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9

2003.04.10

꺼지지 않은 불씨 ‘가계부채’

정부 처방도 효과 별로 ‘가구당 3000만원 육박’ … 대출금리 상승 땐 가계 파산 시간문제

  • 박기수/ 연합인포맥스 기자 firstin@yna.co.kr

    입력2003-04-03 15: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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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꺼지지 않은 불씨 ‘가계부채’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이 은행 대출을 자제하자 시중은행들은 조건을 완화한 각종 대출상품을 내놓으며개인대출을 유도했다.

    우리나라 국민은 전통적으로 빚지고 사는 걸 싫어한다. 남한테 돈을 빌려 물건을 사는 것은 물론 돈벌이를 위한 차입도 탐탁지 않게 여긴다. 더욱이 경제발전 과정에서 만성적으로 겪는 자금부족 현상으로 정부주도형 경제개발 사업에 뛰어든 대기업들만 특혜성 자금을 빌릴 수 있었을 뿐 개인들에게 은행 문턱은 높기만 했다.

    부채증가율 심각한 수준 ‘작년 29%’

    그러나 개인들의 ‘돈가뭄’ 현상은 이제 옛말이 됐다. 발뒤꿈치를 들고도 쳐다볼 수 없었던 은행창구가 허리 아래로 내려와 말만 잘하면 담보 없이도 1000만원은 그 자리에서 ‘뚝딱’ 빌려준다. 집값의 30~40%만 있어도 은행에 집을 맡기면 등기일에 맞춰 은행에서 나머지 금액을 대출받을 수 있다. 길거리에서 5분만 시간을 내 카드 발급 신청서류를 작성해도 한 달에 300만원 정도는 내 돈처럼 쓸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빌려 쓰기 시작한 가계빚이 최근 몇 년 사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새 정부의 골칫거리가 되고 말았다.

    지난해 말 현재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439조원. 작년 국내총생산(GDP) 596조원의 74%를 차지하고, 가계금융자산 951조원의 절반 수준이다. 통계청 인구주택 총조사에 근거해 이를 전체 가구수로 나눠보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지난해 말 현재 가구당 부채는 2915만원. IMF 외환위기에서 힘겹게 한 발을 뺀 1999년의 1500만원에 비하면 3년 사이에 가구마다 빚이 갑절이나 불어난 셈이다. 도시근로자가 1년간 벌어 손에 쥘 수 있는 소득(처분가능소득)이 지난해 말 현재 2980만원임을 감안하면 가구당 부채가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알 수 있다. 한 해 동안 온 식구가 힘들게 벌어 입지도 먹지고 못하고 고스란히 저축해야 갚을 수 있는 규모라는 계산이 나온다.

    가계부채는 덩치 자체도 문제지만 증가 속도가 더 큰 불안요인이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정부와 금융당국이 각종 억제책을 내놓은 탓에 주택담보대출을 중심으로 증가 속도가 한풀 꺾이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꺼지지 않은 불씨 ‘가계부채’

    3월11일 재정경제부 업무보고를 받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노대통령은 취임 후 가계부채 대책 마련을 특히 강조했다.

    가계빚의 증가 속도를 보여주는 가계부채 증가율은 1999년 말 214조원으로 전년 대비 17% 늘어나기 시작해 2000년 25%(267조원), 2001년 28%(342조원), 2002년 29%(439조원)로 늘어 절대 규모는 물론 증가 속도도 위협적인 수준이다. 특히 지난해 29%라는 부채증가율은 지난해 경제성장률 6.3%, 가처분소득증가율 5%와 비교할 때 매우 빠른 속도다. 소득은 일정한데 빚 불어나는 속도만 빨라지다 보니 이대로 간다면 국민경제 전체가 파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부와 금융당국이 가계빚 증가 속도의 심각성을 감지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초부터다. 금융감독원이 지난해 2월, 가계대출에 대한 대손충당금 적립비율을 올리고, 한국은행이 가계대출이 많은 은행에는 중소기업 지원 저리자금인 총액한도대출 규모를 줄이도록 하는 등 가계대출 억제를 위한 대책을 속속 내놓았다. 그러나 금융당국은 가계빚이 그 이후에도 급증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 전반에 ‘사막의 모래폭풍’을 몰고 올 수 있는 위험요인이라는 사실도 간과한 듯하다.

    ‘창구지도’ 성격의 이런 대책은 정부의 저금리정책과 집값 상승에 대한 기대로 희망에 부푼 개인에게 경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IMF 외환위기로 교훈을 얻은 기업들이 투자를 주저하자 은행들은 자금이 필요한 대체재를 찾아 개인대출시장에 너도나도 뛰어들었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대출처를 물색하던 은행으로서는 개인대출이 적격이었고, 은행의 방향전환은 5~6%의 싼 이자라면 집 한 채 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서민들의 요구와 맞아떨어졌다. 주택담보대출 중심의 은행권 가계대출은 재작년 말 전후로 꿈틀거리기 시작해 지난해 3월 은행권이 새로 빌려준 개인대출이 한 달에 무려 8조원에 달했고 최근 들어 증가세가 다소 둔화되기는 했지만 지난해 6월과 7월에는 4조원대, 9월과 10월에는 6조원대의 빠른 증가세를 이어갔다.

    꺼지지 않은 불씨 ‘가계부채’
    다급해진 금융당국은 지난해 10월 주택담보인정비율(LTB)을 주택 가격의 60%로 내리고 담보대출도 신용대출처럼 개인의 상환능력을 감안해 신용평가를 의무화했다. 동시에 자기자본비율(BIS) 위험가중치를 최대 70%로 상향조정토록 했고 개인부채비율 250% 초과자에 대해 신용대출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집값이 이미 큰 폭으로 오른 데다 정부 대책이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하면서 가계부채는 지난해 말을 기점으로 증가세가 꺾이기 시작해 은행권 가계대출은 지난해 12월 2조3000억원 증가했고, 올 1월에는 3000억원 감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2월 들어서 2조7000억원으로 다시 늘었고 3월에도 2조원을 웃돌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부는 집값 상승과 저금리 정책으로 가계부채가 위험 수준으로 늘어났다고 보고 각종 규제책을 만들어 ‘두더지 잡기’식으로 규제에 나섰지만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부채가 추가로 늘어나는 것은 이미 마련된 대책들로 억제할 수 있겠지만 이미 고무풍선처럼 부풀려진 빚은 잘못 건드리면 국민경제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잠재 불안요인이기 때문이다.

    소비·투자 심리 위축 … 가계부채 압박

    이 때문에 참여정부는 출범 전부터 가계부채의 심각성을 인식해 대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뾰족한 대안이 없는 실정이다. 주무부처인 재정경제부(이하 재경부)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마땅한 대책이 없다고 가계부채 문제를 농어촌 부채탕감과 같은 방향으로 풀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재경부와 관계당국은 우선 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대출 72조원 중 주택담보대출 24조원에 대해서는 상환을 연장해주는 동시에 기존 3년 만기의 대출구조를 10년에서 최장 30년까지 분산시키는 등 부채상환 속도를 조절하기로 했다.

    정부의 또 다른 고민은 대책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가계부채의 외곽을 감싸고 있는 경제 전체가 불안하다는 데 있다. 길어야 한 달로 예상됐던 이라크전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는 데다 북핵 위기까지 겹쳐 소비와 투자 심리가 위축되면서 가계부채라는 ‘고무풍선’이 전방위에서 압박받고 있기 때문이다.

    가계대출 만기연장과 신용불량자 회복책 보완 등으로 가계부채 문제를 풀려던 정부로서는 이런 뜻밖의 악재를 만나 가계빚이 꺼지지 않은 불씨로 남을까 우려하고 있다. 당초 5%대 성장과 30억 달러의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됐던 ‘한국 경제호’가 이라크전 장기화와 고유가로 최근엔 3%대 성장 전망으로 추락했고 경상수지는 적자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빚 갚는 데 써야 하는 가구당 가처분소득은 지난해(2980만원)보다 늘어날 가능성이 매우 낮은 반면 가계부채는 3000만원을 크게 웃돌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금융시장이 요동칠 경우 시장금리와 연동하는 대출금리가 상승하면 가계파산은 시간문제다. 금리가 0.5%포인트만 올라도 가계 전체의 한 해 이자만 2조2000억원이나 늘어난다.

    가계대출은 흔히 ‘날아간 총알’에 비유된다. 이미 날아간 총알을 방아쇠 당기기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한번 이루어진 대출도 다시 거둬들이기 어렵다. 정부는 경기 침체를 막는 데 최선을 다하고, 가계는 무분별한 대출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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