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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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전노장 수비의 달인 “안방은 걱정 마”

34세 동갑 월드컵 4회 출전 자존심 대결… 정확하고 긴 공간 패스 능력으로 경기 주도

  • < 김한석/ 스포츠서울 체육부 기자 > hans@sportsseoul.com

    입력2004-11-01 15: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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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리 군단’ 이탈리아의 수비사령관 파올로 말디니(AC 밀란)와 ‘무적 함대’ 스페인의 조타수 페르난도 이에로(레알 마드리드). 백전노장의 두 수비 스타에게 2002년 한·일 월드컵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34세 동갑내기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부터 네 번째 월드컵 도전. 두 사람은 생애 마지막이 될 듯한 21세기 첫 월드컵에서 그동안 조국이 겪은 월드컵 징크스를 풀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안고 대회에 나선다.

    말디니는 84년 프로 입문부터 18시즌 동안 오로지 AC 밀란의 수비만 지키고 있는 ‘밀라노의 수호신’이다. 88년 데뷔 이후 A매치에 121회 출장해 이탈리아 선수 중 최다 기록을 세웠다. 이에로는 올해 창립 100주년을 맞은 레알 마드리드의 인기투표에서 역대 1217명의 선수 중 당당히 3위를 차지한 ‘마드리드의 얼굴’. 말디니보다 1년 늦게 데뷔해 84회의 A매치 경력을 쌓아 스페인의 필드 플레이어로서는 두 번째로 많은 출장 기록을 갖고 있다. 두 사람은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수비 스타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월드컵 무대에서 명예롭게 은퇴하겠다는 의지가 영락없이 닮은꼴이다.

    이탈리아는 90년 대회부터 말디니의 지휘 아래 19경기 중 10경기를 무실점으로 틀어막는 철벽수비를 자랑했지만, 승부차기에서 3연속 실패하는 징크스에 시달려왔다. 말디니는 왼쪽 수비수로 출전한 90년 월드컵에서 5경기 연속 무실점의 철옹성을 쌓았지만 준결승에서 만난 아르헨티나에 승부차기로 일격을 당했고, 4년 뒤엔 결승까지 올라 브라질의 파상공세를 막아냈지만 역시 승부차기로 패했다.

    60년대 AC 밀란의 전성시대를 이끈 아버지 체자레(70·현 파라과이 대표팀 감독)와 함께 월드컵 사상 유일무이한 부자(父子) 출전으로 팬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던 98년 프랑스 월드컵. 이번엔 8강전에서 프랑스에 덜미 잡혀 부자가 부둥켜안고 분루를 삼켜야 했다. 감독인 아버지가 겪는 고통을 지켜본 말디니는 “은퇴해도 지도자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가 이번 대회에서 월드컵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새로 쓸 수 있을지도 관심거리다. 3회 연속 전 경기에 출장하면서 쌓은 출장 기록만 19경기. 이번에 준결승전에 진출한다면 독일의 로타르 마테우스가 98년 월드컵에서 37세에 세운 최다 출장 기록(25경기)을 경신하게 된다. 1930분을 기록하고 있는 출전 시간은 1라운드 3경기만 더해도 마테우스의 기록(2048분)을 뛰어넘는다. 냉정한 상황 판단, 강한 대인 마크와 커버플레이, 안정적인 볼처리, 공격수를 무색케 하는 현란한 드리블, 단 한 번의 긴 패스로 공격 찬스를 엮어내는 넓은 시야와 패스 능력 등 측면 수비수로서의 모든 자질을 갖춘 말디니의 활약은 그래서 더 주목할 가치가 있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프리메라 리가와 쟁쟁한 스타 군단의 면면이 빛나는 축구 강국 스페인. 그러나 스페인은 50년 대회에서 4강에 진입한 후 월드컵에서는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큰 대회 징크스’에 시달리고 있다. 98년 대회에서 1라운드 탈락의 수모를 당한 이후 이에로는 이 징크스를 털어내기 위해 수비형 미드필더에서 센터백으로 포지션을 바꿨다.

    94년 스위스와의 16강전 선취 결승골, 98년 나이지리아, 불가리아전 선취골 등 월드컵에서 터뜨린 3골을 포함해 그가 A매치에서 쌓은 골만 27개. 세 경기에 한 골씩 명중시킨 스페인 역대 최다 기록이었다. 나이를 거스르는 강한 체력과 가공할 중거리포, 세트플레이에서 더욱 정확한 헤딩슛 같은 공격수로서의 자질이 아까웠지만, 카마초 감독은 그를 중앙 수비라인으로 고정시켜 수비 조율에 전념케 하고 있다. 골은 이제 충분히 성장한 라울과 모리엔테스가 맡아주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수비를 지휘하다가도 정확하고 긴 대각선 패스로 경기를 반전시키는 이에로의 탁월함이 첫 우승 도전에 든든한 뒷심이 돼줄 것으로 믿고 있다. 98년 월드컵 이후 그가 뛴 경기의 평균 실점은 0.61.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참가하고도 선배들에 가려 벤치를 지켜야 했던 이에로는 수비수로 변신한 이번 월드컵에서 더욱 큰 사명감을 느낄 것이다.

    강한 카리스마, 풍부한 경험, 지능적인 경기운영으로 수비의 무게중심을 잡고 있는 베테랑들이지만 두 선수의 플레이 색깔은 전혀 다르다. 주로 측면 수비를 맡은 말디니가 냉정함을 앞세워 수비 지향적인 플레이를 펼친다면, 중앙 수비를 책임지는 이에로는 투쟁적이면서도 공격 지향적이다.

    80년대 말 마라도나와의 경기에서 이겼을 때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는 그의 모습에서 진정한 스타를 보았다”는 말디니는 121회 A매치에서 한 번도 퇴장당하지 않았다. 반면 이에로는 프리메라 리가에서 468경기에 출전해 136회의 경고와 14회의 퇴장을 당한 이 부문 최다 기록 보유자다. 90년대 초반 이에로의 집중 마크를 받았던 유고 공격수 스토이치코프는 “이에로는 냉정함부터 배워야 한다”고 충고했을 정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나고 자라 아버지의 엄한 축구 교육 덕분에 냉정함을 갖춘 말디니와, 피카소의 고향 말라가에서 태어난 정열의 이에로. 두 선수가 맞부딪칠 가능성이 높은 8강전과 준결승전이 한국에서 펼쳐진다는 사실은 더할 수 없는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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