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0

2002.01.31

특무대에 잡혀간 손기정 外

  • < 자료 : 지적 쾌락의 세계 와우밸리(www.wowvalley.com) >

    입력2004-11-10 14: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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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무대에 잡혀간 손기정 外
    선수의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공정한 경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치적 상황이나 도박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스포츠 경기에 외부의 압력이 개입되는 경우도 있다. 1950년대 우리나라 축구팀 중에서는 육군본부 소속 특무대팀이 최강이었다. 특무대팀은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을 가진 김창룡 특무대장이 만든 팀으로, 어디에 소속되었든 기량이 뛰어나다고 소문난 선수는 모두 불러들였다. 그런데 이 특무대팀이 1951년 제5회 전국축구선수권 겸 헬싱키올림픽 출전선수 선발전에서 우승하지 못했다. 당연히 우승한 대구방적팀은 선수와 응원단이 얼싸안고 헹가래를 치며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본 김창룡 특무대장은 심사가 뒤틀렸다. 그는 부하를 시켜 대구방적 책임자를 불러들였다. 축구경기에 이겼다고 군인들에게 끌려간 사람은 다름 아닌 손기정 선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손기정 선수를 연행했다가 뒤늦게 알아본 군인들은 사과를 했다. 손기정 선수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1949년에 국내 첫 여자축구 경기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축구 경기는 해방 후인 1949년 6월28일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여자축구 경기는 이틀 동안 열린 전국여자체육대회의 한 종목. ‘체육신문사’의 김은배 사장과 축구인 김화집은 여자축구를 농구나 배구처럼 활성화하려고 했다. 이미 유럽에서는 여자축구가 성행했고 일부 동남아 국가에서도 여자축구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여자가 축구 하는 것에 반대 의견이 많아 축구를 하는 여성은 매우 드물었다.

    최초로 여자축구 경기가 열린다는 소문에 수많은 구경꾼이 경기장으로 몰려들었다. 출전팀은 무학여중, 중앙여중, 명성여중, 서울여중 4개 팀. 경기는 전후반 30분으로 개최되었다. 경기 규칙은 남자와 같았지만 예외도 있었다. 여자선수들은 가슴에 날아오는 공을 손으로 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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