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67

2003.01.09

비췻빛 바다와 순백의 설경

  • 양영훈 / 여행작가 www.travelmaker.co.kr

    입력2003-01-03 09: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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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췻빛 바다와 순백의 설경

    추암해변의 아름다운 풍광. 비췻빛 바다 위에 우뚝 솟은 기암괴석들이 장관을 이룬다.

    이번 여행의 테마는 ‘일출’과 ‘눈꽃’이다. 동해안 제일의 일출 명소인 추암해변에서 해돋이를 감상한 뒤 태백산으로 이동해 눈꽃 산행을 체험하는 일정으로 짜여졌다.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이맘때의 여행 테마로는 안성맞춤이다. 게다가 무박2일의 일정으로 바닷가 해맞이와 설산 산행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첫 행선지는 강원 동해시의 추암해변. 밤 11시 정각에 서울을 출발한 관광버스는 일출을 4시간쯤 앞둔 오전 3시40분경 추암해변 부근의 한 음식점에 도착했다. 고속도로에 들어서면서부터 줄곧 눈을 붙이긴 했지만, 잠자리가 불편하다 보니 온몸이 뻐근하다. 따뜻한 온돌방에서 한숨 푹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인데, 때마침 가이드가 “음식점 큰 방을 따뜻하게 해놓았으니 아침 식사시간 전까지 두어 시간 동안 편하게 주무시라”고 일러준다. 훈기 가득한 온돌방에서의 짧은 숙면만으로도 온몸의 피로가 말끔히 가셨다. 김치찌개로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친 뒤 추암해변으로 이동했다. 추암해변은 묵호읍과 북평읍이 합쳐져 동해시가 되기 전까지는 삼척에 속했다. 삼척 땅의 풍광 빼어난 해변이라고 해서 흔히 ‘삼척 해금강’이라 불렸다. ‘동해 해금강’이 된 지금도 이곳은 동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으로 손꼽힌다.

    해변의 북쪽 끝에는 야트막한 동산이 솟아 있고, 바닷가에는 유명한 촛대바위(錐岩)를 비롯한 기암괴석들이 늘어서 있다. 게다가 아름드리 해송숲과 고운 모래가 깔린 백사장, 밑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비췻빛 바다와 장엄하고 화려한 해돋이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그러나 추암해변의 해돋이를 끝내 보지 못했다. 금세 눈이라도 흩뿌릴 듯 잔뜩 흐린 날씨 탓이다.

    오전 8시에 추암해변을 출발한 버스는 오십천 물길과 나란히 달리는 38번 국도를 따라 태백시로 향했다. 9시를 조금 지나서 해마다 태백 눈축제의 주 행사장이 되는 당골 광장에 도착했다. 산중턱까지 구름 같은 안개로 뒤덮인 걸 보니 정상 부근의 환상적인 눈꽃은 무망할 듯싶다.

    태백산은 이 땅 곳곳에 실핏줄처럼 뻗은 산줄기가 하나 되는 곳에 솟은 영산(靈山)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겨례의 성소(聖所)로 여겨져왔다.



    해맞이와 설산 산행을 동시에

    비췻빛 바다와 순백의 설경

    추암해변의 일출전망대에 서 해돋이를 기다리는 관광객들(위).자욱한 안개 속에서 태백산 천제단으로 향하는 등산객들(아래).

    한겨울의 태백산에서는 나뭇가지마다 화사하게 피어난 눈꽃을 눈이 시리고 아프도록 감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번 산행에서는 태백산의 눈부시도록 화사한 눈꽃을 볼 수 없었다. 열흘 전쯤 내린 폭설이 며칠 동안의 푸근한 날씨에 모두 녹아내렸기 때문이다. 숱한 등산객의 발길에 다져진 길만 온통 빙판으로 변해 있었다. 아이젠 없이는 한 발자국도 옮기기 힘들 지경이다. 게다가 태백산의 육중하고 후덕한 몸매는 죄다 자욱한 안개 속에 감춰져버렸다. 기대했던 많은 것들이 어긋난 산행인데도, 발걸음은 가볍고 마음은 푸근하다.

    약 2시간30분 동안의 산행 끝에 천제단 바로 아래에 자리잡은 망경사에 이르렀다. 이제 천제단까지는 약 500m가 남은 셈이다. 한달음에 닿을 듯이 가까운 거리지만 발걸음은 눈에 띄게 더뎌진다. 몇 십m 앞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짙은 안개가 낀 데다 볼을 할퀴는 바람은 칼날처럼 섬뜩하고 얼음처럼 차갑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미처 사그라지지 않은 설경이 퍽 아름답다. 게다가 온 산을 뒤덮은 안개는 나뭇가지마다 눈꽃보다 더 화사한 상고대를 피웠다. 상고대 만발한 비탈길을 올라서면 천제단이다. 편마암으로 둥그렇게 쌓은 천제단 안에는 한배검, 즉 단군께 제를 올리는 단(壇)이 마련돼 있다.

    비췻빛 바다와 순백의 설경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왼쪽). 태백산 천제단에서 만난 도인. 이미 신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한다(오른쪽).

    천제단 안에는 도인(道人)풍의 한 노인도 있었다. 제단에 올라선 그 노인은 헉헉거리며 천제단 안으로 들어 오는 등산객들을 가련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곤 했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 그이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르신께서는 도를 닦는 분인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그럼 접신(接神)은 하셨습니까?”

    “그건 기본이죠. 맨 처음 치르는 통과의례입니다.”

    “그러면 입신(入神)하셨습니까?”

    “그렇죠. 이미 선계(仙界)에 들었습니다. 그러니 추위도 배고픔도 모르죠. 늙지도 않고요.”

    놀라운 얘기다. 그런데도 놀라움보다는 재미있다는 생각이 앞선다. 천제단에서 다시 망경사로 내려와 추위를 녹이기 위해 컵라면을 시켜 먹던 중 또 다른 도인을 만났다. 이번에는 출가한 지 얼마 안 됐다는 초보 도인이다.

    “태백산에는 신선이 많습니까? 아까 천제단에서 신선이라는 분을 만났는데….”

    “에이, ‘무늬만’ 신선이에요.”

    “그럼 가짜라는 말입니까?”

    “그렇죠. 우리나라에 천문(天門)을 열 수 있는 진짜 신선은 다섯밖에 없어요.”

    “천문을 어떻게 엽니까?”

    “거 있잖아요.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가도 그분들이 주문을 외면 구름 한가운데가 뻥 뚫리면서 하늘이 열려요.”

    “그러면 그곳을 통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건가요?”

    “그렇죠.”

    “천문 열리는 걸 직접 보셨나요?”

    “몇 번 봤죠.”

    “그럼 저 같은 속인도 옆에서 구경해볼 수 있습니까?”

    “못 볼 것도 없죠.”

    언젠가 천문이 열리는 광경을 한번 보기 위해 태백산을 다시 찾겠노라 다짐하고 하산을 시작했다.

    망경사를 출발한 지 1시간30분 만에 당골 광장에 도착했다. 다음 행선지는 백단사 방면의 국도변에 위치한 한얼스파월드(033-554-0633). 뜨거운 약수탕에 잠시 몸을 담그니 금세 눈이 사르르 감긴다. 산행의 피로를 푸는 데는 역시 온욕(溫浴)이 제격이다. 서둘러 몸을 씻고, 뒤늦은 점심식사(자유식)를 마친 뒤에 태백역으로 향했다. 오후 4시27분에 출발하는 청량리행 무궁화 열차를 타기 위해서다. 열차가 태백역을 출발할 즈음 차창 밖에는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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