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9

2002.06.20

한국 축구는 한국 경제 ‘판박이’

뼈 깎는 체질개선 혹독한 시련 딛고 부활… 선진화 위한 창조성과 개혁 더 필요

  • <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입력2004-10-13 14: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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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축구는 한국 경제 ‘판박이’
    ”나는 궁극적으로 한국 축구가 경쟁력을 갖춘 강력한 팀으로 성장해 세계무대에 서는 데 작은 기여를 하고 싶다. 한국 축구의 밝은 미래에 내가 약간의 보탬이라도 된다면… (나는) 큰 성취감을 얻게 될 것이다.”(히딩크 감독의 ‘타임’지 인터뷰 내용 중)

    히딩크 감독은 자신의 약속대로 한국 축구팀을 세계적인 강팀으로 조련해냈다. 6월4일 폴란드전 승리와 10일 미국전 무승부를 이끌어냄으로써 그는 이제 한국 축구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 됐다.

    한국 축구는 한국 경제 ‘판박이’
    한국 축구의 선전은 97년 외환위기를 겪은 한국 경제의 극적인 부활과 함께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사실 축구에 관한 한 변방에 불과했던 한국이 외국인 감독을 불러들여 세계 강호들과 어깨를 겨눌 수 있을 만큼 성장한 것이나, 한국이 외환위기 이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경제개혁을 함으로써 국가 신용등급을 다시 A등급으로 끌어올린 과정을 짚어보면 닮은꼴이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한국 축구와 한국 경제 사이에 차이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히딩크 감독과 김대중 정부는 리더십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히딩크 감독은 과거의 명성이나 학연, 지연 등은 배제한 채 오로지 실력과 성실성만으로 선수를 선발해 세계적인 팀으로 조련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개혁 과정에서 여러 가지 한계점을 드러냈다. 과거 정권에서 보인 정실 인사를 여전히 극복하지 못해 극한 반발을 자초했고, 국가 신용등급 향상에도 불구하고 경제개혁은 여전히 미진하다는 지적을 듣고 있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장하성 고려대 교수(경영학부)는 “한국 축구나 한국 경제는 이미 실패했기 때문에 과거의 경험이 더 이상 자산이 될 수 없었다”고 전제하고 “과거와 얼마나 절연했는지가 차이를 결정하는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히딩크의 경우 한국 축구를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식’ 축구를 완전히 무시하고 새 그림을 그림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던 데 반해, 김대중 정부는 과거 경험과 관행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제관료들을 개혁의 전위로 삼았기 때문에 개혁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팀을 강팀으로 만든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한국 축구를 세계 축구 흐름에 맞춰 선진화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투지만 앞세워 무조건 뛰기만 했던 한국 축구를 히딩크가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미드필드에서부터 상대를 강하게 압박하는 선진축구로 개조해낸 것이다.

    한국 경제가 짧은 기간 안에 다시 외국인 투자자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과정도 비슷했다. 과거 고도성장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재벌 위주의 성장 시스템에 메스를 들이대 글로벌 스탠더드에 의한 경제개혁을 추진해 왔기 때문이다. 비록 시행착오도 많았고, 아직도 미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긴 하지만 김대중 정부가 추진해 온 기업·금융·공공·노동 부문 등 4대 부문 개혁은 우리 경제를 선진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물론 이 과정에 반발과 저항이 따른 것은 당연했다. 히딩크는 한국팀이 작년 5월30일 컨페더레이션스컵 프랑스와의 개막전에서 0대 5의 참패를 당한 이후 시련을 겪었다. ‘외국인 감독 무용론’이 다시 대두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부 전문가들은 히딩크가 고집스럽게 체력훈련에 집중하는 것에 대해서도 시비를 걸었다. “한국 선수들은 체력보다는 기술이나 전술이 문제인데, 본선을 불과 몇 달 앞둔 상황에서도 체력훈련을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의 지도력이 의심스럽다”는 반응이었다. 과거처럼 하루빨리 대표팀을 확정해 전술훈련을 반복해야 한다는 게 대다수 국내 전문가들의 지적이었다. 한마디로 ‘과거 한국식’대로 해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이들의 주장은 마치 현 정부의 경제개혁에 대한 재벌의 반발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현 정부가 부실 계열사 지원 등 선단 경영을 해체하려고 하자 재벌들은 “재벌이 있었기 때문에 과거 고도성장이 가능했다는 점을 모르는 것 아니냐”고 일제히 반발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외환위기의 주범이 재벌이라는 점에서 “과거 실패한 방식을 답습하자”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 외자유치에 대한 반발 정서와도 일맥상통하는 대목이 있다. 가령 은행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대우자동차를 지원해 줄 수 없기 때문에 대우차의 해외매각이 불가피함에도 일부 전문가들은 ‘국부 유출’ ‘헐값 매각’ ‘국내 자동차산업 기반 붕괴’ 운운하며 반대했다. 그러나 자동차 전문가들은 “히딩크가 한국 축구의 선진화를 이끌었듯, 대우자동차를 GM에 매각하는 것은 GM의 선진 경영기법을 배울 수 있을 뿐 아니라 국내 자동차 시장의 경쟁을 촉진해 소비자들의 선택폭을 넓혀주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 축구는 한국 경제 ‘판박이’
    말할 필요도 없이 히딩크 이전의 한국 축구는 우물 안 개구리 수준이었다. 이 점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경기는 98년 프랑스 월드컵 본선 조별 리그 첫 경기인 멕시코전이었다. 한국은 전반 27분 ‘왼발의 달인’ 하석주가 30m짜리 프리킥을 성공시켜 월드컵 본선무대 사상 처음으로 리드를 잡아나갔다. 그러나 2분 뒤 어이없는 백태클을 감행한 하석주의 ‘퇴출’ 조치로 경기 주도권은 멕시코 쪽으로 넘어갔고, 결국 후반 연속 3골을 내줌으로써 1대 3으로 무릎을 꿇었다.

    하석주의 백태클은 한국팀이 축구의 기본인 경기 규칙도 제대로 모른 채 세계무대에 나선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만한 일이었다. 당시 국제축구연맹은 선수 보호를 위해 경기 규칙을 바꿔 98년 프랑스 월드컵 때부터 백태클을 하는 선수는 곧바로 퇴장조치하도록 했기 때문. 결국 한국팀은 국내에서나 통하는 ‘동네축구’ 수준이면서 ‘월드컵 16강’ 운운해 세계의 ‘비웃음거리’가 됐던 셈이다.

    한국 축구는 한국 경제 ‘판박이’
    당시 한국 경제도 그랬다. 60년대 이후 고속성장을 거듭해 세계의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던 한국 경제는 97년 7월 태국 바트화 폭락 이후 북상하기 시작한 동남아 외환위기에 허망하게 감염됨으로써 허약한 경제 체질을 노출했고, 세계의 연민과 비웃음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경제전문가들은 그런 비웃음을 사게 된 것은 순전히 한국의 ‘백태클’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우량 계열사 자금을 주주 허락도 없이 빼내 부실 계열사에 지원하는 것이나, 엄청난 차입금을 수익성 없는 사업에 꼬나박는 것, 그리고 도대체 기업 내용을 파악할 수 없는 회계 처리 등은 한국 기업이 그동안 저질러온 ‘백태클’의 전형이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경제의 이런 백태클 관행에 ‘레드카드’를 제시한 게 바로 외환위기였던 셈.

    98년 당시 축구협회는 한국팀이 멕시코에 1대 3으로 패한 뒤 네덜란드에 0대 5로 대패하자 그 책임을 물어 차범근 감독을 소환조치했다. 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 역시 외환위기의 책임을 물어 외환위기 당시 경제부총리와 청와대 경제수석이던 강경식 김인호씨를 사법처리했다. 왜 한국 축구가 세계무대에서 통하지 않게 됐는지, 그리고 외환위기를 초래한 구조적 원인은 무엇인지 등을 차분히 따져보지 않고 일단 ‘희생양’부터 만들어냈던 셈이다.

    한국 축구와 한국 경제의 선전은 기분 좋은 일이지만 앞으로가 문제다. 월드컵에서의 선전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는 한국 축구의 저변 확대가 필요하듯, 한국 경제도 체질 강화를 위한 지속적인 구조개혁이 절실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세계적인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도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창조성과 개혁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한국 축구와 경제는 일치한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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