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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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가르치는 보람에 산다

풍부한 실무 경험 ‘겸임교수’ 강의는 A+ … 자기 계발·명예로운 삶 ‘일석이조’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2-11-21 10: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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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 가르치는 보람에 산다

    최창화 재능대 겸임교수(기업은행 차장),황선길 홍익대 겸임교수(전 MBC PD),신용철 서울여대 겸임교수(SBS 아나운서),변태형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 겸임교수(귀금속공예 전문가)(왼쪽부터)

    11월14일 오후 용인대학교 자연관 7201호. 1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한 ‘우리말과 글’이란 제목의 교양강좌가 진행되고 있었다. 법정스님의 수필 ‘무소유’를 놓고 교수와 학생들의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이날 강의를 맡은 교수는 월간 정경뉴스 이계홍 상무. 이상무는 겸임교수로 2000년부터 교양학부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동아일보 문화일보 대한매일 등에서 기자로 일한 언론인 출신. 이상무는 “대학 강의를 통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며 “30~40대 직장인들에게 대학원에 진학해 겸임교수에 도전해보라고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3월부터 서울대 공과대학에서 ‘기술 혁신과 경영’이라는 과목을 맡아 강의하고 있다. 겸임교수인 윤부회장은 산업현장에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론에만 치중하기 쉬운 학생들에게 ‘현장’을 가르친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생산 부문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데는 서울대 공대 출신의 역할이 컸다”며 이공계 기피 현상 등으로 기가 죽어 있는 제자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것도 그의 몫이다. 그의 강의엔 수업시간마다 150명 이상의 학생들이 모여든다. 서울대 공대의 ‘스타 교수’인 셈이다. 자리를 잡지 못한 학생들은 3시간 동안 서서 강의를 듣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학가 영입 경쟁 많게는 100~200명

    대학들이 경쟁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겸임교수’ 제도가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직장인과 전문직 종사자 사이에서 자아실현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대학들이 실무·현장 중심 교육을 강화하면서 누구나 조금만 노력하면 ‘교수 명함’을 손에 쥘 수 있게 된 것. 수년 전만 하더라도 겸임교수는 변호사나 의사 등 특수한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이었지만, 현재는 대학마다 적게는 10여명 안팎에서 많게는 100~200명의 겸임교수가 강단에 서고 있다. 민계식 현대중공업 사장(서울대), 이재웅 다음커뮤니케이션 대표(연세대), 정병철 LG전자 사장(연세대), 박인구 동원F&B 사장(이화여대), 심이택 대한항공 사장(항공대) 등 상당수의 CEO들도 각 대학에서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겸임교수들은 “‘보수’가 아닌 ‘보람’과 ‘명예’ 때문에 강의를 한다”며 “은퇴 후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있다는 게 행복하다”고 입을 모은다. 경원대에서 겸임교수로 일하고 있는 대천실업 이광수 전무(61)는 연간 10편 이상의 신문칼럼을 집필한다. 겸임교수란 감투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1965년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무역업계에서 일하던 이전무가 다시 공부를 시작한 것은 지난 85년. 20여년간의 직장생활로 몸과 마음이 지쳐 있을 때였다. 40대 중반에 다시 책을 잡겠다고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87년 연세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 94년 동국대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생활을 17년째 계속하고 있습니다. 교수에 신문 칼럼니스트까지 됐으니 성공한 셈이지요. 노력하는 자에겐 반드시 보답이 따른다는 경구를 젊은 직장인들이 가슴에 새겼으면 합니다.”



    겸임교수들 중 상당수는 이전무와 같이 늦깎이로 다시 배움의 길에 나선 사람들이다. 실무 경험과 뒤늦게 받은 학위를 바탕으로 교수 자리를 차지한 것. 창신대(마산)에서 8년째 겸임교수로 일하고 있는 최충경 경남스틸 대표(57)는 “공부를 게을리 하는 기업인은 급변하는 경쟁 사회에서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며 “교수 자리는 끊임없는 자기 계발 과정에서 획득한 부산물일 뿐”이라고 말한다. 최대표는 직장생활을 하며 교육학 석사, 경영학 석사, 경영학 박사 학위를 획득했고 노동대학원을 수료했다.

    서울여대 신방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는 SBS 신용철 아나운서도 회사 일을 하며 연세대 행정학 석사, 한양대 언론정보학 석사를 거쳐 현재 박사과정에 적을 두고 있다. 신씨는 “강의를 통해 방송에 필요한 현장감각을 얻기도 한다”면서 “꼭 겸임교수가 목표는 아니지만 뒤늦게 공부를 다시 시작한 동료들이 아주 많다”고 말했다.

    겸임교수들 중엔 평범한 직장인들도 많다. 최창화씨(45·기업은행 문화홍보실 차장)는 10년째 재능대(인천)에서 강의해왔다. 그가 학교에서 맡고 있는 강의는 ‘사진 실무’. 대학 때 부전공으로 이수한 사진을 취미생활로 계속하면서 대학에 출강까지 하게 된 것. 최씨는 은행 홍보 업무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성균관대 신문방송대학원에서 PR광고를 공부하기도 했다. 최씨는 “2시간짜리 강의를 준비하는 데 꼬박 이틀이 걸리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만큼 보람 있는 일은 없다”며 “직장인들의 경우 자신의 경험에 약간의 노력을 보탠다면 누구나 겸임교수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최씨는 또 “노후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게 샐러리맨들에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고 덧붙였다.

    겸임교수가 되기 위해 꼭 학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 겸임교수인 변태형씨(45)는 초등학교 졸업이 최종 학력이다. 그러나 풍부한 현장 실무 경험과 기술을 갖고 있다. 귀금속공예 기술 분야의 국내 1인자로 통한다. 강의는 종종 서울 종로구 봉익동에 위치한 그의 세공소에서 이뤄진다. 이론보다 실습을 중요시하는 그의 강의 방식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수들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변씨는 “대학교수가 되고 난 뒤 이론 중심으로 짜여진 한국 미술 교육의 문제점을 직시하게 됐다”며 “학생들이 전임교수들에게서 배우지 못하는 부분을 보충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MBC PD 출신인 황선길 홍익대 애니메이션학과 겸임교수(63)도 “현장에서 일해온 전문가들이 대학에 와보면 한심한 생각이 들 때가 많다”면서 “실무 위주의 교육은 세계적 추세”라고 말했다. 그는 80년대 후반 국산 TV 만화영화의 태동기 때부터 10여년 동안 만화를 제작해왔다. 애니메이션 분야에선 국내 최고인 셈이다.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한 황교수는 겸임교수임에도 불구하고 대학 내에 연구실까지 갖고 있다. 국문학 전공자가 예술대학 교수를 하는 것은 과거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대학들이 겸임교수 제도를 인건비 절감과 교수 확보율을 높이는 수단으로 악용한다는 비판도 없지 않다. 싼값으로 겸임교수를 채용함으로써 재정 부담을 덜고 손쉽게 교수 숫자를 늘린다는 것. 하지만 전문가들은 “대학들이 재정적 이유가 아닌 현장교육을 위한 보조적 수단으로서 겸임교수를 적극 활용한다면 결국 대학교육 전반의 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당장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실무형 전문가를 양성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실용 분야 특성화 사업에 나선 지방대학들에겐 겸임교수들이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다. 실무 중심 교육을 강조하는 대학이 계속 늘어가는 추세로 미뤄볼 때 겸임교수에 대한 수요 또한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겸임교수들은 한결같이 “보람 있고 행복한 노후,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는 투잡(two job), 재충전 기회를 원한다면 대학 문을 두드려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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