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2

2002.02.14

블렌딩 와인, 그 오묘한 맛의 첫 경험

美 켄들잭슨社, 각기 독특한 맛의 포도 섞은 ‘신개척지의 맛’ … ‘캘리포니아 와인’ 지평 넓혀

  • < 조용준 기자 > abraxas@donga.com

    입력2004-11-15 15: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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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렌딩 와인, 그 오묘한 맛의 첫 경험
    와인(포도주)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들에게 와인의 라벨을 제대로 읽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널리 알려진 프랑스 와인이라도 보르도 지방은 ‘샤토 마르고’(Cha?eau Margaux) 등의 제조회사(양조장) 이름이 라벨에 가장 크게 표기되지만, 부르고뉴 지방에서는 ‘로마네 콩티’(Roman럆 Conti)처럼 포도 재배지역(밭)의 이름이 크게 붙는다. 반면 미국과 호주 등은 샤도네이(Chardonay)나 카베르네 쇼비뇽(Cabernet Sauvignon) 같은 포도 품종의 이름이 회사 명칭과 함께 크게 붙는다. 따라서 공부하지 않으면 라벨에 붙어 있는 것이 양조장 이름인지, 지역 이름인지, 포도 품종인지 도대체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와인 고르기가 더 어려운 것은 같은 재배지역이더라도 조그맣게 나눠진 밭의 토양성분에 따라 와인 맛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특성 때문이다. 예를 들어 최상급 와인으로 보르도 포메롤 지역이 낳은 20세기의 기적이라고 일컫는 페트뤼스(Petrus)의 경우, 이 와인이 생산되는 밭은 포메롤 지역의 다른 밭과 달리 철분이 많은 점토질이다. 이 땅이 메를로(Merlot·포도 품종의 하나)와 결합해 절묘한 조화를 이뤄낸 것이다.

    블렌딩 와인, 그 오묘한 맛의 첫 경험
    변덕스럽고 다루기 까다롭지만 그 성질만큼이나 다양한 와인을 만들 수 있는 피노 누아르(Pinot Noir·포도 품종의 하나)를 주로 사용하는 부르고뉴 ‘코트 도르’(황금의 비탈이라는 뜻)만 하더라도, 향 짙은 와인을 만드는 석회질과 감칠맛 나게 하는 점토질, 가벼운 와인을 만드는 규산토(이산화규소를 포함한 토양)가 밭에 따라 어떻게 균형을 이루느냐에 따라 매우 복잡한 와인이 생겨나게 된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는 밭이 2m만 떨어져 있어도 전혀 다른 와인이 만들어진다. 똑같은 품종의 포도라 해도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맛과 향기 등의 뷰케(향취)가 천지 차이인 와인이 생산되는 것. 따라서 최상급 와인을 고른다는 것은 순전?‘신의 손’에 맡길 수밖에 없다(물론 비평가의 힘을 빌릴 수도 있지만).

    이처럼 유럽 지역의 와인들은 포도나무 품종과 재배지역을 보고 고르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는 좀 다르다. 와인 생산량의 96%가 캘리포니아에 집중돼 있는 기후적 특성 때문이다. 토양도 유럽처럼 복잡하지 않다. 당연히 향취가 복잡해질 수 있는 여지가 상당히 줄어든다. 와인업자들도 토양은 부차적으로만 생각한다. 미국산 와인이 포도 품종을 라벨에 크게 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국에서 판매되는 전체 와인의 75%는 유럽이나 남미산이 아닌 미국산이다.

    블렌딩 와인, 그 오묘한 맛의 첫 경험
    그렇다면 미국의 와인 제조업자들은 이런 단점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이런 약점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 바로 ‘콜라주 와인’의 출현이다. ‘콜라주 와인’이란 쉽게 말해 서로 다른 지역에서 재배한 포도를 섞어 만든 블렌딩 와인이다.



    캘리포니아 와인 생산지는 로스앤젤레스 위쪽의 샌타바버라부터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소노마까지 매우 좁은 지역에 한정돼 있다. 이 지역에 850개 이상의 포도농장(회사)이 흩어져 있다. 이 가운데 오늘날 미국의 1급 레스토랑에서 가장 호평받고 있는 것은 켄들잭슨(Kendall-Jackson)의 블렌딩 와인. 와인 마스터들도 놀란 새로운 개념의 ‘콜라주 와인’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켄들잭슨은 법률가 출신으로 와인 애호가였던 제시 잭슨이 1982년에 설립한 와인 회사. 역사로만 보면 유럽에 비길 바가 아니다. 그러나 켄들잭슨은 회사 설립 이듬해인 1983년 4개의 와인 품평대회에서 대상을 휩쓸면서 미국을 대표하는 와인 회사가 되었다. 켄들잭슨이 이처럼 짧은 시간에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좋은 포도의 생산이 가장 큰 이유. 켄들잭슨의 지역판매 담당 이사인 스티브 메신거씨는 “켄들잭슨의 포도밭은 캘리포니아 포도밭 중 가장 비싼 지역이다. 다른 지역은 포도 1톤을 생산하는 데 300달러밖에 들지 않지만, 우리는 1톤에 2000달러가 들어간다”고 설명한다.

    블렌딩 와인, 그 오묘한 맛의 첫 경험
    그렇다면 켄들잭슨은 어떻게 와인을 블렌딩하는 것일까. 켄들잭슨의 포도밭은 모두 다섯 곳에 나뉘어 있는데 각기 토양과 기후에 따라 맛이 다르다. 서늘하고 자갈이 많은 단구와 가파른 구릉 중턱에 있는 멘도치노 카운티의 앤더슨 힐에서 나오는 포도는 미네랄 성분의 산도가 높고 부드러우며 사과 맛이 난다. 경사가 완만하고 해안성 기후 지역인 소노마 카운티의 러시안 리버 힐산(産)은 풍부한 감촉에 잘 익은 사과나 감귤 맛이다. 또한 고원에 위치한 모래 섞인 토양인 몬터레이 카운티의 산타루치아 하이랜드산은 부드러운 레몬 라임의 향취가 강하다. 이처럼 서로 뷰케가 다른 다섯 종류의 포도에서 나온 원액을 섞어 만든 것이 바로 새로운 개념의 블렌딩 와인. 켄들잭슨은 더 나아가 다른 두 품종 이상의 포도를 배합한 ‘콜라주 시리즈’도 선보였다.

    와인 마니아라면 직접 캘리포니아로 날아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와인 배합을 통해 전 세계에서 단 하나인 ‘자신만의 와인’을 만들 수도 있다.

    와인 평론가들은 흔히 캘리포니아 블렌딩 와인을 ‘신개척지의 맛’이라 평가한다. 유럽산 와인이 오랜 전통과 고정된 포도밭에서 생산된 와인이라면, 미국 와인은 포도 원액을 배합해 새롭게 만든, 마치 신대륙을 개척한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유럽산 와인은 그해 기후에 따라 와인의 품질이 확연하게 달라진다. 포도를 추수할 시기에 비가 오거나 일조량 등에 따라 포도의 품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캘리포니아는 추수 시기에 거의 비가 오지 않는다. 기후에 영향 받을 가능성이 그만큼 적다. 따라서 와인의 품질도 고를 수밖에 없다. 유럽산 와인이 ‘고르는’ 재미가 있다면, 미국산 와인은 어느 것이든 평균 점수는 된다는 안정감이 있다고나 할까. 물론 마니아들이 즐기는 ‘복잡 미묘함’과 ‘신의 보이지 않는 손길’을 느끼는 재미는 줄어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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