상 그 자체’다. 나무의 속이 여물었느냐 비었느냐는 언뜻 단순하게 보이는 질문이지만, 그것이 잎의 나고 짐과 연관됨으로써 그 본질에 가 닿는다. 처음에는 대나무냐 동백나무냐 하는 식으로 나무의 형상을 놓고 여물었느냐 비었느냐며 이야기를 시작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오래 버틸 수가 없다. 수수께끼를 풀려면 더 깊이 연구할 수밖에 없다. 질문에 대한 첫 답변을 정(正)이라고 놓으면, 반문은 반(反)이다. 무언가 미진하지 않은가? 독자들이 스스로 합(合)을 도출해야만 할 것 같다. 독자들이 참여함으로써 정-반-합의 변증적인 논리구조와 닮아간다. 가설을 놓고 논리적으로 검증하는 과정이 아닌가?

    ‘생명의 신비’ 찾아서 수수께끼 대결

    우리 조상들이 상상했던 도깨비의 모습 .

    자, 공룡의 3대 수수께끼와 비교해보자. 첫 번째 수수께끼는 공룡이 자신의 거대한 몸을 어떻게 지탱했을까 하는 점이다. 예전의 가설은 공룡이 수중에서 생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설은 오래가지 못했다. 범죄 현장에 남은 발자국으로 범인을 추적하듯, 공룡의 발자국은 공룡 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 발자국을 연구해서 공룡이 물에서 살았다는 수중생활설을 뒤집었다. 두 번째 수수께끼는 공룡이 온혈동물인가 하는 것이다. 겉보기에 공룡은 냉혈동물 파충류로 보이지만, 파충류로 생각하는 것은 편견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세 번째 수수께끼는 새가 공룡의 자손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다. 시조새를 매개로 새가 공룡으로부터 진화했다는 사실이 마치 정설처럼 이야기되어왔다. 그러나 이 정설은 깨졌다. 이 수수께끼들은 더 많은 화석을 연구하다 보면 하나씩 풀릴 것이다.

    수수께끼는 비교하는 형상을 매개로 하여 숨어 있는 세계의 문을 두드린다. 우리는 끊임없이 세계를 응시한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의 형상은 지극히 피상적이다. 겉을 보는 것만으로는 이 세계를 다 알 수 없다. 가만히 있던 산이 어느 순간 대폭발하며 지각 변동을 일으킬지 모른다. 우리의 세계상을 불쑥불쑥 부숴버리곤 하는 세계의 깊은 이면을 볼 수 없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작은 것인가? 얼마나 피상적이며 찰나적인 것에 불과한가?

    수수께끼는 형상 속에 숨어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세계의 문을 열고자 하는 자들의 놀이다. 믿음과 불안이 교차하는 심리적 떨림, 초조와 긴장! 그래서 ‘놀이’다.

    우주의 문 여는 신비로운 암호

    이 수수께끼는 나무들을 ‘관찰’하고 여름과 겨울을 ‘관찰’하는 데서 나온다. 관찰은 과학을 전제로 이뤄진다. 또한 이 수수께끼는 대나무와 동백나무를 ‘구별’하고 여름과 겨울을 ‘구별’하는 데서 나온다. 또한 서로 ‘비교’한다. 그리고 ‘추론’한다. 그것은 과학의 출발점이다. 이 소별왕 수수께끼는 불완전하지만 상고대인들이 발견한 최고의 과학과 철학 게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 수수께끼에서 세계를 향한 상고대인들의 도전과 모험의 기록을 읽는다.

    수수께끼로 건져 올린 ‘은유’들은 세계와 우주의 문을 여는 신비로운 암호다. 그것들은 끝없는 질문을 담고 우리 앞에 던져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답이 없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대별왕이 한 번 틀렸어도 계속 틀리란 법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별왕이 이겼으되 다 이겼다고 할 수도 없다. 소별왕이 정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기록에서는 소별왕의 반문으로 수수께끼의 대결이 끝나지 않는다. 반문에 대한 답변이 또 전개된다.

    ‘생명의 신비’ 찾아서 수수께끼 대결

    쉬멩이네 ‘궁궐 같은 집’이 천지왕의 동료인 벼락장군, 우뢰장군의 불벼락을 맞아 불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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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질문과 반문은 소별왕이 하는 말이고, 답변은 대별왕의 것이다. 이제 결말도 달라진다. 새로운 가설을 세워 답변을 낸 대별왕이 수수께끼 다툼에서 이긴 것이다. 새로운 정-반-합의 변증법적 논리 순환이 시작되고 있다. 정말 ‘열려 있는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상상력 훈련 ‘브레인스토밍’

    자, 다시 원래의 기록으로 돌아가자. 소별왕이 “형님이 수수께끼에서 지셨으니 저승으로 가십시오”라고 하는데도 대별왕이 눈만 멀뚱멀뚱한 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반응처럼 보인다. 아직 소별왕이 이긴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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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는 ‘빗댐’이 너무 지나쳐서, 난센스 수수께끼처럼 되었다. 왜 이렇게 멀리 난센스로까지 나아갔을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어디에서 출발했든 간에 생명의 신비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유는 당연히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난센스 수수께끼처럼 우리도 한번 훌쩍 뛰어넘어서 말해보자. 나무와 풀과 인간이 모두 똑같은 생명 원리를 갖고 있다는 인식을 갑작스레 드러내고 있다고나 할까?

    그러나 난센스 수수께끼라 하더라도 ‘세상에서 가장 예쁜 소는?’ 같은 난센스 퀴즈는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소? ‘미소’다. 정답이 있다. 그러나 소별왕의 수수께끼에는 정답이 없다는 게 특징이다. 물론 단답형이 아니다. 두 번째 수수께끼도 ‘열려’ 있다. 난센스처럼 보이지만 ‘빗댐’이라는 수수께끼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한히 계속되는 질문과 답변, 혹은 반문과 반문으로 연결될 수 있는 ‘고리’를 갖고 있다. 다른 기록에 나오는 대별왕의 답변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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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여기에 반문과 답변과 반문에 대한 반문이 또 이어진다고 생각해보라. 그것은 생산보다 서비스의 비중이 더 커진 사회, 상상과 실재가 구별되지 않는 세계인 오늘날의 상상력 훈련, 브레인스토밍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보다 분명한 것은 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이승을 차지할 수 없다는 조건이다. 이 수수께끼는 이승을 차지한 신의 지혜와 능력을 보여주는 신화의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말놀이기도 하지만, 또한 놀이 이상의 상징과 현실을 보여준다. 예컨대 유리는 ‘일곱 모가 난 돌 위의 소나무’ 밑에 숨겨진 반쪽의 칼을 찾아내야 아들을 증명하는 본메본짱으로 아버지 동명왕을 찾아갈 수 있다.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수수께끼에서 알은 무엇인가? ‘소나무’의 은유다. ‘소나무’ 뒤에다 무엇을 숨겨놓았을까? 그것은 ‘기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돌’은 ‘주춧돌’이 된다.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왕이 된 것도 마찬가지다.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점심에는 두 발로 걷고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알은 아침 점심 저녁이 숨겨놓은 상징을 찾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와 청년과 노인이었다. 그래서 답은 ‘인간’이었다. 그 한마디에 오이디푸스의 운명이 달라졌다.

    물론 우리 신화 소별왕 수수께끼에는 이와 같이 딱 맞아떨어지는 정답이 없다. 단답형이 아니다. 그래서 이 수수께끼 놀이만으로 이승 차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당연히 또 다른 시합이 필요하다.

    소별왕과 대별왕의 꽃피우기 시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다음을 기대해도 좋다. 수수께끼로 생명의 속성에 대한 지혜 다툼을 벌였으나 이승을 차지할 주인공은 결정되지 않았다. 바야흐로 두 별왕 형제는 꽃피우기 시합에서 생명력 그 자체를 놓고 대결을 벌일 것이다.

    소별왕의 나무 수수께끼 가설 및 그 검증과정은 공룡 수수께끼 가설 및 그 검증과정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둘 다 ‘생명의 신비’를 파헤치려고 한다. 그 점에서 같다. 나무 수수께끼의 가설과 공룡 수수께끼의 가설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공룡 수수께끼는 상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인류의 모든 사유와 과학의 힘으로 지금도 풀어나가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현대과학의 영역에 위치한다. 소별왕의 나무 수수께끼는 상고대 사유의 일단을 드러내는 수수께끼 그 자체로 신화의 영역에 위치한다. 그래서 생명 현상에 대한 ‘은유’로서만 자신의 역할이 한정되어 있다. 그것이 두 수수께끼의 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 소별왕의 나무 수수께끼는 상고대 사유의 일단을 드러내 보여준다. 수수께끼 그 자체가 상고대 사유의 방법론이 아니었을까? 거꾸로 생각해보자. 우주와 생명의 신비의 문을 여는 과학은 현대 신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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