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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룽지만큼은 해야 될 텐데…”

원자바오 신임 총리, 중국 경제개혁 일등공신 주룽지 그림자 벗어나기 안간힘

  • 강현구/ 중국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 박사191710@hanmail.net

“주룽지만큼은 해야 될 텐데…”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이하 전인대)를 통해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시대가 열렸지만 언론의 관심은 여전히 새 총리보다 은퇴한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에게 쏠려 있다. 중국 경제에서 주룽지 전 총리의 의미는 그만큼 크다.

주룽지를 가리켜 흔히 중국 경제의 차르라 부른다. 1991년 부총리로 발탁돼 경제 분야를 전담해온 그에게 딱 맞는 표현이지만, 그 이면에는 주룽지의 강경 개혁 드라이브에 대한 비난의 의미도 섞여 있다. 주룽지의 취임 일성은 잘 알려진 대로 “100개의 관을 준비하라”였다. 개혁에 반대하는 자들의 관과 자신의 관을 포함해 100개의 관을 준비하라는 그의 일갈은 중국 경제개혁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주룽지는 취임 당시 거품 징후를 보이던 중국 경제를 연착륙시키며 연 8%대의 안정적인 고성장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이 과정은 반발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주룽지의 개혁 드라이브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그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까지 걸면서 저항했다. 중국 인민들의 반응도 초기에는 환영 일색이었으나 사회보장제도의 축소 등으로 고통분담이 요구되자 서서히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주룽지는 중국의 경제개혁이라는 자신의 꿈에 한발 다가서기는 했지만, 최고지도자의 꿈은 버려야 했다. 그에게 따라붙던 ‘미래의 지도자’ ‘당에는 후진타오(胡錦濤), 정부에는 주룽지’라는 인민들의 하마평은 옛이야기로만 남게 됐다.

전인대 개막식서 열렬한 박수 받아

이제 미련 없이 총리자리를 떠난 그에게 인민들의 박수가 이어지고 있다. 전인대 개막식인 3월5일 그가 국정보고를 위해 입장하자 2916명의 대표들이 1분여 동안 열렬한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이에 주룽지 전 총리는 “우리는 단결과 분투로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세계가 공인하는 위대한 성과를 이뤄냈다”고 자평하며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중국 총리는 어려운 자리다. 형식적으로 국무원의 수장인 총리는 다른 나라의 행정수반에 준하는 막강한 권리를 행사한다. 하지만 중국의 정치구조가 당을 중심으로 돌아가듯이 총리 자신이 속한 정치국 상임위원회의 결정 없이는 아무 일도 못한다. 특히 당총서기의 권한이 강화될수록 총리의 입지는 그만큼 작아진다. 중국의 영원한 총리로 불리며 총리직의 전형을 만든 저우언라이(周恩來)에게 지금도 ‘영원한 2인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중국의 총리들은 자신의 모든 권한이 아니라 자신의 역량에 맞는 특화된 권한을 행사하면서 중용의 길을 걸어왔다. 초대 총리인 저우언라이는 탁월한 외교력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총리직을 승계한 화궈펑(華國鋒), 자오쯔양(趙紫陽)은 나중에 국가주석에 올랐으니 예외로 치더라도, 리펑(李鵬)의 경우 총리 시절에는 행정업무에 중심을 두면서 2인자의 자리를 지켰다.

이런 중국 총리의 위상에 경제지도자라는 새로운 위상을 더한 것이 주룽지였다. 그는 총리가 된 후에도 자신이 부총리 시절 총괄하던 경제 분야에 전념하며 총리와 경제전문가를 동의어로 만들었다. 총리직에 대한 이런 인식은 후임 총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돼 원자바오 신임 총리의 경우 농업 분야 전문가였지만 과연 총리 자격이 있는지 시비가 있었다.

원자바오는 1942년 톈진에서 출생하여 톈진의 명문인 난카이 중학을 다녔다. 저우언라이와는 난카이 중학 동문. 이후 베이징 지질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졸업 후 간쑤성에 배치돼 오랫동안 지방을 돌던 그는 86년 후진타오의 정치적 후원자이기도 한 송핑의 추천으로 44세에 중국 공산당의 핵심요직인 중앙 판공청 주임으로 발탁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특히 총서기가 후야오방(胡耀邦), 자오쯔양, 장쩌민(江澤民)으로 바뀌는 동안 줄곧 그 자리를 유지함으로써 특유의 정치력을 과시했다. 98년에는 주룽지 총리의 취임과 함께 부총리로 임명돼 농업전문가로서 자신의 영역을 개척했고 정치수완, 인품, 조정능력 모두 높이 평가받았다.

원자바오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계기는 98년 창장(長江) 대홍수를 진두지휘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창장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면서 하류의 우한(武漢)지구를 보호하기 위해 제방을 무너뜨려 상류 소도시를 수몰시켜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결단이 요구될 때 그는 제방 파괴를 보류하고 창장의 수위를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자연스럽게 창장 수위가 낮아짐으로써 엄청난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원자바오는 신중하고 인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심는다.

이제 중국의 경제수장이 된 원자바오는 중국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과 비상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후진타오가 장쩌민의 잔영을 지우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그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주룽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원자바오는 3월18일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서 지역 격차와 농촌의 정체, 실업자 증가를 당면과제로 내세워 강한 개혁의지를 표명하면서도 “주룽지 전 총리와는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에 “나는 온화한 사람이지만 신념과 정견, 책임감이 있다”라며 차별화를 시도했다.

이 자리에서 원자바오는 자신의 정책방향을 농촌·기업·금융·행정 분야의 4대 개혁 추진으로 공식화했다. 이는 주룽지가 추진해온 3대 개혁(국유기업·금융·행정 개혁)에 기초하면서도 자신의 전문 분야인 농업과 실업문제를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는 후진타오가 강조한 친민노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어서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그는 정치개혁에 대해 “정치체제의 개혁은 당·정부의 흔들리지 않는 목표”라고 전제하면서 민주적인 정책결정시스템, 법률에 근거한 행정집행, 의회와 여론에 의한 감독 강화를 강조함으로써 자신이 민주적인 개혁선상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원자바오의 행보는 계속적인 개혁을 추구하면서도 제도와 민주적 절차에 의한 개혁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주룽지와는 다르게, 덜 충격적인 방법을 쓰겠다는 것이다. 또한 원자바오는 농민, 실업자 등 서민을 챙기겠다는 의지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개혁구상을 주룽지의 과격한 개혁과 비교하면서 입지를 다지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 경제의 현 상황은 주룽지가 취임할 때만큼이나 어렵다. 특히 주룽지가 주도한 부패와의 전쟁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는 평을 받을 만큼 만성적인 부패에 시달리고 있는 중국 경제계에서 원자바오의 온화함이 효과를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만일 상황이 더 어려워진다면 중국 인민들은 주룽지의 칼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주룽지는 중국 인민의 가슴에 또 하나의 영원한 총리로 남게 됐다.





주간동아 379호 (p56~57)

강현구/ 중국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 박사1917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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