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31

2002.04.25

만화 캐릭터, 현실로 뛰쳐나오다

80년대 후반부터 ‘명랑 히로인’의 좌충우돌 인기 … 세대 따라 ‘신데렐라’도 변화

  • < 박인하/ 만화평론가·청강문화산업대 교수 > enterani@yahoo.co.kr

    입력2004-11-01 14: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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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 캐릭터, 현실로 뛰쳐나오다
    미국의 만화가이자 이론가인 스콧 매클루드는 자신의 저서 ‘만화의 이해’에서 ‘탈바가지 효과’라는 독특한 이론을 제안했다. 일반적으로 만화에서 주인공들은 단순화한 만화체로 그려지는 반면, 배경은 오히려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이런 대비를 통해 사실적 배경은 만화에 현장감을 부여하고, 만화체 주인공은 감정 이입의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즉 매우 사실적으로 생긴 인물들은 내가 아닌 타인으로 느껴지지만, 거꾸로 만화적 과장을 거친 인물이 타인이 아닌 나로 받아들여진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만화적 과장, 그중에서 여성 캐릭터와 관련된 만화적 과장에는 무엇이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커다란 눈이다. 디즈니 만화영화의 의인화된 동물 캐릭터에서 빌려온 커다란 타원형 눈은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 이후 만화에서 애용하는 ‘시각적 관습’이다. 작은 눈은 인물을 사실적으로 만들고 강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암시하지만, 커다란 눈은 인물을 부드럽고 귀엽게 만든다. 마치 ‘여동생’ 같은 느낌을 독자들에게 선사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작은 코다. 커다란 코가 특권적인 인물임을 암시한다면, 작은 코는 귀엽고 친근한 이미지를 선사한다. 무엇보다도 만화적 과장의 핵심은 사람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특징만 잡아 그려내는 것에 있다. 얼굴을 동그라미, 네모, 세모로 그려내는 것은 대표적인 만화의 과장이다.

    바야흐로 ‘명랑소녀’들의 전성시대다. 김정은은 26세로 명랑자매라 부르기에 조금 노숙하니 제외하고, 박경림과 장나라? 좋다.

    만화 캐릭터, 현실로 뛰쳐나오다
    장나라의 얼굴은 이영애나 황신혜와 같은 카리스마를 지닌 미인형이 아니다. 그들에 비해 코는 낮고, 얼굴에는 젖살이 남아 있는 듯하며, 눈은 커다랗다. 데즈카 오사무 ‘철완 아톰’의 ‘우란’(아톰의 여동생), ‘리본의 기사’의 ‘사파이어 공주’에서 시작된 전형적인 만화 속의 여주인공이다. 귀엽지만 말썽꾸러기 여동생 우란, 바로 장나라의 이미지다.



    말썽꾸러기 천사 칭 때문에 남자 마음을 갖고 태어난 사파이어 공주는 형편상 왕자가 되어 삶을 살아간다. 드레스를 입는 아침 시간에는 너무나 여자답고 얌전하지만, 남자 복장을 입으면 씩씩하게 변한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공존, 중성적 이미지, 그러나 어느 순간은 한없이 여자 같아 보이는 주인공, 역시 명랑소녀들이다.

    만화 캐릭터, 현실로 뛰쳐나오다
    만화의 여자 주인공들, 특히 순정만화의 주인공들은 한때 빛나는 눈과 높은 코를 자랑했다. ‘베르사유의 장미’ ‘올훼스의 창’에 등장한 주인공들은 카리스마를 지닌 히로인으로 80년대 우리나라 순정만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김동화 한승원 황미나 신일숙 등의 만화에 등장하는 히로인들은 죽음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는 깊은 사랑에 빠졌다. 이들 만화 주인공들의 시각적으로 높고 뾰족한 코는 당당한 카리스마를 상징한다.

    그러나 순정만화에 웃음이 접목되면서 주인공의 코는 낮아졌다. 높은 코를 갖고서는 도저히 명랑한 연기를 할 수 없었다. 그들은 70, 80년대 명랑만화 주인공들을 닮아갔다. 명랑만화는 일상생활에 뿌리를 두고 해프닝을 그린 만화다. 요새 말로 설명하면 시트콤이라고 할까.

    이 장르의 대가는 길창덕. 그는 50년대에서 90년대까지 40여년을 명랑만화 작가로 활동했다. 그가 이룬 풍성한 숲은 윤승운 신문수 박수동 윤준환 등이 가세해 거대한 숲이 되었다. 길창덕이 창조한 명랑만화 히로인은 ‘꺼벙이’에 등장한 동생 ‘꺼실이’와 ‘순악질 여사’의 일자 눈썹 ‘순악질 여사’, 그리고 ‘이웃집 소녀 돌네’의 전화기 머리 ‘돌네’가 있다. 꺼실이는 가만 보면 ‘명랑소녀 성공기’의 주인공 장나라와 닮았다. 어릴 적 외가에서 자라다 서울로 상경한 설정이 그렇고, 땋은 머리와 사투리, 오빠보다 좋은 힘, 당당함이 그렇다. 다른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예쁜 척하지 않고 당당하며, 소탈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능동적으로 개척한다.

    박경림이 보여준 좌충우돌의 명랑함은 여기에 뿌리를 둔다. 명랑만화 히로인들은 80년대 후반 이미라의 만화를 통해 부활했다. ‘인어공주를 위하여’의 만화가족 막내딸 ‘슬비’는 말썽꾸러기에 구박 덩어리지만 어릴 적 푸르매와의 약속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명랑한 순정소녀였다.

    만화 캐릭터, 현실로 뛰쳐나오다
    일본에서는 80년대에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다. 소년만화의 여자 주인공들이 귀엽고 명랑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스톱!! 히바리군’의 히로인(남자지만 항상 여자 옷을 입고 다니는 히바리군)은 긴 생머리에 커다란 눈, 그리고 아주 작은 코로 남성 독자들에게 새로운 팬터지를 선사했다.

    커다란 눈에 작은 코의 히로인은 대부분 격정적인 사랑에 매달리는 드라마틱한 삶의 주인공이 아니라 친근하며 귀엽고, 응석 어린 이미지의 주인공들이다. ‘철완 아톰’의 여동생 ‘우란’이 그랬듯 이들은 우리의 여동생 같은 이미지로 등장해 소년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90년대 들어 순정만화와 소년만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명랑 히로인들의 기세는 더욱 넓어졌다. 특히 하이틴 순정만화를 이끌어가는 선도 장르인 학원물은 멋진 남자, 귀여운 여자라는 도식을 일반화했다. 카미오 요코의 ‘꽃보다 남자’에서 평범하고 귀여운 여자 츠쿠시는 재벌 2세 같은 킹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츠쿠시는 커다란 눈에, 작은 코의 귀여운 얼굴을 가지고 있다. 마음이 착하고, 밝고,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다. ‘꽃보다 남자’는 이런 명랑소녀가 왕자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속삭인다.

    만화 캐릭터, 현실로 뛰쳐나오다
    최근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학원물인 황숙지의 ‘사랑과 정열에게 맹세!’의 히로인들도 모조리 명랑소녀다.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 아이에게 “난 너의 공주님이라고 말해봐!” 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예전처럼 빼거나 고민하거나 얼굴 붉히지 않고 당당하게 고백한다. 박경림처럼.

    명랑소녀들. 이들은 만화의 유구한 전통 속에서 존재한다. 한 축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로, 다른 한 축은 떳떳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당당함으로. 더 이상 조신함이 미덕이 아니듯, 이들 명랑소녀들은 자신의 전성시대를 열어가며 세상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당당하게, 세상에 소비되지 말고 세상을 지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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