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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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를 지키는 산중 가족들

  • 정찬주 / 소설가

    입력2002-10-17 09: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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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수를 지키는 산중 가족들
    도회지로 나갔다가 장판지 몇 장과 풀을 구해 한나절 만에 돌아왔다. 지난 여름 온돌방을 한 칸 마련했는데,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마다 연기가 자꾸 새어 나와 방바닥에 검댕이 묻어나서였다.

    반나절 정도의 외출인데도 도시에 갔다 오면 몸이 무겁다. 이태 만에 산중 생활에 완전히 적응이 된 모양이다. 산중 처소로 돌아와 바람을 쐬고 나니 도회지에서 묻혀온 때가 씻긴 듯 몸이 개운해진다. 빈집에 청풍(淸風)이 늘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나서는 뒷산을 한시간 정도 오르고 내려와 찬물에 몸을 헹군다. 사람이 두 발로 걷는다는 것은 보행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산길을 무심코 걷다 보면 마음을 탁하게 했던 희로애락의 감정이 침전되고 어느새 근원으로 돌아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

    무소유 이해, 자연에서 깨달음 얻으니 큰 기쁨

    산행할 때마다 나는 순한 개 보현이와 문수를 데리고 다닌다. 개들은 말이 없기 때문에 내 침묵의 산행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명상거리를 제공해준다. 외출하면서 녀석들에게 각각 두 끼분의 먹이를 놓고 집을 비웠는데, 돌아와 보니 식탐이 강한 문수까지도 한 끼분을 남겨놓았다. 먹이를 줄 때는 다 먹어치울 듯이 덤벼들었지만 결국은 욕심을 자제했다.



    사람들이 ‘개 같은 놈’ 하고 욕하지만 그럴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겉보기에는 점잖지만 맹수처럼 돌변하여 육식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나미가 떨어지기도 한다. 보현이를 볼 때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길 잃고 병든 문수가 처음 왔을 때 보현이는 갑자기 낮에 자신이 먹었던 먹이를 토해 주었다. 이 정도면 뇌물 좋아하다 감옥 가는 자칭 타칭 사회지도자들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할 게 없다.

    집 축대 구멍에서 사는 뱀 한 마리를 보고서도 느끼는 게 많다. 뱀은 습한 날이면 내 처소의 토방으로 올라와 똬리를 틀고 몸을 말린다. 나는 뱀에게 아직 이름을 지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화엄이라고 지어줄 생각인데 올해는 이미 늦었다. 녀석이 며칠 전까지만 해도 동면을 준비하느라 슬슬 기어다니더니 요새는 보이지 않는다.

    뱀이 집을 떠나지 않는 것은 집 앞에 있는 연못 때문이다. 개구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연못은 뱀에게는 진수성찬의 식탁인 셈이다. 나도 처음에는 녀석의 살의(殺意)를 경계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탐욕만 생각했던 나의 기우일 뿐이었다.

    뱀은 말 그대로 소식주의자라 할 만했다. 연못 속 개구리들의 숫자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한 달 전 뱀이 개구리 한 마리를 물고 가는 것을 보고는 장대로 툭 건드려 개구리를 살려주고 말았다. 개구리는 풀숲으로 사라졌고, 녀석은 삐쳐서 집 밖으로 나갔다 돌아왔다.

    밭에서 콩을 주워 먹고 사는 산비둘기도 마찬가지다. 배만 차면 결코 사람이 먹을 것까지 탐내지 않는다. 수확할 시기를 알려주는 콩잎은 서리가 더 내려야 누렇게 변할 것이다. 잎이 푸르러서 아직은 수확할 시기가 아니다. 콩이 익어가는 콩밭을 보면 산비둘기도 인간과의 공생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지난 봄에 콩밭을 만들 때도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고참 농부의 말대로 산비둘기 몫까지 계산해서 콩을 듬뿍 뿌려주니까 녀석들은 콩밭을 더 이상 해치지 않았다.

    산중에 들어와 살다 보니 미물(微物)들에게 배우는 게 많다. 하긴 내가 미물이라 호칭한 것도 어폐가 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생겨난 말이기 때문이다. 예우는 못할망정 산중 가족으로서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벌레는 찻잎을, 연못 속의 미꾸라지는 모기 유충을 먹는 데 모두 제 분수를 지킬 줄 안다. 어쩌면 주변과의 공생을 모르고, 자기 배만 불리다가 화를 자초하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초로의 나이가 되면서 내 귀밑머리에도 하얀 서리가 내리고 있다. 선가(禪家)에서는 이것을 염라대왕의 편지라고 한다. 부를 때가 됐으니 욕심을 줄이고 살라는 전언이라는 것이다.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산중으로 내려와 살면서 비로소 무소유를 이해하고, 자연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고 있으니 그것만 계산해도 남는 살림살이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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