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1

2002.04.25

이몽룡 없이 테크노 추는 춘향이

연극인 오태석의 ‘고전 바꾸기’ 실험 … 젊은 세대 가치관 담은 새 연극 형식 창출

  • < 신을진 기자 > happyend@donga.com

    입력2004-11-01 15: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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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몽룡 없이 테크노 추는 춘향이
    ”성, 이름 버린다고 당신이 어디 가. 그거 구겨 던지고 대신 날 가져. 퍼가. 내 사랑 바다만해 퍼내면 더 많아져.”

    오태석씨(62)가 각색하고 연출한 극단 목화의 ‘로미오와 줄리엣’(3월29일∼4월14일 예술의전당)에는 “오, 로미오 당신은 왜 로미오인가요?” 같은 낯익은 고전 속 대사를 찾아볼 수 없다. 대신 3·4조의 전통 운율로 구성지게 이어지는 대사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원전과는 전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씩씩하면서도 살가운 줄리엣의 모습과 청년다운 기개, 장난기 넘치는 로미오의 모습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클레어 데인즈가 나왔던 MTV풍의 할리우드 영화보다 더 파격적으로 느껴진다.

    연극을 본 사람들이 “역시 오태석”이라고 감탄하게 되는 것은 이처럼 숱하게 듣고, 보고, 읽었던 셰익스피어의 고전이 그의 손에서 완전히 새로운 작품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원작의 줄거리를 따라가지만 연극언어는 온전한 한국 전통극이고 우리 전통 연희의 흥과 재미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처음 사랑을 시작한 애송이들의 푼수 같은 떨림과 흥분을 극의 전면에 배치해 마치 비극이 아닌 희극을 보는 듯 해학이 넘치지만, 끝내는 양가의 칼부림으로 모두가 죽임을 당하는 최악의 비극적 상황을 연출한다.

    이몽룡 없이 테크노 추는 춘향이
    오씨는 “기성세대의 갈등과 반목이 인간의 비극적 조건이고, 이에 따라 젊은이들의 순수한 사랑이 파괴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오씨의 기성세대 비판과 젊은 세대에 대한 애정은 국립극장에서 공연중인 연극 ‘기생비생 춘향전’(4월9∼21일)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기생이면서 기생이 아니’라는 뜻의 ‘기생비생…’에는 이몽룡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구세대를 대표하는 월매와 신세대를 상징하는 춘향 두 여성의 갈등 구조가 작품의 뼈대를 이룬다.

    월매에게 정절이니 수절이니 하는 것은 사대부 부인들의 전용물일 뿐이다. 딸과 백년가약을 맺은 이몽룡이 떠나고 신관 사또가 부임하자, 월매는 춘향에게 “잊자. 구관 사또 자제 잊고 신관 사또 수청 들자. 수절한다고 까마귀가 학이 되냐? 이 에미가 창녀이니 너 또한 창녀이지 않느냐”라고 말하고, 이에 대해 춘향은 “어머니가 기생이었다고 나 역시 기생으로 살 수 없다. 나는 한 사람의 양인으로서 한 남자만 모시고 살아가겠다”고 말한다.



    ‘춘향전’ 또한 누구나 보고 듣고 자란 고전이지만, 오태석의 ‘춘향전’은 전혀 색다르고 새로운 작품이다. “춘향이가 왜 수절했겠어? 사랑 때문에? 수청 안 든다고 3년 동안이나 매일같이 매를 맞는데 무엇으로 견뎠겠어요. 정절을 지킴으로써 기생 신분을 벗어나겠다는 굳은 의지가 없었다면 그게 가능할까요”라고 오씨는 반문한다.

    테크노 댄스를 추고, 직접 한양으로 이도령을 만나러 가겠다고 떼쓰고, “어머니처럼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기생비생…’ 속 춘향의 모습은 스스로의 잣대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자신을 옭아매는 사회적 굴레를 벗어 던지려는 현대적 여성상으로 눈길을 끈다.

    “자신의 소신대로 살라”는 작품의 메시지는 바로 오씨가 지금의 젊은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나는 우리 세대 젊은이들이 저마다의 소신대로 기개 있게 살았으면 해요. 쉽게 포기하고 안주해 버리는 모습이 아쉬워요.”

    회갑을 넘긴 ‘큰어른’이지만 그는 “지금의 어른들이 크게 잘못하고 있다”고 일갈한다. “오랜 세월 동안 이념 문제 하나 해결 못하고, IMF사태 같은 위기 상황을 만든 지금의 기성세대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좋은 장치들을 만들어주지 못했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기성세대를 믿지 말고 자신의 가치관대로 소신껏 살아가라’고 말하고 싶다.” 유독 그의 연극에 젊은 관객이 몰려드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말이다.

    그를 만난 건 ‘기생비생…’ 개막을 하루 앞둔 프레스 리허설 때였다. 오씨는 객석에 앉아 무대를 지켜보면서 최종 점검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일반적인 의미의 ‘최종 점검’과 거리가 있었다. 철저하게 계산된 연기와 꽉 짜인 무대연출 같은 건 없고, 배우도 연출자도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다소 헐렁한 리허설이었던 것.

    “안무하면 재미없어. 그냥 맘대로 춰.” ‘짠짜짠짜∼’ 하는 오씨의 입장단에 맞춰 흥에 겨운 대로 각자 알아서 춤추는 배우들과, 내일이 당장 공연인데 “이것저것 아직 손볼 곳이 많다”고 말하는 연출자의 느긋한 모습에서 오태석 연극의 특징인 자유로움과 즉흥성을 읽어낼 수 있다. 이런 오씨 특유의 ‘헐렁함’은 우리 동양화에서 볼 수 있는 ‘여백의 미’와도 일견 상통하는 면이 있는데, 이를 두고 어떤 연극평론가는 “오태석의 연극에서는 숨쉬기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연극이란 게 만드는 쪽에서 일방적으로 끌고 가는 건 아니라고 봐요. 관객들이 참견하고 간섭해야 하거든요. 난 연극을 하면서 항상 관객들과 같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몽룡 없이 테크노 추는 춘향이
    이런 그의 연극철학은 ‘맨발론’에서도 드러난다. 오태석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거의가 맨발인 채로 무대에 서서 연기를 한다. 줄리엣도 맨발이고, 춘향도 그렇다. 다소 낯설고 긴장된 분위기의 극장에서 배우가 맨발로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관객 입장에선 절로 긴장이 풀리고 마음을 놓게 마련. 오씨는 “관객이 마음을 열면 열수록 작품의 메시지는 빨리 전달되고, 배우 입장에선 조명으로 따뜻해진 무대에 맨발로 서면 심리적으로 훨씬 안정된다”고 설명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연극이 올려진 무대는 옛날 사랑방처럼 편안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60년대 초 연세대 철학과 재학중에 너무 배가 고파 라면과 담배를 얻기 위해 극단의 막잡이 노릇을 한 것이 인연이 되어 연극인생을 시작했다는 오씨는, 70년대 이후 현재까지 한국의 대표적 연출가로서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로 연극 속에 한국인의 정신력과 생명력을 담아왔다. 전문가들은 오씨에 대해 “그동안 따라가기 바빴던 아리스토텔레스적 연극관을 뒤집어엎고 한국적 연극 형식을 창출했다”고 평한다.

    “우리나라 사람들, 몇 천년을 이어온 전통과 멋이 있는데 너무 빨리 포기해 버렸죠. 나는 ‘우리에게도 이런 것이 있다’는 걸 얘기하기 위해 노력해 왔어요.”

    그는 “‘쇠 꼬랑지 말고 닭 대가리가 되라’는 어느 스승의 정년 퇴임사를 들었던 대학 시절부터 쇠 꼬랑지를 면하려고 40년 동안 노력해 왔지만, 그저 쇠 꼬랑지 그대로 요만큼도 변한 게 없다”고 희미하게 웃는다. 그래도 그가 있어 한국 연극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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